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가 불안하고 주체성이 부족할수록 위계관계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똥구멍으로 나이만 쳐먹은 새끼들에게 흔히 듣는 말이다.

 

"너 몇 살이야?"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다. 어렵게 고민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나이로 서열 정해서 그대로 찍어누르겠다. 반대로 내가 어리다면 그냥 아무말없이 따르겠다. 그러면 편해진다. 다툴 일도 고민할 일도 상처입을 일도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엘리트란 그런 구조 안에서 상위 위계에 속하고자 노력한 놈팽이들이란 것이다.

 

상대가 나보다 우위에 있는가? 아니면 열위에 있는가? 여성주의자들이 저따위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다. 강자와 약자를 나누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한다. 민주당은 약자다. 20대 남성은 약자다. 국민의힘은 강자다. 50대 이상 기득권 남성들은 강자다. 같은 여성이라도 그래서 직급이 낮은 일선검사보다 직급이 높은 검사 수뇌부 남성들과 더 가깝다. 자칭 진보가 국민의힘을 노동존중의 정당이라 추앙하고 여성존중의 정당이라 추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가짜뉴스든 뭐든 수구언론이 터뜨리면 따라가기 바쁜 것이다.

 

검찰은 강하다. 그러므로 김학의가 무고한 것이다. 민주당은 약하고 박원순은 죽은 사람이기에 박원순이 김학의보다 더 파렴치한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김학의에 대해서는 철저히 원칙과 절차와 무엇보다 당사자의 인권을 존중해서 행동해야 하지만 박원순은 아니다. 같은 논리에서 박근혜에 비해 문재인은 뭘 어떻게 해도 가만 놔두니 약자로서 기자들이 평가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되도 않는 놈이 면접관이랍시고 앉아 있을 때 인재를 가려내기보다 그저 지원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려는 경우와 닮았을 것이다. 나는 일방적으로 문제를 내고 너는 그 문제를 푼 다음 평가까지 받아야 한다. 

 

그래서 기자들이 밖에 나가면 질문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하긴 국내에서도 질문을 제대로 하는 경우란 드물다. 질문의 가지수만 많을 뿐이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상대를 곤란케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질문만을 사람과 장소만 바꿔서 반복한다. 내가 채점하는 입장이다. 반면 밖에 나가서는 진짜 권위 앞에 내가 채점받는 입장이다. 비유하자면 윤석열에게는 오보 냈다고 납죽 엎드려 용서를 구걸하던 한겨레가 민주당에 대해서는 오보를 내고서도 오히려 오만한 상황과 닮았을 것이다. 윤석열은 강자고 민주당은 약자다.

 

그러니까 민주당이 병신이란 것이다. 오죽하면 180석 가지고 채 10석도 안되는 정의당 따위에 얕보일 수 있는 것인가. 그런 현실을 전혀 문제라 여기지 못하고 더 약자로 보이기 위한 궁리만 하고 있다. 그래서 약자인 것이다.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라도 그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멕시코에게도 휘둘리는 약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기레기가 기레기인증을 또다시 미국에서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국 여기자에게 질문기회를 주고 싶다. 진짜 권위 앞에서 저들은 얼마나 비루하고 비천한 존재들인가.

 

한겨레가 아무리 잘난 척 해봐야 윤석열 앞에 오체투지하고 똥오줌까지 지리던 모습 덕분에 그저 우습기만 한 이유인 것이다. 박근혜 앞에서는 감히 질문조차 하지 못하던 버러지들이다.

 

한국 교육시스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이유다. 그래도 좋은 대학 나와서 기자까지 되었다는 놈들 수준이 이렇다. 지식이란 인간을 보다 현명하게 지혜롭게 용감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 아니던가. 버러지는 버러지다. 똥냄새난다.

금이 화폐로 쓰인 것은 아직 상거래가 일반화되기 이전의 한정된 시기 정도였었다. 사실 인류라 상거래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상당기간 동안 그 주된 형태는 물물교환이었었다. 금은 물물교환을 하기에는 이동거리가 너무 멀거나, 혹은 교환할 재화의 가치를 보다 확실하게 계량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했을 때, 보증하는 주체가 없어도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거래수단으로써 주로 사용되는 편이었다. 확실히 항아리 100개 싣고 다니는 것보다 팔아치우고 금으로 바꾼 다음 그에 해당하는 포도주를 다른 지역에서 사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기는 하다.

 

오히려 상거래가 일반화되면서 화폐로서 금의 비중은 줄어드는 경우가 많았으니, 당연한 것이 금이란 것이 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금속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일찍부터 은을 화폐의 단위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나마 금보다는 그래도 흔하다는 은조차도 중국 안에서만 조달해 쓰려니 한계가 분명해서 명말에 이르러서는 세금을 내려 해도 은을 구하지 못해 내지 못하는 경우마저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 당시 조선을 찾은 사신들마저 어떻게든 부족한 은을 확보하려 온갖 패악을 부렸을 정도이니 그 사정을 알 만하다. 조선에서도 구리가 부족해서 기껏 구리로 돈을 찍어내봐야 오히려 그 돈을 녹여 구리로 물건을 만들어 쓰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화폐의 가치가 너무 높아서 정작 거래수단으로 쓰이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 말 유럽에서는 상거래의 발달로 금의 수요가 늘어나자 정작 금을 구하지 못해 물물교환에 나서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며 하마트면 화폐경제 자체가 무너질 뻔한 위기도 겪고 있었다. 당시 봉건영주들도 대부분 세금을 현물이 아닌 금화 등의 화폐로 거두어들이고 있었는데 화폐의 수량 자체가 한정되어 있어 억지로 화폐를 구하려면 그만큼 더 많은비용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차라리 현물로 내는 것이 낫다 싶을 정도로 농민들에게 크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은 잉카를 멸망시키고 얻은 금을 죄다 녹여서 금화로 만들어 유럽에 유통시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금이 있었기에 유럽의 화폐경제는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중국의 경우도 모든 세금을 일정하게 은으로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은을 사들여 유통시킨 덕분이었다. 이후 일본의 은광이 고갈되자 멕시코의 은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이 은광을 개발하지 않을 것을 실책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당시 은이 부족하던 중국의 사정상 조선에서 은광이 개발되고 은이 생산되었을 경우 발생할 일들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은광을 모두 막아둔 상태에서도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은 내놓으라고 온갖 지랄을 해댔었는데 과연 은광이 있었다면 조선의 역량으로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영향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숙종 연간에야 겨우 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은 효종 연간 조선에서 구리광산이 개발되었던 영향이 컸었다. 그 전에는 필요한 구리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기에 화폐로써 구리의 가치가 실제 구리의 가치에 밑도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차라리 구리를 녹여서 현물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편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조선에서도 구리가 생산되기 시작했으니 구리의 가치가 일정 이하로 유지되며 화폐가 안정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다. 이때 유통되기 시작한 상평통보가 일제강점기까지 계속 쓰이면서 엽전이란 비칭의 어원이 되었다.

 

달러가 기축통화로 쓰일 수 있는 이유는 그 가치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여전히 금본위제를 고수하고 화폐의 유통을 일정 수준으로만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달러를 필요로 하는 나라는 넘쳐나는데 정작 그 달러가 한정되어 있다면 결국 그 가치는 오를 수밖에 없다. 장차 가치가 크게 오르게 될 달러를 거래수단으로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달러를 미친듯이 세계가 달러를 필요로 하는 만큼 뿌려서, 혹은 미국이 아무리 달러를 뿌려도 어떻게든 그 가치를 유지하 위해 세계의 정부들이 나서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근대의 화폐제도다. 이전의 화폐가 자연화폐로써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면 근대의 화폐는 확실한 주체들에 의해 그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관리받는다.

 

그래서 화폐는 어지간히 경제가 막장이 되지 않으면, 즉 관리의 주체가 그 역량을 잃지 않으면 가치가 크게 오르도 내리는 경우가 거의 흔치 않다. 환률이 급락했네 급등했네 할 때도 보면 거의 몇 % 안에서 움직이는 정도다. 아니면 화폐의 가치에 대한 신뢰가 없어 상거래에 쓰이지 못한다. 기축통화란 바로 그런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그런 신뢰가 있는 통화를 가리킨다. 그러면 관리할 주체가 없고 보증도 없는 가상화폐는 어떨까?

 

일론 머스크가 가상화폐로 자기회사 차를 살 수 있도록 하겠다 했지만 실제 산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의문스러울 뿐이다. 가치가 오르고 있는 게 보이는데. 가치가 오르고 있다면 더욱 장래의 가치를 기대해서라도 화폐로서 쓸 수 없고, 가치가 떨어진다면 역시 앞으로 가치라 떨어질 것이 보이므로 거래수단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아무도 없다. 정부는 개입하지 말라. 정치권은 개입하지 말라. 그러나 결국 가치가 하락하면 그로 인한 손실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에서 대신 책임져달라. 그런 일 벌어지지 말라고 이미 달러가 있고 원화가 있고 위안화가 있는 것이다. 그를 부정한 순간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에 한 번은 크게 급등하고, 한 번은 크게 급락하고, 그동안 반복되어 온 과정이었었다. 사실 그마저도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그러면 그동안 돈을 번 사람은 누구고 돈을 잃은 사람은 누구인가. 현실의 화폐처럼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나설 주체도 없기에 오히려 더욱 그런 투기성을 강화해서 더 큰 이익을 얻으려는 놈들이 지배하는 판이란 것이다. 더구나 그 가상화폐를 채굴하기 위해 중국에서는 더 많은 화력발전과 원자력발전을 동원해야 한다. 아마 대부분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이 반기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금보다도 더하다. 금은 그나마 일정한 가치를 계속 유지하지만 가상화폐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오르도록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채굴의 난이도가 계속 높아질 것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는 더욱 상승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화폐로 쓰기에는 한계가 뚜렷한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그 밖에 가상화폐에는 무슨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가치를 부여하니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인정하는 이들 사이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언론까지 나서서 부추기며 헛된 바람을 불어넣는다. 바로 거품이란 것이다. 폰지사기에 다름 아닌 이유다.

처음 워마드니 메갈이니 하는 사이트의 정체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보면 알겠지만 나는 인터넷을 쓰는 폭이 매우 좁다. 굳이 그런 사이트들을 일부러 찾아가 불쾌할 것이 뻔한 글들을 찾아읽는 번거로운 짓을 사서 하는 타입이 아니다. 다만 미러링이라는 말에 일베 하는 짓거리에 일부 과격한 여성들이 과격한 형태로 대응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 실체를 알고 나서는 늘 하던대로 쌍욕 쳐박으며 욕해댔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선을 너무 넘었지.

 

예전 어느 만화인가 소설엔가에 등장한 악역이었다. 가족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데 그 분풀이를 하겠다고 아예 이 세상을 망하게 하려 한다. 내가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고, 내가 너무 큰 고통을 겪었으니까 그 분풀이로 다른 사람도 그런 일을 겪도록 해야겠다. 그런데 그 대상이란 것도 실제 자기 가족을 죽인 사람도 아니고, 그만한 책임을 가진 더 높은 자리에 있는 더 힘있는 대상이 아닌 자기보다 훨씬 약할 것 같은 누군가란 것이다.

 

메갈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메갈과 워마드가 그같은 선넘는 언동들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준엄하게 꾸짖으며 현실의 규범을 벗어난 행동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막나가는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메갈이니 워마드니 하는 것들도 여성주의라고 귀기울여 들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니 평생 열등감에 찌들어 남탓이나 하며 숨어살던 버러지들이 죄다 기어나와 여성주의를 앞세우며 메갈과 워마드를 등에 업었던 것이었다. 사실 여성주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였다. 아마 여성주의자들이 성급하게 미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결심한 것도 그런 현실의 변화를 인지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나같은 사람들마저 여성주의를 혐오하기 시작했고, 같은 여성 가운데서도 더 열성적으로 메갈에 동조하는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여성들은 메갈로 오해살 우려로 인해 여성주의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메갈이 여성주의를 과대표하게 되면서, 그러도록 여성주의자들 스스로 용인하고 방관하면서 여성주의의 이미지는 바닥을 뚫고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비판하던 놈들이 그들과 같은 길을 가려는 것인가.

 

내가 당당히 지금 선거에서 영향력 좀 발휘했다고 기세등등해서는 여기저기서 패악질을 벌이는 놈들을 욕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이 비슷한 짓거리 할 때 나는 그보다 더 심하게 욕했었다. 정히 일베의 패악질이 보기 싫어 미러링하려면 일베를 대상으로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다수의 힘을 빌어 개인이나 소수의 타인을 폭력으로 억압하려 하기보다 당당히 개인 대 개인으로 논쟁을 하거나, 다수 대 다수로 전쟁을 벌이면 된다. 사실 일베에 대한 미러링이라는 것도 웃긴 것이 과연 일베에 대해 거의 모든 인터넷 커뮤니티가 적대하던 상황이라 뭔 짓을 해도 일베만 욕먹을 것이란 확신이 없었어도 그랬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일베란 패악질 만큼이나 사회적으로도 적대당하고 천대받는 역외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너무 닮았다.

 

메갈이 싫으면 메갈을 욕하라. 여성주의가 싫으면 여성주의자들과 싸우라. 자기들 목소리 들어주지 않는 정치인들 싫으면 찾아가서 욕하든 그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든 하면 되는 것이다. 내 부모가 옆 동네 깡패에게 살해당했는데 너희들 돕지 않고 뭐했냐고 동네 사람들 상대로 칼춤을 춰대면 그건 미친 놈이지 정상이 아니다. 더구나 커뮤니티라는 다수를 등에 업고 훨씬 더 약한 고양이를 상대로 협박까지 하고 있었다. 페미가 너무 자기들에게 위협이라서? 실존의 문제라서? 그런데 왜 다수로 뭉쳐서, 젊은 남성의 위력을 과시한 지금, 전혀 상관없는 대상에게 그러고 있다는 것인가.

 

그 동영상에 올라온 문장 하나가 메갈과 연관이 있다. 아니면 해명하고 사과하면 되는데 댓글을 막아 버렸다. 바로 메갈의 언어이며, 여성주의자들의 언어이며, 무엇보다 더 끔찍한 군사독재와 일본제국주의의 언어였을 것이다. 내가 정의다. 내가 심판자다. 내가 단죄자다. 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안전하게 타인을 공격할 수 있는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다수를 등에 업은 채 위세나 부리는 얼치기들일 뿐. 딱 메갈이나 워마드와 같은 종자들이다.

 

개인적으로 일베에서 탈출해 온 난민들이 아닐까 싶다. 하는 짓거리가 진짜 메갈 워마드 판박이인데 그런 행동의 원조는 바로 일베였었거든. 더 재미있는 것은 오세훈이 여성주의 정책을 강화하겠다 약속했을 때는 전혀 페미라는 비판이 들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오세훈은 착한 페미이고 우리편 페미다. 비슷한 놈들이라는 전제에서 그런 점에서 아주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내가 어렵고 힘들다고 타인에 폭력을 휘두를 권리같은 건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메갈과 워마드를 자기들만 욕했을까? 어째서 페미니즘에 우호적이던 이들마저 여성주의라며 등돌리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여성주의는 쓰레기다. 여성주의자들은 일제와 군사독재에 부역하던 기회주의자들의 후신이다. 메갈과 워마드는 일베와 전혀 다르지 않은 이 사회 잉여에 루저들의 배설창구였다. 그냥 내버려두기만 했어도 좋았을 것을 그것을 마치 여성주의의 대변인 양 대우해 준 여성계와 정치권의 책임이 무엇보다 클 것이다. 그래서 같은 이유로 반페미라는 일부의 패악질도 용서할 수 없다. 행위가 같다면 판단도 평가도 같다. 악은 악이다. 변명은 변명일 뿐이다. 쓰레기가 쓰레기를 만든다.

하루 세 끼 배부르다 못해 남으면 어떻게 버리나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한 끼 정도 굶으며 다른 사람 위해 양보하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두 끼 가지고 세 끼로 나눠도 남는 음식이 생긴다.

 

그런데 하루 두 끼 먹는 사람에게 한 끼 먹는 사람 있으니 나누면 어떻겠느냐 하면 바로 돌 맞는다. 배 터지게 두 끼도 아니고 겨우 두 끼로 연명하고 있는데 더 줄여서 나누자면 누가 반기겠는가?

 

지금 청년들의 삶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취업문도 좁은데 여성과 경쟁하는 것을 넘어 아예 일정량을 여성들에 양보해야만 한다. 미래에도 여성들에게 능력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기회를 양보해야 할 지 모른다. 언제 결혼해서 애낳고 집도 사고 한단 말인가? 대한민국 국민이 생각하는 평범한 삶이란 자기에게 해당사항이 아니다.

 

진짜 가난한 동네에는 인심 같은 것 없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도 있고 해야 인정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그것도 진짜 없이 사는 동네에서 나누자고 밥통에서 밥을 덜어가면 그건 도둑이고 강도고 나아가 살인행위다. 지금 여성주의자들이 하는 짓거리가 그것이다. 참으라, 견디라, 양보하라, 모두 여성을 위해서.

 

최저임금인상했더니 최저임금 인상한 만큼 더 할만해진 일자리보다 사라진 일자리에 더 미련을 가지는 것을 보라. 돈을 더 받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게 더 치명적이다.

 

먹고 살 만하니 그래도 괜찮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경쟁에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당장의 곤란과 절망에 대한 변명이라도 될 수 있다. 그런데 경쟁조차 할 수 없다면 어쩌란 것인가. 모르면 악한 것이다. 

벌써 수 십 년은 지난 것 같다. 삼성에서 아직 HDD를 만들던 무렵 삼성은 두 가지 사실로 유명했었다. 두번째가 바로 AS가 진짜 좋더라는 것, 그리고 첫번째가 바로 AS받으러 갈 일이 많더라는 것. 그만큼 삼성 HDD의 품질이 개떡이었다는 건데 AS를 잘해준 덕분에 아예 무상기간 끝날 때 쯤 표 안나게 망가뜨려서 새 제품으로 바꾸는 게 팁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과연 고장나면 그때그때 바로 교체해주는 AS와 AS받으러 갈 일 자체가 없는 제품 가운데 무엇이 더 좋은 것인가.

 

몇 달 늦게 백신을 접종하게 된 덕분에 이미 대부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지금 세계에서 접종 중인 백신들에 어떤 효능과 부작용이 있고 또 접종 과정에서 어떤 문제들이 발생했는지. 현장에서 어떤 혼란과 오류들이 생겨났으며 그를 대비하기 위해 어떤 프로그램들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역시. 백신 부작용에 대한 기레기놈들의 선동이 이번에는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건 그만큼 세계적으로 축적된 데이터가 상당하기 때문인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없는 부작용이 어째서 한국에서만 빈번하게 나타나는가. 아스트라제네카가 그리 문제라는데 오히려 유럽 여러나라들에서는 1차접종만으로 상당한 효과를 확인한 상태다. 기자놈들만 무시한다. 왜? 반정부만이 언론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넓고 병신들은 많다지만 워낙 확진자와 사망자가 넘쳐나서 당장 아무 백신이라도 접종하고 봐야 하는 상황에 놓였던 나라들과 그래도 아직은 여유가 있어서 지켜보면서 준비를 마치고 접종을 시작할 수 있는 우리나라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려 한다. 싱가포르는 아예 도시국가 수준이니 비교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백신을 접종한 나라들에서 확진자가 얼마나 줄었고 사망자는 얼마나 줄었는가? 우리보다 환자수나 사망자수가 더 적은 나라들인가? 일본은 아예 주사기도 백신도 부족해서 오히려 더 난리더만.

 

20세기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세계의 뉴스들이 바로 실시간으로 들려온다. 그래서 백신을 먼저 접종했다고 영국이나 미국, 독일 등에 가서 살고 싶다는 것인가? 이스라엘의 접종률이 높다고 그리로 이민가고 싶은 것인가? AS 잘해준다고 좋은 제품이 아니란 것이다. AS센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어야 좋은 제품이다. 대개는 그런 정도로 품질관리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누가 지금 더 잘하고 있는가? 백신을 서둘러 먼저 접종하는 나라들인가?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여유를 가지고 준비할 수 있는 대한민국인가?

 

언론의 자유란 필요없다는 이유인 것이다. 어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모든 언론이 조선일보를 닮아 버린다. 아예 조선일보처럼 하게 해달라고 젊은 기자들이 선배기자들에게 덤비는 언론들마저 있을 지경이다. 조선일보처럼 되고 싶다고 파업하는 방송사도 있다. 그때 내세운 명분이 언론정상화였다. 그때 파업했던 언론들 지금 꼬라지가 어떠한가. MBC만 유일하게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중이다. 언론이야 말로 백해무익이다. 내 신념이 바뀌었다. 대단한 언론들이다.

한국 원자력발전의 안전문제는 심각하다. 온간 비리와 부정이 판치고,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사고가 빈발한다. 그러나 월성원전의 조기폐쇄는 명백한 잘못이다.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

 

김학의는 성폭행이 아닌 단지 성상납을 받았을 뿐이다. 여성의 성과 인권을 유린한 것이 아닌 사업자와 부정한 관계를 유지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죄질은 나쁘지만 그를 처벌하기 위해 대통령이 재조사를 지시하고 출국금지까지 시킨 것은 중대한 정권차원의 범죄다. 마땅히 청와대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러고보니 후자는 정신분열이 아니네. 일관되다. 어차피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여성의 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의 성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김학의의 범죄는 여성과 상관없는 것이다. 여성주의와도 상관없는 것이다. 진보와는 더욱 상관이 없는 것이다. 서지현 검사도 박원순 시장을 욕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겪었던 수모와 모욕은 여성들과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원자력발전의 안전에 문제가 있어도 조기폐쇄는 범죄다.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도 검찰이 무혐의 결론을 내렸으면 일반인이고 그에 대한 수사는 인권침해일 뿐이다. 바로 한국의 자칭진보들인 것이다.

 

라임과 옵티머스에 혹시라도 정치권이 연루되어 있으면 큰 문제지만 검찰이 연루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향응을 제공받고 지검장이 직접 무혐의 처분으로 피해를 키웠음에도 누구도 그에 대해 문제삼는 경우가 없다. 하긴 국민의힘 관계자가 연루되었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와 여당이 연루되었을 때 뿐이다.

 

표창장은 업무방해인데 실험결과 조작은 그를 감수할 관청이 검수를 잘못한 것이므로 무죄다. 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칭 진보에 대한 나 자신의 증오와 혐오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를 근거한 판단이 오히려 예언이 되어 버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뇌가 둘이다. 영혼이 둘이다. 정신이 둘이다. 그나마 여성주의는 하나다. 60년대 유명한 판결을 떠올리게 만든다.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여성은 따로 존재한다. 자칭 진보와 자칭 여성주의다. 욕나오는 이유다.

 

여성주의만이 아니다. 자칭 진보도 마찬가지다. 어느새 자칭 진보는 여성주의에 포섭된 지 오래다. 여성주의의 뿌리는 친일 친독재 친기득권이었다. 단지 착각속에 그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래서 자칭이다. 버러지새끼들이다.

어디 단기계약직이라도 좀 괜찮은 자리 하나 알아보려 하면 신원조회부터 하게 된다. 동의서부터 써야 한다. 내가 전과도 없고 그동안 큰 문제없이 성실하게 잘 살아왔음을 경찰기록을 통해 입증해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번에 무기계약직 되면서도 그래서 서류접수할 때 동의서부터 써주었었다. 예전 직장에서도 동의서를 작성한 적 있었다.

 

어차피 그냥 몸쓰는 일이란 것이다. 대단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 없이, 그렇다고 크게 사회적으로 영향을 줄만한 자리도 아닌 몸쓰며 일하는 자리에 지나지 않는데도 전과기록이 중요하다. 어딘들 안 그럴까? 그런데 의사는 아니었다. 살인을 저지르든 강간을 저지르든 시간만 지나면 다시 의사면허는 복구된다. 사람의 생명을, 더구나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환자를 대상으로 진료를 해야 하는 의사에게 전과기록이 아무 의미가 없다.

 

재미있는 건 그런 의사들의 범죄에 대해 의사면허를 박탈하고 재발급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하는데 의사들의 반발을 고스란히 옮겨주는 언론의 존재일 것이다. 의사가 범죄를 저지른다고 면허까지 박탈하는 것은 부당하니 코로나19로 위급한 상황에 백신접종을 보이콧하겠다. 문제가 될만한 발언인데도 비판 한 마디 없이 오롯이 야당의 노골적으로 편드는 발언까지 긍정적으로 옮기고 있다. 언론의 정의란 무엇일까? 언론의 가치란 것은? 그리 입바른 소리 잘하던 자칭 진보까지도 역시 반정부가 진보고 정의이기에 철저히 침묵한다. 시험으로 얻은 권력이야 말로 진짜 권력이라는 의미일 것인가. 백신접종을 보이콧하는 것도 의사의 권리다.

 

바로 실력중심 사회가 만든 암묵의 카르텔이란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갔고 시험 잘봐서 좋은 직업 얻었으니 그만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검사든, 판사든, 의사든, 기자든, 그래서 장혜영이나 류호정이 그리 국회의원을 우습게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깟 무지렁이 국민들로부터 표 조금 더 얻었다고 배지나 달았을 뿐인 놈팽이들따위. 대통령인들 하찮게 여겨지지 않겠는가. 자기들은 시험으로 지금의 자리를 얻었고 대통령은 그냥 무지렁이들의 인기투표로 당선되었다. 하물며 표를 준 것이 비국민을 넘어 비인간으로 취급해야 할 문빠들 아니던가. 문빠는 국민도 인간도 아니다. 그러니 의사가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잡고 협박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런 의사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악이다.

 

누가 의사의 행동을 비판하고 누가 의사들의 행동에 최소한 침묵하고 있는가. 너무 명확해서 굳이 더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란 것이다. 내가 전과기록조회 동의서를 써 보았기에 더욱 느끼게 되는 것이다. 누가 진정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의 편인가. 내 앞에서 노동자 권리 운운하는 자칭 진보 새끼들은 뇌를 파버리는 게 맞다. 버러지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승리호'를 분해하면 과연 거짓과 사실의 비율이 어떻게 나올까? 더구나 일상에서 우리들이 가치가 있다 인정할만한 주제라면 꽤나 그 비율이 높게 나올 것이다. 그나마 '승리호'는 SF다 보니 허구의 비중이 높고 현실에 기반한 작품들까지 포함하면 그래도 설마 사실에 기반한 내용이 1%도 안되는 경우는 아예 없다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반면 KBS는 사실을 취재해서 보도해야 할 기자마저 1개의 의미있는 사실만 있으면 99개의 거짓뉴스도 괜찮다는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차라리 넷플릭스에 지불하는 1만 원 남짓한 돈은 아깝지 않아도 KBS에 지불하는 2500원은 피눈물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아예 집에 TV가 없다. TV 자체를 보지 않는다. KBS에 단 한 푼의 돈도 보태지 않고자 아예 TV를 보지 않게 된 지 꽤 되었다. 대신 넷플릭스를 본다. 넷플릭스 영화나 드라마들의 픽션이야 재미있기라도 하지 KBS 뉴스의 픽션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그냥 열불만 터진다. 어째서 그따위 가짜뉴스를 공영방송이 공중파로 당당히 내보내는가 했더니 기자놈들 대가리속이 그렇다. 그런데 심지어 그 수신료를 올려달라?

 

9시뉴스의 제목을 바꾸면 생각해 볼 수 있다. 9시 픽션. 9시 꽁트. 9시 개소리. 9시 똥소리. 기자는 그저 사실이든 아니든 끄적여 떠들기만 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시청자들 재미있으라고 아무 소리나 화면까지 조작해가며 떠들어댄다. 그래서 재미있으면 수신료 2500원 다시 낼 용의도 있다. 공공성이라? 언제부터 KBS에 공공성이 있었을까? 공영방송이지 공공성이 있는 방송은 아니지 않았는가. KBS에 수신료를 내라고? 그냥 길바닥에 내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박대기 같은 기레기 월급을 심지어 내 돈으로 줘야 한다는 것인가?

 

내가 분명히 경고했었다. KBS 파업 저거 그냥 쇼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눈치봐서 쇼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KBS 파업하고 뭐가 달라졌는가? 파업 끝내고 노조위원장 일성이 문재인 끌어내려 정당성을 입증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노조위원장이 김경록PB 인터뷰를 왜곡한 KBS 사회부장이었다. 파업에 앞장섰던 놈들 가운데 무서워서 당시 자유한국당 비판 못하겠다는 놈도 있었고, 한동훈 검언유착 논점을 돌려보겠다고 의도해서 오보를 냈던 정연욱이란 앵커도 있었다. 그래서 뭐다? 파업 지지한 놈들만 병신이었다. 수신료인상? 누굴 진짜 병신으로 알고.

 

진짜 웃기는 놈들이란 것이다. 원래 보수는 언론의 가치를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언론이란 그냥 권력이 원하는대로 대신 떠들어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항상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왔던 것은 바로 저들이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해 마지않는 민주진영 유권자들이었다. 파업할 때는 그들의 도움을 구하고, 파업이 끝나고서는 비국민이라고 배제하고 비난하고. 내가 그래서 MBC는 몰라도 KBS 파업은 눈도 돌리지 말라 했던 것이었는데. 버러지새끼들인 이유다. 수신료인상 받아들이는 순간 민주당은 끝이다. 절대 양보할 수 없다.

명백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무려 두 번이나 김학의의 특수성폭행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렸었다. 심지어 재조사를 위한 출국금지요청까지 묵살하고, 출국금지의 정당성을 수사하겠다며 나서는 상황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상황을 두고 자칭 진보와 여성주의자들은 무엇에 더 분노하고 있는가?

 

무려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린 무고한 일반인 김학의를 사찰하고 출국금지시킨 그 절차의 정당성을 문제삼고 있는 중이다. 김학의가 출국했는지 여부를 공무원들이 살피고, 무고한 일반인이었는데 출국금지시켜서 결국 다시 수사받고 재판받도록 만들었다. 김학의에게 무혐의처분을 내린 검찰에 대한 비판 한 마디 없이 출국금지시킨 법무부의 책임만을 따지려는 중이다. 묻겠다. 그럼 김학의의 글로 쓰기도 너무나 참혹한 성범죄에 대한 분노는 어디로 간 것인가?

 

김학의에게 무혐의 결론을 내리고, 출국금지요청을 씹고, 그리고 그 출국금지의 불법성을 이제와서 따지겠다는 검찰에 대한 비판은 한 마디도 없다. 결국 그로 인해 김학의의 성범죄들이 모두 공소시효만료로 무죄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 역시 아예 한 마디도 없다. 오히려 그들이 김학의보다 더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오랜 동지였고 남편이었던 이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겠다는 한 아내의 손글씨 편지였었다. 가족을 믿고 싶은 아내의 마음은 비난하되 김학의나 김학의를 수사한 검찰에 대한 비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말했지? 차라리 성추행하려면 성폭행을 하라. 성폭행을 하려면 국민의힘에 입당하라. 

 

결국 결론은 내려진 것이다. 성인지감수성이란 정치적 프로파간다다. 성인지감수성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선동의 구호로써 성인지감수성이란 단어가 이용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방의회에서 지방지 여기자를 대상으로 성희롱 발언이 나왔을 때 누구도 그 발언에 분노하지 않았었다. 보수정당에서 성폭행 의혹이 불거지고 성추행 고발이 나왔을 때도 그 잘난 성인지감수성은 어디로 갔는지 꽁꽁 숨어 있었다. 김학의 출국금지 논란에서도 피해자가 당한 끔찍한 고통은 아예 사라진 채 무고한 일반인이 된 가해자만이 남았다. 가해자인 것은 법원에서 이미 유죄판단을 내리고서도 공소시효를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위해서 그를 수사하기 위한 출국금지의 정당성만을 따져물으며 정권의 정당성까지 걸고 넘어지는 중이다. 김학의를 수사한 것은 정권차원의 큰 잘못이다. 그리고선 다시 성인지감수성을 끄집어낸 것이 오랜 동지에 대한 우상호의 신뢰와 존경, 그리고 아내의 믿음이었다. 그런데도 과연 성인지감수성이란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인가?

 

김학의 출국금지 논란은 그런 점에서 여성주의와 여성주의가 앞세우는 성인지감수성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증거인 셈이다. 김학의의 성범죄보다 김학의의 무고함에 더 집중하며, 김학의를 무혐의처분한 검찰보다 그를 출국금지한 정부에 대한 분노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대통령이 엄중한 재수사를 지시했으니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정권차원의 비리다. 바로 그런 보도를 하기 위해서, 그런 비판을 하기 위해서 자칭 진보는 내부투쟁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김학의의 억울함을 밝히는 일이야 말로 참된 진보가 해야 할 일인 때문이다.

 

앞으로 성인지감수성 어쩌고 떠드는 버러지년들 보면 김학의 이야기부터 해주면 될 듯하다. 김학의와 박원순 누가 더 흉악한 범죄들인가. 누구에게 분노하고 누구에게 더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원래도 진보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더욱 진보라 할 수 없는 주제들이 되었다. 김학의를 감싸는 자칭 진보에 여성주의라니.

 

국회의원 보좌관은 근로기준법상 보호대상이 아니라는 류호정의 발언을 돌아보라. 성범죄를 친고죄로 돌려야 한다는 장혜영의 주장을 돌아보라. 월성원전 폐쇄는 정권차원의 범죄고 비리다. 정의당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윤석열을 징계해서는 안된다. 진보가 어디 있는가? 진중권과 정의당, 한겨레 사이에 차이란 존재하는가? 이미 알던 사실이다. 버러지들.

예를 들어 LG에서 TV를 팔면서 이리 말한다 가정해 보자.

 

"99개의 불량품이 있어도 1개의 명품이 있으면 불량품에 책임을 지워서는 안된다."

 

현대도 차를 팔면서 말한다.

 

"99개가 결함품이어도 1개만 멀쩡하면 리콜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

 

현실은?

 

"99개가 멀쩡히 돌아가니 1개의 불량품 따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슨 개쌍욕을 쳐들어 먹으려고. 아마 언론이 앞장서서 욕을 해댈 것이다. 100개 가운데 1개나 되는 불량품이 있는데 제조사가 무시하고 있다고. 아, 대기업들이니 그냥 넘어가려나?

 

그런데 기레기들은 말한다. 99개의 가짜뉴스가 있어도 1개의 가치있는 진짜 뉴스가 있을 수 있으므로 그를 처벌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에 책임을 지우려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 1개의 가치있는 진짜뉴스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태연히 99개의 가짜뉴스를 내보내는 중이다. 심지어 사명감까지 가지고 당당히 외치는 중이다.

 

"가짜뉴스 처벌하지 마!"

 

하긴 박대기가 눈맞아서 이름이 알려졌지 기사 잘 써서 유명해진 기자는 아닐 것이다. 기자는 어차피 눈만 잘 쳐맞으면 되는 직업이다. 취재같은 건 검찰에 맡기면 그만이다.

 

아무튼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오만한 집단이란. 검찰조차 차마 1명의 범인을 잡기 위해 99명의 무고한 사람을 만들어도 괜찮다는 말따위 하지 못할 것이다.

 

기레기가 기레기인 이유다. 일단 사람새끼들이 아니다. 버러지들. 물고기들 영양보충이나 시켜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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