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에서 약속했던 4대강의 정상화을 이루어내지 못했다고 욕하는 놈들이 있다. 특히 자칭 진보들 가운데 그런 놈들이 많다. 그러면 나는 말해준다. 해당지역 주민들이 아예 대놓고 반대하는데 독재국가도 아니고 어떻게 힘으로 찍어누르고 밀어붙여서라도 해냈어야 하는 것인가.

 

같은 이유에서다. 4대강을 정상화하자고 보 수문을 열자는 것조차 지역주민들이 반대해서 거의 지지부진했었다. 물이 썩어도 상관없다. 썩은 물로 농사짓고, 그 썩은 물을 마시고, 그 썩은 물로 빨래도 하고 씻기도 하며 문제없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러는 것이 지금보다 더 잘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했고 4대강을 다시 추진하자는 사람에게 압도적인 표를 주어 당선시켰다. 해당 지역들 득표율 보라. 누구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가.

 

원래 내가 4대강에 반대했던 것은 환경문제란 곧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먹는 식수이고, 일상에서 쓰는 생활용수이고, 먹을 농산물을 기르는 농업용수이기도 하다. 그런 물이 심각하게 오염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의 생명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 지역 주민들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썩은 물이라 더 좋다. 물이 썩어서 자신들은 더 행복하다. 그런데 내가 거기다 대고 뭐라 하겠는가.

 

낙동강 그리 된 거 괜찮다고 찬성하고 지지한 것은 그 지역 주민들이었다는 것이다. 몰랐던 것도 아니고 새로 밝혀진 사실도 아니다. 그런데도 괜찮다, 더 나아가 더 해도 된다고 스스로 행동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거기에 뭐라 더하는 것은 주제넘는 것이다. 나는 그 지역에 살지도 않고 그 사람들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다.

 

뉴스를 봐도 시큰둥한 이유다. 낙동강 만이 아니라 4대강 전체가 그렇다. 그 지역주민들이 선택한 결과이고 따라서 그 지역주민들 자신이 해결할 문제다. 내 일이 아니다. 조금 더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살려 한다. 한 마디로 계산으로만 살려 하는 중이다. 의외로 쉽다. 편하기도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니다.

거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분명 작가는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권민우라는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돌발행동으로 팀 전체가 협의해서 준비한 변론전략에 피해를 입힌 우영우에게 페널티를 주어야 한다는 권민우에게 장명석은 말한다. 같이 일하다가 생각이 안맞고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풀고 해결을 해야지 매사에 잘잘못 가려서 상주고 벌주고 난 그렇게 일 안한다. 아마 작가가 되도 않는 공정을 지껄여대는 20대 남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사법고시 합격한 곽상도 아들은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어도 아버지가 민정수석까지 했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번듯한 학벌도 실력도 경력도 쌓지 못한 탓에 경비원, 미화원, 조리사 등을 하는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은 대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조차도 불공정하다.

 

부모가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으니 있는 집 자식들이 공부 잘하는 것도 정당하다. 그렇게 노력해서 서울에서 자리잡고 살게 되었으니 서울에 사는 학생들이 입시에 유리한 것도 공정에 위배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가 무능해서 집안이 가난하다고 입시에서 약간의 우선권을 주는 것조차 불공정한 것이다.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는 하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을 것이다. 당시에도 20대 남성들과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 학교 다닐 때 노력하지 않아서 비정규직 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급여가 적고 처우가 열악해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더 노력해서 좋은 대학 들어갔으면 그에 걸맞는 혜택을 누려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그에 따른 페널티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당시에도 수도와 전기, 의료보험등의 민영화를 적극 주장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었다. 노력도 안해서 가난한 놈들이 내가 낸 세금으로 수도와 전기를 마음대로 쓰고, 병원도 다니고 하는 것을 도저히 두고보지 못한다. 아마 지난 대선 초반에도 이재명이 서울대 가서 학생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자신들이 돈벌어 내는 의료보험료로 가난한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 것은 불공정하다. 결국은 지금의 현실이란 과거의 노력의 결과이기에 그에 따른 포상과 징벌을 분명히 하는 것이 공정이라는 사고의 연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성공했다면 그에 따른 더 큰 포상을, 즉 더 큰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그렇지 못했다면 더 큰 징벌을, 즉 더 열악한 처우와 차별을, 그래야 노력한 사람은 노력한 보람을 느끼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무능과 나태를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바로 그 놈들에 의해 인터넷에서 네티즌 수사대라는 이름으로 개인들에 대한 사냥이 당연하게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벌을 주어야 하니까. 어떻게든 잘못한 것을 하나라도 찾아서 벌을 주는 것이 정의일 테니까. 타진요 사태는 그런 점에서 지금 이대남 현상의 전조였는지 모르겠다.

 

동료가 아니다. 아니 인간조차 아니다. 그래서 네티즌 수사대의 인간사냥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벌을 주어야 하는 대상이다. 상을 주어야 하는 대상이다. 즉 '대상'이다. 주체가 아니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나와 대등한 또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주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판단하여 상을 주고 벌을 줄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저들의 공정에는, 정의에는, 저들이 사는 세상에는 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인터넷처럼 그저 텍스트로 이루어진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정명석의 입을 빌어 말하는 것이다. 우영우는 자신의 동료다. 함께 대화하여 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서로 다르고 맞지 않는 부분들을 이해해 가야 하는 또다른 주체인 것이다. 그저 부하직원이 아니다. 상을 주기 전에 묻고, 벌을 주기 전에 이해하려 한다. 그를 통해 함께 공존하려 한다.

 

어째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회는 굳이 비용과 기회를 배려해야 하는가. 얼핏 낭비로 여겨질 수 있지만 자르면 남인 회사와 달리 현실의 공동체는 자연적으로 강제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과 함께 공존한다. 그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때로 양보하고 때로 손해를 보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가며 그들을 배려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권민우는 그런 사실 자체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영우는 그냥 남이다. 자기와 다른, 그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타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상이다. 인간도 아닌. 주체일 수 없는.

 

저번에 썼던 20대 남성과 자유의지주의에 대한 글을 보완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다 더 간명하게 그 진실을 꿰뚫는다. 물론 이제 와서 20대 남성의 공정따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이미 그동안 여러 사건들로 그 실체가 까발려진 뒤일 테니.

 

아무튼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민우란 캐릭터가. 권민우도 20대일까? 많아야 30대 초반일 텐데. 하는 짓거리가 닮았다. 타진요까지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병신은 병신이다. 진리다.

간단히 가까운 PC방 한 번 가보자. 예전 PC방 알바라면 거의 남자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장사 잘 되는 곳은 어지간하면 젊은 여자알바를 쓰고 있다. 그래야 손님들이 좋아하니까. 바로 옆 PC방은 젊고 예쁜 여자알바인데 여기 PC방은 찌질이 못난 2번남이다. 손님이라면 어느 PC방에 가겠는가.

 

어느 대기업 건물에서 경비할 때의 일이다. 본사 쪽에서 어느날 요청을 해왔단다. 젊은 여자들 위주로 보안원을 뽑아달라. 여직원들 입장에서야 같은 여자가 검색하는 게 편할 테고, 남직원들 입장에서도 젊은 여성이면 그래도 거부감이 덜할 터다. 남자 보안원들은 여직원이 미니스커트라도 입고 있으면 검색도 않고 그냥 보내야 했었다. 어느 여직원이 노조에 성적 수치심 느낀다고 건의하는 바람에. 

 

산업구조가 고도화 선진화될수록 당연히 서비스업 일자리는 늘어나게 된다. 거꾸로 생산직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쉽다. 그런데 정작 젊은 남성들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일자리란 거의 대부분 생산직 일자리란 것이다. 왜? 싸고 다루기 쉬우니까. PC방 알바를 처음 젊은 남성 위주로 고용해서 썼던 이유이기도 했다. 예전 PC방 분위기 생각해 보라. 아 더럽고 냄새나고 시끄럽고 이상한 인간들 바글거리고, 진짜 별 해괴한 놈들이 다 모이는 곳이다. 더구나 그 대부분이 젊거나 나이든 남성들이었다. 그런데 여성에게 카운터를 맡긴다? 그것도 젊은 여성에게? 

 

바로 이것이 젊은 남성들이 중년 이상 이전세대 남성들에게 이상한 우월감을 느끼면서 정작 또래의 여성들에게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적대감을 가지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기업들이 젊은 남성들을 더 원한다. 구인광고를 보면 거의 대부분 젊은 남성들을 위주로 찾고 있다. 당연하다. 말한 것처럼 젊으니까 싸고, 남자니까 함부로 굴려도 되겠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들 막 시켜도 크게 문제는 안 되겠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젊은 남성들도 함부로 막 대하지 못하고 고용하는 비용도 그리 싸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들의 자리마저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대신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 것이다. 주유소나 편의점 들르다 보면 중년 이상의 남성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될 것이다. 차라리 이들이 같은 값이면 믿고 맡기기에 더 나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런데 한 편으로 젊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특히 덜 힘들고 덜 위험하고 덜 더러워 보이는 서비스업 일자리는 거의 여성들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도 기름밥 먹어가며 시멘트가루 마셔가며 힘든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데, 아니 그 전에 뭔가 해 보려 해도 왜 이리 젊은 여성들만 찾는 곳이 많은 것인가. 같은 젊음이라면 여성의 젊음 쪽이 더 가치가 있다. 나이를 먹으면 그 가치는 당연히 젊음의 소진과 함께 급락하지만 그 전까지는 젊음이라는 한 가지만 가지고 경쟁했을 때 젊은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열위에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에 입사한 신입직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얼마이고, 공기업에 입사한 직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얼마이고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런덴 대부분 2번남들에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그림에 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 당장 그들이 경쟁하고 있는 PC방이고 편의점이고 카페고 패스트푸드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자리들에서 남성들은 자신들이 여성들에게 심각하게 밀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기껏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일자리란 더 힘들고 더 더럽고 더 위험한 일자리들 뿐이다. 부당하다. 불공정하다.

 

그래서 2번남들보다 1번녀들이 더 사회적으로 깨이고 인간적으로도 성숙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1번녀들은 이미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있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들을 몸으로 겪으며 헤쳐나가고 있다. 그에 비해 2번남들은 정작 불만만 많았지 아직 딱히 뭐라도 해 본 것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면서 정작 공무원을 줄일 것을 약속한 후보에 표를 주는 것이 그런 한 예일 것이다. 공무원 줄인다니까 이전에 공무원 늘인 것을 욕하는 지능은 현실을 겪어 보지 못한 무지와 편협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차이가 국민의힘에게서 버림받고도 김정숙 여사 욕하면서 위안을 얻는 2번남과 적극적으로 민주당을 바꾸고 개혁을 이끌어내려는 1번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 테고.

 

이재명의 말이 한 편으로는 맞다. 유시민의 분석도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과연 젊었을 때의 그같은 구조가 항구적으로 이어지는가면 아니라는 것을 일단 30대 넘어가고 사회와 현실에 대해 어느 정도 경험하고 나면 대부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30대 넘어가면 페미니즘에 분노하더라도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은 그래서다. 말하지 않았는가. 여성은 지나치게 젊음의 가치가 고평가되어 그 젊음을 상실하는 순간 노동시장에서의 가치는 급락한다. 반면 남성은 충분히 경력만 쌓으면 젊음이 노동시장에서의 가치평가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긴 그래서 2번남들이 정규직 해고자유화에 표를 준 것이지만. 나이 먹어서도 여전히 경쟁자로 남아 있는 이전 세대들을 다른 수단으로 배제하기 위해서. 30대 이후에서 과연 여성들이 여전히 남성들에 비해 노동시장에서 우위에 있는가. 4050은 알고 2번남은 알기에 아직 멀었다.

 

인수위에서 여성단체 만나서 참 훌륭한 소리 늘어놨더만. 20대 남성들에게 일자리가 없다. 그런데 젊은 여성들에게 양보를 요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대부분 젊은 남성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여성일지라도 나이 든 여성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젊은 남성들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는 대기업 말고 20대 남성들 스스로가 싫다. 내가 그동안 해 온 일들만 해도 사람 못 구해 허덕이는 곳이 한둘이 아닌데 그 놈들은 그런 곳은 절대 가려 하지 않고 일자리 없다고 지랄만 해댄다. 그 결과가 바로 반페미니즘이라는 현상이다. 저 일자리가 바로 내 일자리여야 하는데.

 

의외로 헤집어 보면 그 구조란 무척 간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젊은 남성들은 젊은 여성들을 혐오하고 증오하는가. 한 세대 이전의 같은 남성들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는가. 그들의 노동시장에서의 가치가 아직 그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평가되는 곳을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가 무의미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뭐다? 2번남은 병신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실업률 높다는데 여전히 생산직은 사람이 없어 공장이 안 돌아갈 지경이다. 외국인이라도 없으면 바로 문닫을 공장이 전국에 수두룩빽빽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자기들이 싫다.

 

내가 오래전부터 2번남들 병신취급해 온 또 하나 이유다. 예전에는 현실을 가르쳐주고 설득도 시도해보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짜증나고 귀찮다. 일단 저 새끼들은 들어먹을 대가리 자체가 안 되어 있다. 그런 놈들에게 딱 맞는 정치인이기는 하다. 2번남이 2번남인 이유, 병신이 병신인 이유다. 참 아름답게도.

영지주의란 달리 번역하자면 비의주의라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불완전한 이 세계에 오로지 완전한 진리를 소수의 선각자, 혹은 선지자들만이 알고 있으며 비밀리에 다양한 암호를 통해 전하고 있다. 그래서 로마 교회를 가톨릭이라 부르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를 이끌던 소수의 주교들에 의해 제각기 해석되고 전승되던 교리를 로마에서 공의회를 통해 정리하고 통일함으로써 그를 보편적인 교리로 삼은 것이 바로 로마교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어느 놈은 땅굴파고 들어가자 하고, 어느 놈은 죽음을 체험하자 하고, 어느 놈은 자해나 일삼고, 그런 자의적 해석보다 보편적인 성경의 이해를 통해 교회를 하나로 통합해 보자. 

 

문제는 그런 로마교회의 보편성이라는 것도 성경을 해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주관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여기에 세속적인 이해까지 더해지면 면죄부라는 되도 않는 것들까지 나오게 된다. 로마 교황은 베드로의 후예로써 예수의 대리인이고 주교와 신부들은 그를 대신하여 신의 말씀을 전하는 신의 대변자, 대행자들이다. 그래서 성직자다. 가톨릭의 사제란 일반 신도들과 차별되는 존재이고, 따라서 종교적으로 일반 신도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다양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고해성사 같은 것이다. 오로지 신부이기에 죄를 듣고 용서하는 것이 가능하다. 신도를 위해 신께 기도하는 것이 허락된다. 그래서 루터가 나선 것이다. 어차피 교황도 사람이고 신부도 사람이니 그딴 헛짓거리 말고 성경 자체로 돌아가자. 오로지 성경만이 신의 말씀이다.

 

그래서 개신교에서 목사는 성직자가 아닌 것이다. 목회자이지 성직자가 아니다. 성직이 아니고, 따라서 일반 신도와 차별화되지도 않는다. 감히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오로지 그 자체로 올곧고 바르며 진실이고 진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감히 개인이 그에 대해 일점 일획도 더하거나 뺄 수 없으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단이다. 보편의 상식과 가치 안에서 용납될 수 있는 이해를 넘어선 자의적 해석에 대한 종교적인 판단이다. 개신교가 로마교황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황이 뭔데 우주창조든 진화론이든 이러쿵저러쿵 판단을 말하고 그를 신도들에게 전하려 하는가. 성경은 성경 그 자체로 존엄하므로 교황의 해석이나 이해는 오히려 그 존엄을 해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성경의 해석을 목사들이 시도한다.

 

감히 성직자도 아닌, 단지 신자들의 신앙을 이끌 뿐인 목사가 성경에 자기 생각을 더하고, 심지어 나아가 자신을 예수와 비견한다. 신에 갖다 붙인다. 아마 이쯤에서 이상하다 여기는 개신교인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이단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한국 기독교에서 주류교회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아니 아예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나님 나한테 죽어'라 외칠 수 있는 목사가 한국 기독교의 대표처럼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신천지의 선거개입에도 개신교가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가장 큰 이유다. 아니 나아가 잘하면 신천지도 이번에 주류교단으로 인정받을 가능성까지도 생각하는 중이다. 다르지 않다. 지금 한국 교회와 신천지는 태생부터 크게 다르지 않다.

 

목사는 신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이가 아니다. 신의 뜻을 대신 행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건 과거 사제들이 하던 역할이었다. 그래서 성직이었다. 오로지 그들에게만 허락된 성스런 직분이었다. 목사 또한 그러한가? 그렇기에 지금 개신교 목사들이란 이만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그 자체로 과거 영지주의의 사제들과 다르지 않은 불측한 존재들이란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해석했으니 이 교리가 옳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이고, 예수의 재림이고 예수의 대행자다. 내가 하는 말이 예수의 그것과 같다. 이 글을 읽고 이단이라 여기면 그나마 제정신인 것이고 아니면 그 자체로 한국 개신교의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천지와 한국 개신교가 다른가. 글쎄... JMS와도 차이를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인데, 원래 아랍권에서 여성들에게 부르카나 히잡, 차도르 등을 씌우는 이유는 무엇보다 여성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이 외출할 때 쓰던 장옷도 비슷한 용도였었다. 세상은 흉험하고 여성은 약하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출되지 않게 최대한 몸을 가려야 한다.

 

남성이란 욕망이며 폭력이다. 여성은 단지 그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남성은 여성을 보면 당연하게 욕망을 느끼고 폭력으로 해결하려 할 것이므로 여성은 그를 회피하기 위한 다른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겠는가. 짧은 치마를 입지 않았으면 성폭행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지 않았다면 추행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가슴이 도드라진 옷을 입었으니 희롱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일상적으로 통하는 논리다. 그러므로 그런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남성의 욕망으로부터도 일정하게 회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논리다. 아니 최근 아주 질리도록 듣고 있는 논리일 것이다. 첫째 남성은 욕망과 폭력의 존재다. 둘째 여성은 단지 그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벽을 세워야 한다. 다만 부르카나 차도르 같은 천이라는 물리적인 벽이 아닌 인식에 의한 사회적 장벽이다. 성인지감수성이다. 남성은 여성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도 안되고, 말을 건네서도 안되고, 감히 몸이 닿아서도 안된다. 여성은 너무나도 여리고 연약한 존재이기에 감히 보려 하지도 말고 그저 위하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중세의 기사도가 그랬었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해서가 아닌 여성을 약자로 보았기에 기사들은 연약한 여성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었다.

 

페미탈레반이란 말이 더없이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인 것이다. 탈레반이 여성에 대해 적대적인 이유는 성장기에 여성을 직접 접해 볼 기회 없이 전통적인 관습과 관념에 의해서만 머릿속에 구성하여 각인하게 된 때문이라 한다. 집에서 시키는대로 좋은 대학 가기 위해 공부만 하다 보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관념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망상은 실제보다 항상 더 과격하고 극단적이다. 그래서 그들의 머릿속에 남성과 여성이란 실제가 아닌 관념화된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은 성적인 가해자이고 여성은 성적인 피해자일 뿐이다. 실제로 그러한가.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아니 여성의 지위가 바닥이던 전근대에도 흔치 않게 권력을 거머쥔 기득권 여성 가운데는 남성을 상대로 억압과 폭력을 자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남성을 납치하고, 감금하고, 강간하고, 남성을 단순한 성적인 대상으로만 여긴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만이 아닌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남성들만 보인 군부대에서 성추행은 물론 성폭행사건까지 일어나는 것도 그 한 예일 것이다. 감옥에서도 그들이 반드시 동성애자여서가 아니라 단지 대상이 약자이고 자신이 강자이기에 성폭력이 저질러지는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성욕과 권력욕은 때로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수면욕과 식욕이 인간의 체내에서 비슷하게 인지되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런데도 반드시 남성을 가해자로 여성을 피해자로 단정짓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사고인가.

 

그래서 이슬람권에서는 여성들에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부르카와 차도르를 강요했던 것이었다. 조선시대 여성들도 문밖출임을 금지당했고, 설사 외출을 하더라도 장옷으로 자신을 가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럽에서도 여성이 외출을 하려면 남성의 보호가 반드시 필요했었다. 남성의 보호가 없이는 여성은 무슨 짓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도 여성들이 남성과 아예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자.

 

어느새부터 여성을 보면 괜히 몸을 움츠리며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을 거는 것도 꺼려진다. 괜히 몸이라도 스칠까 멀리 돌아가게 된다. 전에는 진짜 아무 문제없이 농담을 주고받던 것도 이제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럽고 피곤해지기까지 한다. 여성이 불편하다. 여성이 피곤하다. 그런 세상을 여성주의자들은 바라는 것인가.

 

탈레반들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과연 탈레반과 한국 여성주의자들의 여성에 대한 인식에 어떤 차이가 있기는 한 것인가. 실제 하는 행동을 보더라도 위상적으로 크게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본질은 같다. 남성만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 대해서까지 강요하며 강제하려 한다. 다르지 않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얼마전 직장에서 계약직 몇 명이 무기직으로 전환되었다. 전에도 썼지만 무기직이란 승진이나 전보가 없는 정규직이라 할 수 있다. 진짜 정규직이라면 직장생활 하면서 부서도 몇 번 옮기고, 승진해서 직급이며 급여도 바뀌고 할 테지만 무기직은 그런 것 없다. 근속에 따라 일정하게 변동하는 급여를 적용받을 뿐 퇴직할 때까지 정해진 부서에서 정해진 업무만을 보게 된다. 한 마디로 정규직이 되었다는 소리다.

 

당연히 시험같은 건 보지 않았다. 그냥 계약직으로 면접만 간단히 보고 채용해서 1년 가까이 일하는 모습을 살핀 뒤 업무능력과 성실성, 인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후 갱신될 계약을 무기계약으로 변경한 것 뿐이다. 큰 일이지 않은가? 그래도 공기업인데 정규직을 뽑으면서 시험도 보지 않았다. 서울대는 이미 뽑힌 미화원들조차 영어에 한문시험까지 치르고 난리인데. 2030, 특히 서울대생들을 뿌듯했을 것이다. 이야말로 공정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노가다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깟 힘쓰는 일따위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그런데 서울교통공사 주방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화원이나 시설관리 역시 특별한 전문지식이나 자격이 필요치 않은 저숙련노동에 해당한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원은 그나마 전문성을 상당히 요하는 자리다. 그냥 일반경비가 아니라 특수경비라고 따로 더 많은 시간을 교육받고 시험도 쳐야 하는 분야다. 그런데도 계약직 무기직 시켜준다고 얼마나 난리였는가. 그에 비해 곽상도 아들 50억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분위기다. 곽상도 아들인 만큼 그만한 역할을 했으니 돈을 줬겠지. 그게 뇌물인데 그것을 공정이라 말한다. 그에 비하면 조국 전장관 딸의 표창장이며 추미애 장관 아들의 병가는 얼마나 불공정한 것인가.

 

2030이 공정이니 떠드는 소리를 개소리라 치부하게 되는 이유다. 그냥 어린 것들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저 잘난 맛에 척수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수준이란 것이다. 딱 타진요의 재현이다. 인터넷 수사관에 재판관들의 군상이다. 내가 권력이다. 내가 판단하고 정의하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공정도 내가 정의한다. 그리고 그와 똑같이 인국공에 불공정 잣대를 들이대던 것이 바로 자칭 진보들. 2030은 보수화된 것이 아니다. 유아화 퇴행화된 것이지.

 

아무튼 덕분에 앞으로 계약직 들어오는 사람들만 빡세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어차피 정규직 안 될 것 알기에 대충 하다 그만두면 실업급여나 타먹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 그렇게 일하던 사람들은 거의 그만두고, 진짜 열심히 기존 직원들과 잘 어울리며 일도 잘하던 사람들만 남아 무기직이 되었다. 원래 이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그러나 2030이나 언론이나 자칭 진보는 이를 불공정이라 욕하겠지. 그래서 어딘지는 말 못하겠다. 씨발 것들이란 생각 뿐이다.

光天之下 天生聖人 爲世作則

해석하자면 '빛나는 하늘 아래 하늘이 성인을 내시어 세상을 위해 도리를 만들었도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성인은 당시 황제이던 주원장으로 글쓴이는 황제를 칭송하고자 이 글을 썼었지만 도리어 주원장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빛이란 반짝이는 대머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승려생활을 했던 주원장의 불우한 과거를 비꼬는 것이며, 도리를 가리키는 칙則은 도적을 가리키는 적賊과 발음이 같으므로 홍건적 무리에 속했던 자신의 전력을 비방하려는 것이다. 말이 안되는 트집이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의 뜻이었기에 감히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청 옹정제 때는 사사정이라는 한인관료가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에 있는 '백성이 머물러 사는 곳維民所止'이란 귀절을 시제로 냈다가 다시 황제를 능욕했다 해서 처벌받은 사례가 있었다. 이유인 즉 옹정雍正에서 머리부분을 빼면 止가 되는데 이마저 民所라는 글자로 갈라 놓았으니 대역무도한 의도가 있다 여긴 것이다. 역시 말도 안되는 트집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그렇다니 그리 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혹시라도 꼬투리잡힐까 과거 이미 있던 문헌을 고증하는 것으로 학문을 대신한 결과가 바로 청대에 유행한 고증학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머리를 짧게 잘랐으니까, 특정 단어들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의도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 과거 전효성이 '민주화' 발언을 했다가 욕먹은 것도 '민주화시키지 않는다'라는 명백히 민주화를 부정하는 의도의 표현 속에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사투리의 '노'와 일베식 표현의 '노'를 구분하는 기준 역시 마찬가지다. 운지니 부엉이니 하는 단어들 역시 어떤 맥락 속에 쓰였는가에 따라 일베인가 아닌가가 결정된다. 하긴 일베 놈들 입장에서야 자기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 가지고 괜히 트집잡는다 여겼을 것이다. 자신들은 악의로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그냥 일상의 언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 일상의 언어가 광주의 희생자들을 조롱하고 세월호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점이 그놈들의 정체를 보여주고 있을 테지만. 아무튼 그래서 과연 짧은 머리와 특정한 단어들이 그런 맥락으로 읽혀지고 있는가.

 

숏컷은 역사도 아주 유구한 헤어스타일이다. 반드시 여성주의자라서가 아니라 미적인 목적으로, 혹은 실용적인 이유에서 숏컷을 선택하는 여성이 현실에 넘쳐나도록 많다. 실제 남성 가운데도 여성의 숏컷 스타일을 무척이나 선호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여성의 헤어스타일까지 강제하려는 것인가? 페미니스트가 되기 싫으면 머리를 길게 기르라. 그러면 머리를 길게 기른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인가. 정의당 강민진도 머리가 무척 길더만. 특정 스타일을 특정 부류와 연관지으려면 그 역의 관계도 성립해야만 한다. 페미니스트라서 머리가 짧다. 따라서 머리가 짧으면 페미니스트다. 숏컷이 아닌 단발의 여성주의자들은 무어라 말하려는 것인가.

 

오조오억은 그리 자주 보지 못했지만 웅엥웅은 아주 오래전부터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으면 조롱하는 용도로 인터넷에서 자주 쓰이던 표현이다. 혹은 자신의 말을 어물거리며 넘길 때도 웅엥웅이란 표현을 쓰고는 했었다. 남성의 어떤 특징을 비하하여 만든 표현이 아니라 그장 말을 어물거리는 자체를 의성어로써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웅엥웅 해보라. 그게 어떤 식으로 들리는가를. 오조오억 역시 내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삼십육만육천과 비슷한 의도였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밥을 사야 하는 이유를 삼십육만육천가지만 대 보라. 여성시대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니까 페미니즘 용어고 남성비하 언어다. 그러면 바보 병신도 남성비하가 되는 것일까? 하긴 여성비하이기도 하다.

 

맥락을 배제하고 단어만 남기면 발생하는 문제인 것이다. 요즘도 국어를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모르겠다. 전체의 유기적 구조와 맥락적 이해가 아닌 개개의 어휘와 표현에 집착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역시 권력인 것이다. 지난 보궐선거 이후 20대 남성을 부쩍 추켜올리면서, 여기저기서 특히 20대 남성을 대변하는 곳으로 특정 사이트를 주목하면서 기왕에 주어진 관심과 권력을 어떻게든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렇게 인민재판하듯 여러 혐의자들을 만들고 사냥을 주도하기도 했었다. 이번에는 올림픽이다. 더구나 자신들의 정신적 모국인 일본이 조롱받는 도쿄올림픽이다. 일본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인 선수를 용서할 수 없다.

 

재미있는 건 차라리 김건희는 옹호해도 안산 선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성주의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김건희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저리 큰데 안산 선수를 위한 목소리는 일부러 찾아듣지 않으면 안될 정도다. 원래 여성시대나 워마드, 메갈리아는 일베와 뿌리가 같다. 성향도 같다. 그러고보니 여성주의자들이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이유도 그렇게 맥락상 이해가 된다. 워마드와 메갈리아의 성향은 항상 일관되게 반문친박이었다. 내가 여성주의자들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박근혜 사면이라 주장하는 이유다. 어이가 없다. 

초나라 섭공이 공자에게 자랑했다. 우리나라에는 아주 정직한 사람이 있어서 아비가 양을 훔친 것을 알고 바로 관청에 고발하더라. 그러자 공자가 반박했다. 우리나라에도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아비가 아들 한 일을 감추고 아들이 아비 한 일을 숨겨주더라. 우리나라 법에서도 범죄자를 숨겨주거나 도주시켜준 사람을 처벌하는데 가족과 친족은 예외로 두고 있다. 인륜보다 중한 게 천륜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가족이라면 편들어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작년 박원순 시장이 세상을 떠나고 여성주의자들이 했던 짓거리를 기억한다. 평소 박원순 시장을 잘 알았고 그래서 그의 인품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성추행당했다는 여성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거나 유보하려는 이들에 대해 대뜸 2차가해라는 말부터 꺼내들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아예 아무 입장도 밝히지 않으려는 것조차 2차가해라는 정체도 알 수 없는 논리를 앞세워 바로 직전까지 친구이고 동지였을 이들에게 침을 뱉고 비난을 퍼부으라 강요하고 있었다. 심지어 가족이 고인을 보내는 앞길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떠나는 이를 추모하는 이들에게조차 추모하지 말 것을 강제하려 했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기로서니 가족을 잃은 슬픔조차 드러내지 말 것을 대놓고 강제하는 것은 군사독재시절에나 있었던 일이었다. 하긴 원래 여성주의는 군사독재에 빌붙어 기생하던 것들일 터다.

 

내가 수 십 년 신뢰해 왔던 손석희를 하루아침에 벌레새끼 취급하기 시작한 이유다. 정경심 교수가 자연인으로서 방어권을 행사하려는 것조차 대놓고 비난하고 있었다. 민주당 관련 인사들은 시민으로서 권리도 주장하거나 행사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여성주의자라는 것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지 박원순 시장의 지인이고 친구고 동료고 동지고 가족이었다는 이유로 죽은 이에 대한 친분과 연민과 슬픔을 드러내는 자체를 부정한다. 무엇보다 시민으로서 자신의 가족이 부당한 공격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법적인 수단으로 구제받고자 하는 것마저 금기시하는 중이다. 여성은 시민보다 상위다. 여성이란 인간보다 우위에 존재한다. 그런 대가리속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말했듯 대부분 여성주의자들은 있는 집 자식들이다. 혹은 그런 여자들과 어울리며 자기도 그런 줄 아는 것들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 사람이 존재한다. 자기들 위에 존재하는 자기들에게 함부로 해도 좋은 사람과 자기들 아래 존재하는 자기들이 함부로 대해도 좋은 사람. 이를테면 김학의가 전자에 속한다면 김학의의 피해자들은 후자에 속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정의당이나 한겨레가 단 한 번이라도 피해자들을 위해서 2차가해라는 프레임을 사용하거나 한 적이 있던가. 그게 바로 국민의힘과 민주당에 대한 태도에도 드러난다. 국민의힘이 되도 않는 이유로 고소고발을 남발할 때 정의당이 단 한 번이라도 논평을 내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것이다. 설사 박원순이 성추행 정도가 아닌 도저히 용서못할 추악한 성범죄를 저질렀어도 가족이 가족으로써 무고함을 믿고 소송을 거는 것까지 막아서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물며 지금껏 나온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저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의 일방적인 주장에 근거한 것일 뿐 박원순 자신이나 주변의 반박을 고려하여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일방의 주장만으로 유죄결론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민주국가에서 가능한 일인가.

 

아무튼 하는 짓거리 보니 장혜영이 왜 민주화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했는가를 알 것 같다. 권인숙이 조만간 전두환 찾아가서 용서를 구할 것이라 예상하는 이유다. 인간이 사라지고 인간의 존엄이 사라지고 인간의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 자리에 남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성인지감수성이다. 남성을 이해하거나 설득하려는 노력 없이 권력에 기대 일방적으로 자기들 논리만 강요하려 한다. 벌레들인 것이다. 인간이 아닌 이유다.

조국사태란 말 자체가 어이가 없다는 것은, 그래봐야 최대한 쳐줘도 표창장 하나 위조한 게 전부란 것이다. 사모펀드는 이미 다른 재판에서 무혐의로 결론났다. 사모펀드와 관련한 모든 혐의는 아예 정경심 교수 재판에서 다루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표창장 위조했으니 중대한 범죄행위가 있었으므로 조국사태라는 건데, 그러면 수 십 수 백 억 해 쳐먹은 놈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윤석열 검찰이 라임으로부터 향응과 접대를 받은 검사들에 면죄부를 주고, 수많은 여성들을 유린한 김학의가 무고하다며 수사한 검사들을 기소하고, 그 장모가 부당하게 수 십 억의 이익을 챙긴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침묵한다. 당연히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들의 부정과 비리에 대해서도 절대 언급하는 법이 없다. 청정하다. 왜? 윤석열이나 국민의힘이나 도덕성을 주장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고 민주당에만 문제가 있다. 차기 대선을 이야기하는데 민주당의 문제만 언급하는 한겨레의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중앙일보가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을 것이다. 언론은 박근혜의 공범이었었다. 자칭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박근혜 시절 강준만이 어디서 뭘 했는지 아는 사람 있는가? 정의당은? 한겨레는? 경향은? 오마이는? 박근혜 무섭다고 민주당만 욕했었다. 박근혜 잘못하는 것 제대로 뜯어말리지 못했다고 민주당의 잘못이 더 크다고 주장했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자칭 진보의 비난은 진상규명도 못하는 민주당에 집중되고 있었다. 여성대통령인데. 2012년 당시에도 여성대통령이었기에 자칭진보는 안철수가 사퇴하자 여성정치인인 박근혜를 지지하며 나서고 있었다. 

 

그러니까 민주당이 악해져야 박근혜가 면죄부를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한겨레는 이명박에 대한 애닲은 마음이 있다. 아마 자칭 진보 전반의 정서일 것이다. 이것저것 언론에 해 준 게 많다. 무엇보다 노무현을 죽이고 한명숙을 감옥에 보냈다. 이명박 유죄판결 받을 당시 한겨레의 지면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절절한 감정은 노무현더러 죽으라 등떠밀던 상황과 너무 비교된다. 그렇기에 표창장 위조고 수 십 억 부당이익보다 더 큰 범죄가 되고, 직권을 이용한 수많은 비리들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그보다 몇 배 더 큰 잘못도 문제가 없지만 민주당은 죄가 된다. 오세훈이 시장시절 메트로를 민영화하면서 그 참사가 빚어졌는데 그 오세훈을 지지하는 꼬라지를 보라.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최근 한겨레의 유튜브채널이 진짜 가관도 아니다. 난 무슨 조선일보인 줄 알았다. 가세연이 한겨레에 출장갔나 싶었다. 민주당만 욕할 수 있으면 가짜뉴스도 상관없다. 터무니없는 가짜뉴스라도 민주당만 공격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정당하다. 윤석열은 가족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든 가장 정당한 차기 대선후보인 것이다. 똥걸레가 똥걸레인 이유는 검찰 똥닦개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우습기만 한 것이다. 표창장 위조가 그리 큰 잘못이면 요양급여 부정수급으로 수 십 억 챙긴 장모는?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서 비리를 파헤치려던 그 열정으로 장모와 아내의 범죄들을 한 번 밝혀보면 어떨까? 증오가 어디로 향하는가를 안다. 애정이 누구에 일방적인가도 알게 된다. 그게 언론이고, 그게 자칭 진보다. 그나마 자칭 진보는 슬쩍 스쳐보기라도 하지, 문재인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다. 벌레는 벌레로 대해야 하는데. 사람이 너무 좋아도 문제다.

원래 외국인에 대한, 특히 자국에 들어와 일하는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혐오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일자리문제일 것이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와서 더 싼 값에 일자리를 쓸어가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사라져야 내 일자리도 늘어난다. 더불어 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 역시 외국인 노동자가 종사하는 일자리와 관계가 있다. 대개는 그 사회에서 잘 하지 않으려는 일이거든.

 

그래서 웃긴다는 것이, 지금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직종들이 내국인들이 아예 하지 않으려 해서 어쩔 수 없이 외국인을 쓰는 곳들이란 것이다. 심지어 임금마저 낮지 않아 최저임금보다 더 쳐 주는데도 내국인은 없고 외국인만 있다. 오죽하면 외국인 노동자 다 내쫓으면 아예 국내 경제가 안돌아간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그런데도 또 어이가 없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 핑계대며 최저임금을 지금보다 더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청년세대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 임금수준에서도 내국인은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외국인 쓰는데, 더구나 그마저도 사람 없다고 최저임금보다 더 주는데 그러고서도 외국인노동자 다 내쫓자?

 

원래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하류인생이란 게 그렇다. 그동안에도 몇 번이나 말했을 것이다. 자기 나라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국내에서 그들이 하는 일이란 대개 그런 일들이란 것이다. 직업적인 차별에, 계급적인 차이까지 더해지면 그것이 다시 외국인에 대한 인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저 일 열심히 잘하는 외국인에 대한 기억보다 또 꼭 그런 외국인에 대한 기억만 강하게 남는다. 그러니 그들은 그런 좀재다. 그럼 그런 존재들에 일 빼앗기기 싫으면 지들이 하던가.

 

최저임금 너무 올라 불만, 근로조건 너무 좋아져서 불만, 쉬는 시간 많아져서 싫고, 자기주장 더 확실하게 할 수 있어서 싫고,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어서 싫다. 실제 일베하는 것 같은 동료직원이 일하다 말고 떠드는 소리다. 그래서 나라 망하고 있다. 외국인들만 좋아지고 있다. 자기가 그 급여 받고 그 근로조건 아래서 혜택받고 일하면서 하는 소리다. 얼마나 웃기는가. 겨우 최저임금 인상된 만큼 돈 받으며 일하면서 사람 없어서 그보다 더 많은 돈 받으며 일하는 외국인을 차별하는 그 태도라는 것이.

 

그래서 지금 청년세대 사이에 떠도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주장들을 의미없다 여기는 것이다. 그냥 싫은 것이다. 그저 자기보다 열등하다 여기고 업수이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외국인 노동자에 의한 범죄발생율이 한국인의 그것에 비해 얼마나 더 높기는 한가. 기억이란 샘플링은 인상적인 특수한 것들만 가려서 남기는 법이다. 한국인의 범죄는 특별할 것이 없다. 누가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해 테러라도 난 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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