작년 3, 4분기 일자리가 무려 21만개나 증가했다. 심지어 그 어렵다는 도소매업에서 8만 6천개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언론이 다루는 것은 건설에서 줄어든 11만개의 일자리다. 그것까지 포함해서 전체 일자리가 늘었는데 줄어든 몇 개만 콕 집어서 비판도 아닌 저주를 쏟아내고 있다.

 

더 말하기도 싫다. 그냥 언론이 개새끼들이다. 진보고 보수고 상관없다. 어차피 경제기사 쓰는 놈들은 기업 상대하는 엘리트들이다. 기업 임원들이랑 밥먹고 술먹는 잘나신 인간들이다. 대학도 좋은 데 나왔을 테고 그런 만큼 대접도 받아야 할 테고. 물려받은 아파트라도 있으면 그것도 값이 올라야 할 테고.

 

고용통계를 찾아볼수록 어이가 없다. 전체 일자리가 늘었는데도 3, 40대 일자리 줄어든 것만 기사로 쓰고,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했는데 인구변동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도 없고, 심지어 고용통계를 비교할 때 그 대상이 전년 문재인 정부 시기의 고용통계이기도 하다. 월별 계절별 변동도 고려치 않는다. 몰라서가 아니다. 그냥 쓰레기라서다.

 

최근 언론들이 뭐 어쩌고 자성하네 저널리즘을 되찾네 지랄하는 것 그래서 믿지 않는다. 진짜는 뉴스다. 기자는 기사로 말하는 것이다. 뉴스가 아닌 프로그램에서 기사도 아닌 말로 때우는 방송따위 믿을 수 있을까. 저러다 정권 바뀌면 바로 충실한 애완견으로 바뀌겠지. 기자는 사람취급하면 안된다. 그건 그냥 쓰레기들이다. 기레기란 말도 아깝다.

이명박근혜시절 아주 소수의 언론인을 제외하고 언론인들이 이토록 강하게 언론의 자유를 외치거나 하지 않았다. 당연히 경제도 당장 망할 것 같지 않았고 정부와 여당 인사들의 부정과 비위도 이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김학의와 관련한 의혹이야 현정부가 들어와서 불거진 것이지 당시에는 무혐의였다. 이에 대해 제대로 파고들려는 언론조차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에 비하면 이번 정부의 김의겸 전대변인에 대한 보도는 어떤가.

 

다시 말해서 저들이 말하는 언론의 자유란 이명박근혜시절의 자유인 것이다. 저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경제정책이란 이명박근혜 시절의 정책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이명박근혜로 되돌리자. 지금 언론이 한 목소리가 되어 밀고 있는 것이다. 진보언론도 예외없다. 그나마 양심적인 듯 보였던 JTBC도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진정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라는 말조차 나올 수 없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기자새끼들은 사람취급하면 안되는 것이다. 사람 가리는 것들은 사람취급해서는 안된다. 사람취급하면 기어오르고 짐승이나 물건취급하면 순종적이 된다. 욕하고 때리고 괴롭혀야 비로소 그들은 상대에 대한 존중을 배운다. 겸손과 사양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괜한 선의로 인해 오히려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군시절 후임을 통해 절실하게 느꼈었다. 나는 어지간해서 남에게 화내거냐 욕하는 걸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

 

어쨌거나 흥미롭다. 확실히 외신기자라는 것들도 현지화되는 것인지 지난 정부에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던 언론의 자유를 들먹이며 정부와 여당을 공격한다. 지난 정부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하긴 그 외신기자 속에는 중국 기자와 일본 기자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억압이란 것은 겪다 보면 편해지기도 한다. 기자라는 직업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꼭 그런 인간들이 기자가 되는 것인지. 그런 기자들에 낚이는 사람도 너무 많다. 그냥 한심하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는가. 피해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반드시 가해자를 단정짓거나 응징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라고. 피해자라 주장하는 그 말에 어떤 거짓도 없다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그가 지목한 상대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일단 사실관계가 명확히 입증되기 전까지 모든 피의자는 무죄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해사실이 입증될 때까지 피해자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것이 미투의 핵심이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 미투가 터져나왔을 때부터 주장해 온 것이었다. 아마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당시 모두가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들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동안에도 정작 그들을 비판하거나 하는 내용의 글을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다만 혹시라도 피해자일지 모르는 사람들을 무작정 의심하거나 비난하려 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예외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몇 마디 보태기는 했었다. 바로 이것이다. 들어주고 응원해주는 것. 긍정해주며 위로해주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실입증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다. 혼자서는 어려운 여러 과정들을 주위에서 직간접으로 도움을 줌으로써 피해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이다.

 

뭐 하나 의혹이 터지면 당장 누가 나쁜 놈인지부터 가리기 바쁘니. 아니 그런 판단을 하기 전에 입과 손은 비난부터 퍼부어대고 있다. 하나의 게임이다. 누가 나쁜 놈인가. 누가 죽일 놈인가. 그러니까 나는 누구를 욕하고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가. 그래서 오히려 모두가 비난할 때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있기를 즐긴다. 당장은 오히려 냉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오늘은 이쪽에서 열심히 비난을 퍼붓다가 내일은 또 저쪽에서 열심히 욕설을 퍼부어대다가 그런 과정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옳고 자신만이 정의롭다.

 

그냥 좀 냉정히 그저 지지만 해주면서 지켜만 봐도 좋으련만. 하긴 그게 더 어렵기는 하다. 워낙 티가 안나는 일이니까. 뭐라도 옆에서 목소리라도 높여야 주위에서 아무거라도 한다고 알아줄 것이다. 너는 왜 남들과 함께 비난하지 않고 침묵하는가. 아직은 판단이 서지 않았으니까. 판단이 섰을 때는 다들 알겠지만 말이 꽤 험하다. 고집도 무지 세다. 그래서 더 신중하다. 과연 눈앞의 사실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세상에 옳은 일 가운데 쉬운 것은 없다. 항상 언제나.

투기와 투자의 차이는 독점에 있다. 상품 자체든 혹은 그와 관련한 정보든 독점을 통해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 그를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얻는다. 하긴 아니면 그렇게 단기간에 확실한 이익을 실현한다는게 얼마나 가능할까?

단순히 다주택자라서 문제가 아니다. 투기목적의 다주택소유가 문제인 것이다. 모두가 가지고 싶은 집을 독점하고 그를 이용해 부당하게 가격을 올려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 결과 소수 다주택자들의 담합과 인위적 조작으로 인해 실수요자들이 아예 집을 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가격이 오르고 만다. 심지어 신혼부부나 무주택자를 대상으로 한 공급물량마저 이들이 독점하며 정작 필요한 사람이 사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다주택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동기나 그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들이 사회 전체를 위해 해악이 되므로 규제하자는 것이다. 차라리 다주택자더라도 임대사업자로 등록하고 세금만 제대로 내면 - 아니 그냥 다주택 소유하고 그에 따른 세금만 어김없이 낼 수 있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 종부세가 얼마고 공시지가가 얼마든 자기 돈으로 산 부동산이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차익을 노리고 빚까지 크게 내서 구입한 이른바 갭투자자들이다. 단기차익만 노리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 정도 세금부담에도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런 차익실현을 목적으로 한 다주택 보유마저 사유재산권이니 시장에 맡기고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인가. 그로 인해 부동산 아닌 주택가격이 오르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가는 것인가. 상가와 다른 이유다. 단독주택과도 다르다. 그래서 규제한다. 실거주 목적으로 구매하던가 아니면 투자목적을 분명히 하던가. 말하자면 부동산 투기란-아니 투기란 자체가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이며 다른 주체에 대해 피해를 줄 수 있는 행위란 것이다. 그래서 금지하는 것이다. 부동산 소유 자체가 문제라서가 아니라 그로 인한 시장의 교란과 개인의 피해를 막고자 하는 것이다.

그 점을 자꾸 오해한다. 아니 오해하게 만든다. 그런 언론을 보며 자신의 오해를 사실로 확신한다. 현정부는 부동산 소유 자체를 죄악시하고 있다. 부동산의 사유 자체를 죄악시하여 규제하려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서도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정부더러 어떻게 해결하라 다그치는 것이다. 정부가 뭘 어떻게 해야 개인의 사유재산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부동산 가격을 잡을 수 있을까? 그래서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한 정책을 내놓았더니 사유재산을 부정한다. 정부가 언제 다주택자가 실거주 이외의 주택을 팔지 않으면 처벌하겠다 하기라도 했는가. 세금 더 올릴테니 세금 더 낼 능력 되면 가지고 있으라. 따라서 문제가 된다면 부동산을 정당하게 구입했고 세금도 제대로 내고 있는가부터 따져물어야 한다.

하여튼 허수아비 때리기도 아니고 현정부의 정책 자체가 주택용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는데 상가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남몰래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빼돌려 선점한 것도 아니고 모두 아는 곳에서 시세보다 싼 매물을 빚까지 내서 산 것이 전부다. 그런 것까지 투기인가? 정부가 그런 행위까지 규제해야 한다는 것인가? 적당한 곳에 적당한 살 집이 없으면 당장 많은 사람이 곤란해지지만 상가는 아니다. 그리고 상가의 가치는 수요공급보다는 주변 상권의 변동에 더 크게 영향울 받는다. 아무리 건물을 비싸게 주고 샀어도 주변 상권이 그만하지 못하면 임대료를 올려 받을 수 없다. 가치가 떨어진다. 아는 사람일수록 상가투자는 신중해야 한다 말하는 이유다.

주거용 부동산- 그 가운데서도 아파트에 대한 규제가 부동산 전체에 대한 규제가 된다. 단기차익을 노리는 투기에 대한 규제가 부동산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능력 되면 사는 것이다. 자기가 돈 벌어 사는 것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다만 그에 따른 사회적 책임을 세금의 형태로 져야 한다. 어차피 대출이란 빚인데 빚마저 자신의 권리이기만 한 것은 아니미 않은가. 빚까지 내가며 단기차익을 위해 실거주이외의 집을 사서 실거주목적의 수요자들에게까지 피해를 주지 말라. 도대체 비판하는 포인트를 모르겠다. 부동산 소유가 문제인가? 투기에 대한 규제가 잘못인 것인가? 언론의 의도는 분명하다. 아파트 규제는 부동산 규제고 사유재산 침해다.

과연 얼마나 부당한 권력이 개입되었는가? 얼마나 부정한 수단들이 동원되었는가? 아파트의 투기수요를 규제했으니 아파트도 상가도 사서는 안된다. 그것은 위선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정부가 어떤 의도로 어떤 대상에 대해 강한 규제정책을 펴고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비판과 사실의 상관관계에 대한 의문이다. 무엇이 모순되고 위선적이기까지 한가. 부질없다. 기레기가 기레기일 수 있는 이유는 끊임없이 먹이가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승리했다.

바로 얼마전까지 모든 보수언론에서 일본의 경제정책을 찬양하고 있었다. 아베 총리의 경제정책이 일본에서 일자리도 늘리고 기업의 성장도 이끌었다. 일본이 긴 불황에서 헤어나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오히려 그동안 노동자들의 임금소득은 감소하고 있었다. 일자리는 늘었는데 그러나 정작 일을 하고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저축이 한 푼도 없다는 3,40대 인구가 부려 23%에 이르고 있었다. 3,40대 장년층에서 한 달 일해서 한 달 겨우 사는 사람의 수가 4명 가운데 1명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람들에게 소비여력이라는 것이 있을까?


일본의 물가가 안정적이라지만 그러나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물가 역시 오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만큼 시장에 돈이 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소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자 입장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시장도 활력을 되찾게 된다. 그런데 벌써 수십년 째 일본의 물가는 제자리다. 왜? 물가를 올리면 임금이 정체된 일본 국민들의 소득으로는 감당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출을 늘리기 위한 엔저정책으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수입물가가 오른 결과 오히려 임금이 줄어든 일본 장년층에게 저축할 수 있는 여유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그토록 저축을 좋아하는 일본 국민들이 더이상 저축을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과연 이것을 경제가 좋아진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오늘 아침에도 일본의 양적완화와 확장재정을 찬양하던 언론이 정부의 확장재정을 가지고는 재정건전성을 해친다며 비판 아닌 비판을 하는 기사를 보았었다. 이제 더이상 일본식 경제정책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그저 돈만 많이 찍어내서 기업에 몰아주는 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조금은 깨닫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정부의 임금정책에 대한 여전한 부정적인 평가들이 말해주고 있다. 일본처럼 임금을 동결하거나 낮춰서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면 그것으로 경제는 좋아질 것인가. 임금노동자들의 저축도 줄고 그만큼 소비가 위축되어 다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려는 일본경제를 보면서 그런 말이 당당히 나올 수 있는 것인가.


임금을 낮춰서 일자리를 더 늘리자. 지금보다 임금을 더 줄이고 노동시간을 더 늘려서 사람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게 하자. 그래서 누구 좋으라고? 저축할 여력도 없이 소비마저 줄여가며 겨우 한 달을 살아야 하는 노동자의 수만 늘린다. 그렇지 않아도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세계의 경기가 좋지 않으면 어디서 기업들은 활로를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냥 보수언론들이 떠들어대던 그대로 돌려주면 된다. 일본을 보라. 아베노믹스의 현실을 보라. 노동자의 임금상승 없는 일자리증가가, 수출만을 위한 정책이 어떻게 경제를 망치는가. 80년대 벌어놓은 것 없었으면 참 볼 만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조차도 안된다. 한심하다.

어느 식당 사장이 있다. 어느날 매출을 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1억 하던 매출이 9900만원으로 줄었다. 큰일이다!"


그리고는 인건비 줄이겠다고 종업원을 해고하고, 손님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 이벤트를 시작하고, 그러면서 원가를 낮추려 재료공급처까지 바꾼다. 과연 100만원 매출하락에도 바로 조치를 취한 이 식당은 다시 매출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장사라는 것을 아예 처음 해보는 것이 아니면 저런 식으로 장사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아는 것이다. 매출이라는 것은 때로 더 나오기도 하고 덜 나오기도 한다. 계절도 타고, 경기도 타고, 그보다 그냥 우연에 의해서도 매출이 늘었다가 줄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얼마나 장사가 잘되는가는 길게 보고 판단해야 한다. 진짜 심각한 상황만 아니면 한 달 매출만 보고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몇 달을 두고 꾸준히 추세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장사한지도 오래되어 안정기에 접어든 곳이면 더 그렇다. 그런데 고작 한 달 매출 100만원에 저 난리를 피워서 뭐가 되겠는가.


하여튼 대부분 언론들이 심지어 IMF까지 언급하며 최악이라는 단어를 아예 일상으로 써대길래 진짜 경제가 그렇게 나빠진 것인가 싶었었다. 40대 고용률이 심각하다길래 보았더니 고작 2%도 아니고 0.2% 줄었을 뿐이었다. 30대 고용률이 전년 동기 대비 75.4%에서 74.9%로 0.5% 줄었고 40대 역시 78.5%에서 78.3%로 0.2% 줄었다. 믿겨지는가? 30대와 40대의 고용률이 모두 75%에 근접했거나 훌쩍 넘고 있는데 심각한 고용상황이라 말하고 있다. 전에도 썼지만 고용률이란 비경제활동인구까지 포함한 전체 생산가능인구 가운데서 취업한 사람들을 비율로 나타내는 것이다. 전업주부 등 사실상 구직활동 자체를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수치인데 고작 여기서 0.2% 떨어졌다고 위기라 말한다. 그러면 전체 고용률이 0.2% 오른 것은 한국 경제가 살아났다는 증거일까? 15~29세에서 0.7%고용률이 는 것은 청년실업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의미이겠는가 말이다.


흥미가 생겨서 그동안의 여러 경제지표들을 찾아보았었다. 하긴 그나마 잘나간다는 중국도 항상 성장률이 상승곡선을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최근 중국의 성장률은 완만한 하강세를 그리고 있다. 여전히 6%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전처럼 10%가 넘는 성장률은 보이지 못하고 있다. 미국 경제가 잘 나간다는데 그래봐야 우리나라보다 0.2% 높을 뿐이다. 일정 이상의 수준에 이르면 한 나라의 경제가 이전처럼 극적인 성장을 보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부분 그같은 성장률들은 주기적으로 등락을 반복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어느 해는 조금 성장률이 높고 어느 해는 성장률이 조금 떨어진다. 경기가 좋고 나쁘고는 어느 한 해의 수치가 아닌 따라서 여러 해에 걸쳐 나타난 추이를 보고 판단하게 된다. 어느 해 갑자기 0.몇 퍼센트 성장률이 떨어졌다고 위기랍시고 호들갑떠는 경우란 오히려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중무역전쟁으로 세계경제가 안좋은 상황에 2.7%의 성장률을 보인 것이 그렇게 위기라 불릴 정도로 심각한 것인가.


한 마디로 나라 경제를 망쳐먹으려는 짓거리들인 것이다. 경제지표라는 것이 긴 시간을 두고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것인데 매번 수치 얼마에 심각해져서는 당장 대책을 내놓으라 다그친다. 한 나라의 경제정책이라는 것이 길게는 수 십 년, 아니 그 앞까지 내다보고 세워져야 하는데 바로 올해, 바로 이 달, 바로 오늘의 지표만을 가지고 성패를 따지며 그 수정을 요구한다. 딱 맨 처음 예로 든 식당의 사장과 같은 경영을 정부를 상대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그렇게 대단한 전문가이기라도 하면 또 모르겠는데 기껏해야 기자나부랭이들이다. 심지어 경제지 기자 가운데는 경제를 전공하지 않은 기자들도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무슨 깡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경제지 기자란 것들이 장사라도 하게 되면 바로 얼마 안 가 쫄딱 망하게 될 것이란 것이다. 고작 조그마한 가게 하나조차 그런 식으로 경영하지 않을 텐데 하물며 더 복잡하고 더 거대한 한 나라의 경제를 그따위로 판단하다니.


더 웃기는 것은 그들이 항상 비교하는 지표가 그나마 최근 가장 나았었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의 2017년의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지표들과는 비교하지 않는다. 이전 정부에서 고용률이든 성장률이든, 더구나 그 세부적인 내용 또한 어떻게 달랐었는지 비교하지 않는다. KBS든 MBC든 똑같다. JTBC도 여기서는 예외없다. 한겨레와 경향은 다를까. 긍정적으로 보려 한다. 정부를 비판하는데 맛들렸다. 정부를 비판하는 것에 재미를 들렸다. 그래서 아무거라도 꼬투리만 있으면 정부를 비판하려 한다. 하나를 열로, 열을 백으로, 그래서 0.2%의 지표로도 최악의 위기가 되어야 하고 심각한 상황이 되어야 한다. IMF까지 소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부는 망해야 한다. 정부의 정책도 모두 망해야 한다. 망하고 철회되어야 한다. 다시 이명박근혜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한겨레와 경향이 진보적이라는데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JTBC조차 경제기사에 있어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다. 기업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다. 그들이 정부에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조중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KBS, MBC는 전부터 그랬었다. 그냥 사장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보수언론이 요구한대로 다시 이명박근혜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철저히 이명박근혜시절의 지표들은 뒤로 감춘다. 마치 이전의 정부에서는 최소한 경제에 있어 아무 문제도 없었던 것처럼. 이번 정부 들어서만 경제에 크게 문제가 생긴 것처럼.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로 다시 자유한국당에 정권을 돌려주어야 한다. 과연 이들 언론들 가운데 반박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이 몇이나 될까.


진짜 0.2% 차이로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고용이 위기를 겪는다. 아예 IMF가 소환된다. 대한민국 경제는 망했다. 대한민국 고용도 망했다. 누가 대한민국을 망치고 경제까지 망치고 있는가. 손석희가 그나마 신뢰받는 언론인으로 꼽힌다는 자체가 어이없는 것이다. 이 나라 언론인이라는 것들의 수준이다. 하다못해 김어준이 언론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개새끼들이다.

오래전 타진요 사태 당시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그나마 나았다. 타진요도 잘못했고 타블로도 잘못했다. 그러니까 타블로 역시 타진요가 주장하는대로 의혹들에 대해 성실히 해명하라. 당장 한 개인이 다수의 집요한 폭력에 고통받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피해자일 수 있는 타블로에게도 책임을 지우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야 공평하니까.

칼로 사람을 위협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혹은 여성을 납치해서 성폭행하려는 장면일 수도 있다. 그 순간에도 너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중립적으로 판단한다. 둘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차라리 내가 귀찮고 성가셔서, 혹은 오히려 자신이 해꼬지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외면하는 것이면 솔직하다. 그래서 그 중립은 누구를 위한 중립이고 무엇을 위한 중립일 것인가. 무엇보다 그런 행동이 중립이기는 한가.

중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다. 중용은 한가운데가 아니다. 중용이란 양 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칼을 들고 위협하는 모습을 보았더라도 칼을 손에서 놓고 위협을 그만두면 거기서 그치는 것이다. 일단 여성을 당장의 위험에서 구했으면 거기서 더 나가지 않는 것이다. 때로 사람들은 거기서 실수를 저지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눈에는 딱 눈까지만, 이에는 딱 이까지만, 그마저도 지나칠지 모르니 잠시 삼가고 더 조심하자는 것이 중용의 원래 취지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비겁함을 중용이란 이름으로 치장하고는 한다.

조금이라도 선하면 선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악하면 악한 것이다. 백 가운데 하나라도 더 좋으면 좋은 것이고, 백 가운데 하나라도 더 나쁘면 나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선한 쪽으로, 더 좋은 쪽으로, 더 나은 쪽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조금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 더 좋은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어차피 오십보백보니 그냥 둘 다 나쁜 놈이다. 99가 나쁜 놈과 100이 나쁜 놈이 같아지면 결국 남는 것은 100이 나쁜 놈인 것이다. 악이라는 건 더 쉽고 더 편하고 더 빠른 그래서 방편일 테니까. 누가 어렵고 귀찮고 더구나 느리기까지 한 선을, 정의를 선택할 것인가. 그래서 옛말에도 바른 길이 한 자면 나쁜 길은 한 길이라 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악이 더 빠르게 자란다는 뜻이다.

자기가 방관하고서도 어째서 세상은 더 나쁜 것으로 가득한가. 오로지 순수하게 선하고 정의롭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한 주제에 어째서 세상은 악하고 불의한 이들만 이리 많은 것인가. 그래서 외면하고 그래서 방관하고 그래서 멀찍이 물러서서 손가락질한다. 자기는 책임없다. 그래서 일찌기 고염무도 말한 바 있었다. 천하가 흥하고 망하는 것에는 한낱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바른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꾸짖지 않으면 결국 세상의 일은 그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책임없다. 오로지 모든 것은 저들의 책임이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그리 말씀하셨다. 어설프게 똑똑한 놈들이 세상을 망친다. 그래서 예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서도 정기준의 주장에 일부 동의한 바 있었다. 차라리 아예 똑똑하면 속지 않고, 차라리 아예 어리석어도 속지 않을 텐데, 그러나 어설프게 똑똑한 놈들이 제 꾀에 속아넘어간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자기가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그렇기 때문에 저런 진흙탕에 발을 딛지 않겠다고. 세상을 바꾼 것은 항상 그런 진흙탕 속에서 모든 것을 걸고 함께 뒹굴던 이들이었다. 그들조차 외면하고 똑같은 기준으로 비난하던 이들이 바로 그들 비겁한 대중들인 것이다. 내가 절대 진보는 될 수 없다 말하는 이유다. 나는 대중을 믿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이란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악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본성은 선할지 몰라도 잠시의 나태와 방관이 더 쉽고 더 편하고 더 빠른 악으로 이끌리도록 만든다. 동기는 무척 선한데 그러나 결과는 항상 악이다. 악해서 악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약해서 게을러서 무엇보다 영악해서 인간은 악해질 수밖에 없다.

무엇이 세상을 바르게 바꾸는가. 어떻게 세상은 더 낫게 바뀌는가. 조금이라도 틀린 것을 모조리 싸잡아 비난하고 외면하면 세상은 달라지는가. 더 좋고 더 나쁘고를 판단하지 않고 제 성에 차지 않는다고 욕하고 돌아서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인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렇게 흘러온 것이 바로 이 사회고 이 나라고 바로 자신들일 테니. 과연 앞으로는 어떻게 바뀔까. 부질없을 것이다. 때로 느끼는 뼈저린 절망이다. 희망조차 없는.

여성주의자든 반여성주의자든 한 가지 분명히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향상과 혼인률의 하락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결혼의 의미가 바뀌었다. 더이상 결혼같은 것 하지 않고도 혼자서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사실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다. 아마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는 이혼했거나 사별한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여성이 혼자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쉽기는 커녕 예전에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여성이 보호자 없이 혼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어떤 행동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는 이들이 지금도 적지 않다. 인도를 비롯한 저개발국가나 혹은 선진국에서도 빈민가 같은 소외된 그늘에서 그런 행동들이 지금도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이 무방비하게 혼자 있다는 자체가 그런 행동들을 자초하는 것이며 여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아직도 상당히 넓게 남아 있는 편이다. 그런데도 그런 남성들의 약탈행위마저도 때로 기다리고 반겨야 했던 것이 당시 여성들의 현실이었다.


아주 오래전 원시사회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냥과 어로는 남성들의 몫이었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이후로도 모든 생산은 남성들의 노동력에 의지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전근대사회에서 인구통계를 낼 때면 여성은 배제한 채 그것도 한창 일할 나이의 남성들로만 인구를 헤아리는 경우마저 상당했었다.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과 만일의 상황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기준이 바로 이들 한창 일할 나이의 성인남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은 단지 그에 종속되어 남성들의 생산활동을 돕고 아이를 낳는 부수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여성들 역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남성의 생산력에 의지해야만 했었다. 남성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경우란 아주 예외적인, 어쩌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천대받는 직업들 말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러니까 여성에게는 의지할 남성이 있어야 하고, 그런 남성이 있다면 버림받지 않도록 더 조심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유명한 삼종지도다.


이슬람에서 괜히 일부다처제를 종교의 교리로 못박은 것이 아니란 것이다. 마호메트가 종교전쟁을 시작할 무렵 중근동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따라서 남성의 수가 크게 줄어들어 평생 혼자 살아야 하는 여성의 수가 반대로 크게 늘게 되었다. 여성만으로는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장사도 할 수 없다. 농사도 더 잘 지을 수 있고 장사도 더 크게 할 수 있는 남성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남성들은 필수적으로 복수의 여성들과 결혼해서 그들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국 당나라의 균전제가 무너진 이유도 잦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성인남성들이 전장으로 끌려간 사이 남은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만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지며 빚을 지고 땅을 넘기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시민군도 비슷한 과정을 밟으며 다수 시민들이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반드시 기근이 일어나는 것도 같은 이유로 생산이 크게 줄어드는 영향이 크다. 그만큼 남성의 노동력이 전근대사회에서 가지는 가치란 절대적이었기에 여성은 반드시 남성과 결혼해서 그에 의지해야 했고 남성 역시 그런 여성을 부양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심지어 여성의 재가를 금지하던 조선에서도 소박맞거나 과부가 된 여성이 성황당에 서 있으면 처음 본 남성이 무조건 책임지고 거두어야 하는 의무가 지워지고 있었다. 그만큼 여성 혼자 살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보면 여성의 재가에 대해 원리적으로 엄격한 태도를 취하던 조선이었음에도 먹고 살기가 빠듯한 하층민 가운데서는 자유롭게 재가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자식의 장래를 걱정해야 하는 사대부의 아낙이 아니라면 그런 엄격한 도덕률따위 의미가 없을 정도로 먹고 사는 문제야 말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려서는 아버지에 의지하고, 자라서는 남편에 의지하고, 늙어서는 아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결혼을 해야 했고 자신의 남편이 된 남성에 복종해야만 했었다. 아직까지 생산이 오로지 남성의 노동력에 의지하며 남성들에 독점되어 있던 때문이었다.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지켜줄 남편이라도 있어야 험난한 세상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아마 답이 나올 것이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 아니 혼자 사는 쪽이 벌이에도 성취에 있어서도 더 유리하기까지 하다. 보다 국가라고 하는 시스템이 고도화되며 치안도 발달해서 혼자라도 또한 얼마든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전처럼 남성에 종속되어 남성에 의지하며 남성의 보호를 받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도 과연 전처럼 어쩌면 자신을 얽매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반드시 기대야 할 필요가 있을까. 결혼하게 되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도, 장차 자신의 수입에도 큰 손해가 뒤따른다. 혹시라도 결혼이 잘못되었을 경우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더이상 전처럼 여성이든 남성이든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인내하며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여성들만이 아니다. 많은 남성들도 그같은 현재의 결혼이라는 문화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기도 하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경제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여성도 충분히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남성들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바라고 기대려 한다. 이를테면 부양에 대한 거부다. 더이상 여성들을 일방적으로 부양하지 않겠다.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자존과 자립을 주장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가부장적 의무로부터 해방시켜달라. 


그래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다. 결혼이란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모두에게 너무나 부담스런 구속이었을 테니까. 다만 그럼에도 임신과 출산에 대한 부담이 일방적으로 여성에게만 지워진다는 것이 남성과 여성의 결혼에 대한 기대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남성들은 아직 결혼을 바라는 비율이 적지 않지만 여성은 그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아직 남성들에게는 결혼하는 것이 그나마 괜찮고, 여성들에게는 그조차 괜찮지 않다. 


그러면 답은 무엇인가. 그래서 현정부의 출산률정책에 공감을 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달라진 시대에 맞는 달라진 윤리와 달라진 문화와 달라진 정책들이 필요하다. 결혼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이 더이상 여성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더이상 전처럼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 살아가도록 할 수 없다면 여성들의 사회할동에 대한 사회적 제도와 관습과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어차피 지금 임금수준에서 남성 혼자 벌어서는 집에서 노는 아내와 아이들까지 모두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문제없이 경제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아예 근본적으로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출산률은 높여야겠고, 나와 내 아내는 출산휴가도 육아휴가도 써야 하는데, 그러나 정작 동료 여직원이나 남직원이 출산과 육아로 자리를 비우면 그것을 민폐로 여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노동시장의 유연화다. 비정규직을 진짜 비정규직처럼 운용하는 것이다. 그저 해고하기 쉬운 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잠시 대체해서 사용할 수 있는 인력으로 계약직을 활용하는 것이다. 기간제라는 표현이 그런 점에서 더 정확한지 모르겠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신분이 불안정한 만큼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임시로 고용해서 사용한다. 고용률도 생산현장에서의 효율도 높일 수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닌 서로를 보완하는 개념으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원래 기간제란 그렇게 쓰이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더 싸게 쉽게 쓸 수 있는 인력이라는 인식이 더 강해진 탓에.


과도기라는 말이 맞다. 이전과 사회가 요구하는 성역할이 달라졌다. 개인이 기대하는 성역할 역시 크게 달라졌다. 결혼의 개념도 달라졌다. 결혼을 통해 개인과 사회가 기대하는 것돌 역시 달라졌다. 그런데 아직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과거와 같은 결혼의 양식과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니까 차라리 아예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배제하면 어떨까. 결혼이 집안간의 결합이라면 개인간의 결합인 동거를 사실혼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여성가족부의 정책 가운데 동의하는 몇 가지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까 부담스러운 결혼이라는 제도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만나 함께 살면서 아이도 낳아 기를 수 있게 법으로 제도로 보장해준다. 선진국들에서 그렇게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과도기 동안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개인을 옭죄고 그럼으로써 개인과 개인의 인연까지 막는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


역사의 맥락에서 살펴본다. 과연 지금 혼인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만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동아시아 전체에서 그런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출산률도 따라서 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출산률이 아니다. 여성정책이어야 한다. 여성들이 달라진 세상에 맞게 거리낌없이 일하며 사랑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를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여성주의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별 거지같은 말도 안되는 여성주의를 싫어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를 지지한다. 합리적이고 타당하다면. 언제든.

많은 기업에서 임직원의 정년은 50대 중반부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베이비부머라 하면 한국전쟁이 끝난 1955년부터 1974년까지 태어난 세대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도 1955년부터 1963년까지를 전기 베이비부머, 1964년부터 1974년까지를 후기 베이비부머로 분류한다. 다시 말해 전기 베이비부머는 이미 거의 은퇴를 마쳐가고, 후기 베이비부머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은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다시피 80년대 산아제한에 이은 출산률 저하로 젊은 세대의 수는 은퇴하는 50대 베이비부머 세대에 한참 못미친다.


그래서 허수가 생긴다. 당장 보건과 의료의 발달로 기대수명이 늘어나며 전에 비해 노인의 수는 즐기는 커녕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나이가 많아 현직에서 은퇴할 나이인데도 더구나 15세 이상이면 누구나 생산가능인구로 분류되기에 생산가능인구의 절대수는 출산률의 저하로 그 수가 꾸준히 줄고 있음에도 젊은 세대의 성장과 더불어 계속해서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대부분 기업들에서는 50대 중반 이후로는 정년을 맞게 된다. 이미 정년을 맞아 퇴직한 사람을 과연 어느 사업자가 기꺼이 좋은 조건에 채용해 쓰려 하겠는가 말이다. 지표상으로는 생산가능인구인데 현실에서는 사실상 취업포기인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를 통해 일자리를 떠나고 그렇게 출산률 저하에 따라 그 수가 줄어든 젊은 층이 계속 유입되면 과연 고용지표는 어떻게 나타나겠는가.


말한 바 있다. 고용률은 취업자수/생산가능인구로 계산한다고. 다시 말해 생산가능인구가 늘고 퇴직자의 수가 신규취업자의 수보다 늘어나면 고용률은 따라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들 퇴직자들이 아예 구직을 포기하면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니 실업률 자체는 오르지 않게 된다. 이들이 더구나 취업을 해보겠다고 취업시장에 나서게 되면 실업률까지 따라서 오르게 된다. 취업할 의사는 있는데 취업하지 못했으니 실업률에 포함되는 것이다. 반대로 어차피 퇴직자를 위한 일자리 자체가 없어서 구직을 단념하거나 했으면 실업률은 오르지 않게 된다.


그러면 퇴직자만 문제일까? 갈수록 오르는 물가에 비해 임금소득이 적어지니 이전에는 그저 집안에서 살림만 하던 주부들도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좋은 일자리는 아니다. 고작 최저임금이나 받는 비정규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이전에는 아예 취업따위 하지 않고 살림만 했으니 비경제활동인구로 잡혔는데 취업을 했으므로 경제활동인구로 잡힌다. 전체 고용률도 따라서 올라가게 된다. 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때는 비경제활동인구인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 취업인구로 분류된다. 반대로 앞서 말한 정년을 맞아 퇴직한 인구 가운데 구직을 포기한 사람이 늘어나면 구직포기자가 늘어나면서도 거꾸로 고용률은 늘어나는 기이한 현상도 보게 된다. 참고로 지금 은퇴하는 후기 베이비부머세대들은 그나마 국민연금 등 노후에 대한 보장이 어느 정도 되어 있어서 이전 세대와 달리 생계를 위한 취업의 요구가 그렇게까지 높지 않은 편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최초의 노년세대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론에서 제대로 보도하고 있지 않은 고용지표의 이면이라는 것이다. 전기베이비부머 세대들은 거의 은퇴했고 이제 후기베이비부머 세대가 본격적으로 은퇴하기 시작했다. 과연 본격적으로 정년을 맞아 현직에서 물어나기 시작한 이들 세대를 고용지표는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가. 그러면 이들로 인한 고용지표의 변화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심지어 전문가랍시고 인터넷에서 강의하는 인간들 가운데서도 이런 부분을 과감하게 무시해 버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5세 이상이면 생산가능인구다. 그러나 과연 55세 이상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울 것인가. 제조업에서도 서비스업에서도 거의 이들을 반기지 않고 있다. 그러면 단지 생산가능인구라는 이유만으로 이들 세대를 다른 생산가능인구들과 같이 여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한가. 왜 정부에서는 노인일자리를 만드는데 많은 재정을 쏟아붓고 그것은 고용지표에서 또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여튼 고용지표라는 게 그만큼 분모도 다양하고 분자도 다양하고 변수도 많다는 것이다. 가정주부, 학생, 휴직자, 구직단념자, 구직무관심자, 기타등등등등등의 분모와 임금노동자와 비임금노동자, 그리고 그 안에 수많은 다양한 분류들 가운데, 다시 세대별 다른 현실들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그 숫자로 거짓말을 한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놓인 지표를 어떻게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야 하는가. 그냥 실업률만 보게 되면 오히려 구체적인 정책에서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노인일자리 정책 같은. 정년을 맞은 퇴직자의 수가 갈수록 늘고 있는데 노인일자리에 신경쓰지 않으면 그 부담은 온전히 사회로 돌아가게 된다.


몰라서 안 쓰는 것인지, 아니면 알아도 안 쓰는 것인지. 민언련에서도 그러더라. 왜 한겨레와 경향은 보수언론의 왜곡보도에도 반박하거나 정정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인가.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돌아오는 것이 낫지 문재인 정부가 성공하는 꼴을 저들은 눈뜨고 보지 못한다. JTBC는 특히 경제관련해서는 중앙일보와 취재시스템을 공유하는 부분이 적지 않은 듯 보인다. 손석희 자신도 경제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은 듯 보이고. 가끔 기자 개인이나 학자 개인이 나서서 사실을 정정해주고는 한다. 공부해가며 뉴스를 읽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진짜 뭣같다.

너무 기본적인 상식이라 설마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정작 언론의 취사선택에 이은 왜곡보도에 속아넘어가는 사람이 많아서.


첫째 가장 중요한 전체 인구 가운데 취업한 사람의 수를 무엇으로 나타내는가.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알릴레오 나와서 한 말이 맞다. 고용지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고용률이다.

 

고용률 = 취업자수/생산가능인구


여기서 생산가능인구란 15세 이상 실제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인구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전체 일할 수 있는 인구 가운데 실제 취업한 사람의 수를 비율로 계산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실질적인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실업률은 어떨까?


실업률 = 실업자수/경제활동인구


여기서 경제활동인구란 생산가능인구에서 비경제활동인구를 뺀 것이다. 가정주부나 학생, 혹은 취업을 포기했거나, 취업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잠시 휴직중인 사람을 포함한다. 아마 여기서 눈치챈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정작 고용률이 늘어나도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취업의사를 밝힌 경제활동인구가 늘어나면 실업률이 늘어날 수 있다. 반대로 고용률은 떨어지는데 취업 자체를 포기한 사람이 늘어나면 실업률은 떨어진다. 다시 말해 실업자수가 늘어났다고 반드시 고용률이 나빠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취업자수는 줄어드는데 고용률은 늘어나는가? 당연히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니까. 작년 취업대란이라며 취업자수가 가장 적게 늘었다 난리쳤을 때 고용률은 정작 전정부인 2016년보다 8월 한 달을 제외하고 꾸준히 높았다는 것이다. 평균으로 치면 역시 문재인 정부 임기였던 2017년을 제외하고 2016년 이전보다 모두 높았었다. 그런데 왜 고용대란이라는 말이 나오는가. 즉 취업자수가 이전보다 턱없이 적게 올랐다는 것인데 결국 분모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고용률이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냥 분모가 작아져서 취업자수가 적어져도 고용률이 그대로다. 이해가 가는가.


더불어 고용률을 이해할 때는 연령대별, 혹은 계절별 고용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겨울에는 농한기라 대부분 농업종사자들이 휴식을 취한다. 겨울에도 계속해서 농사를 짓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실업자로 잡힌다. 방학 동안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학생들도 늘어나지만 학기가 시작하면 그마저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혹은 50대 이상에서는 정년을 맞아 퇴직하는 인구가 늘어난다. 바로 얼마전부터 60년대 1차 베이비부머 세대가 퇴직하기 시작했다. 작년 퇴직자수가 그래서 사상 최대란 말도 나온다. 당연히 고용률은 떨어지고 이들 가운데 계속 일하고자 하는 경우가 늘어나면 실업자수도 늘어나게 된다. 분모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나라 현실에서 50대 이상이 취업하기 쉬운가. 결국 이들 가운데 또 상당수는 창업을 통해 자영업으로 뛰어들게 될 것이다. 자영업자들 곡소리나는 뉴스가 또 하나 늘었다.


사실 나도 언론보도가 나오면 그렇겠거니 그냥 스쳐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언론보도가 아무리 봐도 너무 고약스러우니까. 전체 통계를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가운데 문제가 될 만한 일부만 똑 떼어 크게 확대해 보도한다. 조중동매경한경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한겨레, 경향, 오마이, JTBC, 어차피 KBS와 MBC, SBS도 크게 기대는 하지 않으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들이 앞세우는 숫자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하필 문재인 정부의 임기인 2017년과 비교해서 2018년이 최악이라 말하는 저들의 주장이 옳은 것인가. 더구나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2016년 이전의 지표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전보다 지금의 지표가 어찌되었든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다못해 상용근로자가 더 늘어났음에도 임시근로자나 일용근로자의 감소를 문제삼는 보도에 대해서는 그저 할 말을 잃는다. 고용원 있는 자영업이 늘어난 것은 외면한 채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가 줄어든 것만 이야기한다.


그냥 기자가 개새끼들이다. 언론사를 굳이 특정할 필요도 없다. 모든 언론사 경제기사 쓰는 기자새끼들은 그냥 어디 가서 고개 쳐박고 뒈지는 쪽이 나라 경제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산수도 할 줄 모르고 국어도 할 줄 모르고 영어는 더더욱 할 줄 모르고. 아무리 기자가 지성을 상징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지만 이건 인간이기를 부정하는 정도다.


요즘처럼 성가신 때가 없다. 그냥 언론이 보도한 기사만 읽고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기사 하나 읽으면 그것 사실확인하느라 그 몇 배의 시간을 써야 하니.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하는 시대다. 아니면 바로 속아넘어가고 만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숫자를 가지고 태연히 거짓말을 한다. 이 쯤 되면 속아넘어가는 게 더 문제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뻔히 속이려는 의도가 보이는데 속아넘어간다. 진짜 지랄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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