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에서 청년들의 중소기업 취업을 장려하게 위해 여러 재정지원정책을 내놓았을 때 정작 20대 남성들은 반발했었다. 나더러 중소기업에 다니라는 것이냐. 중소기업 다니는 놈들만 혜택을 보는 것 아니냐. 그래서 정작 4050 남성들의 생각과 달리 20대 남성들은 그런 지원정책들을 축소하고 폐지했을 때 오히려 환영했었다. 그런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기보다 보다 가치있는 곳에 써야 자신들에게도 좋다. 그럼 더 가치있는 곳은 어디인가?

 

정권이 바뀌고 공무원과 공기업 채용을 줄였을 때도 20대 남성들은 지지를 보냈었다. 사실 이것은 지금 대통령의 공약사항이기도 했었다. 가난한 놈들을 위해 세금을 쓰는 것은 낭비다. 정부가 고용을 책임지려 해서는 안된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자원을 몰아주어야 결국 국가도 발전한다. 한 마디로 삼성이나 현대 같은 곳에 더 퍼주란 것이다. 그러면 자기들도 그런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역시나 정권이 바뀌고 지금 정부에서 우리나라에게 가장 큰 수출시장이었던 중국과 러시아를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정책을 펼쳤을 때도 20대 남성들은 지지를 보냈다. 그래서 윤석열을 지지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외교였다. 중국과 적대하니 잘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잘못이니 러시아에 물건을 팔 필요가 없다. 당연히 수출이 줄고 실적이 떨어지니 기업들도 채용을 안하겠지? 중국과만 적대하면 취직이야 결국 자기 능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타깝다. 같은 20대라도 여성들의 입장은 또 많이 다르다. 20대 여성들은 다수가 민주당의 정책들을 지지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거에서 패한 탓에 20대 남성들과 도매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2찍이 아닌 20대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윤석열이 내놓은 공약들이나 그동안의 주장과 행보들에 대한 판단으로 지지를 보내지 않았음에도 결과적으로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가 지금 상황이다. 그런데도 아직 많은 2찍 20대 남성들은 말한다.

 

노동유연화해서 정규직 마음껏 자를 수 있게 해 주면 내가 그 자리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을 해고하고 그리고 돈 더 벌게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게 해 달라. 중소기업은 돈이 적어 못 가겠다면서 기업들이 더 많은 사람을 뽑을 수 있게 최저임금도 낮추고 주휴수당도 없애라. 알바하러 온 놈이 그러고 있더라. 유시민이 참 옳은 말을 했다. 그래서 안타까운데 안타깝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괜히 도매급으로 안타까워할 수 있다. 그게 더 안타깝다.

어제 차마 옮겨 적는 것조차 너무나 끔찍한 잔학행위가 하마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과연 인간으로서 그럴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인간이기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복잡한 머리와 답답한 가슴을 안고 기사를 읽는데 문득 흥미로운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당사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이 모든 사태의 본질일 터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완전히 밀어버린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가 되는가? 전혀 얼굴도 본 적 없는 아이들의 죽음 때문에 무려 수 백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지역을 초토화하고 사람들을 몰아내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다 말하는 것이다. 그만큼 끔찍한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다는 감정이 그렇게까지 인식을 비약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했다면 마땅히 그 이상 되돌려주는 것이 옳다. 나아가 이런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짓들을 저지른 자들이라면 그 이상의 댓가를 치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 의식을 조금 더 확장해 보자. 그렇게 죽은 아이들이 내 형제고, 내 친구고, 내 이웃이고, 내 자식이다. 그런 죽음들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매순간 지켜봐 왔었다. 그렇다면 그 당사자에 대한 감정이 어떻겠는가?

 

팔레스타인과 식민지 조선을 비교하는데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내몰리고 내쫓긴 세월이 벌써 80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나마 대한제국 황실의 무능으로 인해 큰 무력충돌없이 침탈되었던 조선과 달리 팔레스타인은 전쟁까지 직접 치렀었다. 그래도 이제는 자기 영토고 자기 백성이라고 어찌되었거나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동화시키려 했던 구 일본제국과 전혀 다르게 이스라엘은 또한 철저히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리하여 박해하고 차별했었다. 크게 문제만 없으면 살던 곳에서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살아도 크게 상관치 않았던 것이 식민지 조선이었다면 이스라엘은 아예 팔레스타인인들의 먹고 살 길마저 막아 버렸다. 그 감정이 과연 식민지 조선인들과 같겠는가?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굳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굳이 그래야 할 정도로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이 심화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인 전체가 아닌 일본인이 조선과 조선인에 저지른 행위에 아직은 주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대로 식민지지배가 50년, 60년, 그 이상 이어졌어도 여전히 그럴 수 있었을까? 더구나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자금도 무기도 항상 태부족이었다. AK-47을 현대의 죽창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RPG-7을 알라의 요술봉이라 칭송하며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당장 자신들을 위협하는 일본군과 헌병, 경찰들을 상대로 쏠 한 발의 총알조차 아쉬운 상황이었다. 폭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체코 용병들이 러시아를 탈출하며 흘러들어온 무기가 아니었으면 김좌진조차 청산리에서 화승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기껏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서도 훈련할 총기가 없어서 목총으로 입으로 소리내어 가며 훈련을 받아야 했던 것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처지였다. 그런데 그 귀한 무기를 민간인을 상대로 쓰자고? 돌았냐는 소리가 바로 나온다. 한 마디로 하마스가 저리 민간인을 상대로도 지랄할 수 있는 이유는 무기와 인력이 그만큼 넘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배때지가 부른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하마스처럼 돈과 무기, 그리고 군사훈련까지 지원해주는 우방이 있었다면 어쩌면 역사란 모르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단순비교는 절대 무리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1차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거의 항상 아무 이유라도 있으면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구역을 공격했고, 사람들을 살해했으며, 살던 곳에서 내쫓았다. 그나마 처음 팔레스타인들이 내몰려 살았던 지역조차 날이 갈수록 좁아지며 환경은 열악해지고 그나마 먹고 살 최소한의 방도조차 없이 생존의 위협마저 느껴야 했다. 이렇다 할 산업이랄 것도 없이, 최소한의 인프라조차 없는 채로 하루하루 이스라엘의 군사적 공격을 걱정하며 죽어가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을 지켜봐야 했었다. 그런 세월이 80년이면 과연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감정이 어떠하겠는가? 그렇다고 여타 다른 문명국가들처럼 그로 인한 감정을 문명인의 방식으로 세련되게 표출할 수 있게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꾸란이나 읽고 외울 뿐 그나마 존재하던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교육체계마저 무너진 지 오래다. 당장 이스라엘이 심심하면 백린탄을 터뜨리는 곳이 팔레스타인인들의 학교와 병원이었다. 그래서 야만인 것이다.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분노가 증오라는 감정으로 일그러지도록 문명이란 존재하지 않는 폭력 속에 방치되었으니.

 

아마 그래서 지금 하마스의 행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하고 있을 것이다. 저러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위해서도 저와 같은 행동은 너무나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하마스는 저럼 뒤가 없는 사람처럼 막무가내로 행동하는가? 또한 어째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저같은 인간을 포기한 듯한 과격한 행위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인가? 간단하다. 말했듯 팔레스타인의 대부분 성인들은 그동안의 가혹한 감금생활로 인해 제대로 된 문명화의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계속되는 야만의 폭력 속에서 더욱 증오라는 감정에 매몰되어 버렸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 자신의 원수를 공격할 수 있는 수단과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때 그들의 머릿속에 미래라는, 혹은 장래라고 하는, 또는 전략이나 계획과 같은 거창하고 복잡한 생각이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말 그대로다. 폭주인 것이다. 저들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분풀이, 말 그대로 복수다. 자신들이 그동안 쌓아 왔던 증오를 마음껏 풀어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정작 자신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행위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그로 인해 자신들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 지 전혀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저런 너무나 끔찍한, 팔레스타인을 동정하던 이들마저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행위들이다.

 

지금 팔레스타인 문제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동안 쌓여 온 증오가 너무 크다. 너무나 뿌리깊다. 더구나 그것은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해당되는 부분일 터다. 팔레스타인과 비교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 역시 그동안 적지 않게 당해 온 것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이어진 일방적인 승리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우월감마저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자신은 오로지 피해자라 여기는 팔레스타인의 좌절과 열등감이 자신들은 보다 우월한 존재라 여기는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만난다. 여기에 역사가 더해진다. 이것을 누군가 가운데서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동안 그런 역할을 한 주체가 없었다. 미국도 소련도 중국도 그저 그런 상황을 이용하려 할 뿐 근본적인 해결에는 소극적이었다. 그 결과가 이런 막나가는 상황인 것이다. 오늘 복수만 할 수 있으면 당장 내일 죽더라도 아무 여한이 없다.

 

전혀 상관없는,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대상들의 죽음에 수 백만의 고통과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다. 그런 참혹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죽었으니 팔레스타인 사람 전체가 죽고 고통받는 것도 당연하다. 심지어 당사자도 아닌 제 삼자다. 당사자가 되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 너무나 순수한 감정이 내 감정마저 흔들었다. 어째서 인간은 이토록 슬픈 것인가. 악마라는 단어에 어째서 슬픔이란 뜻이 숨어 있을까?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다. 단지 약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슬프다.

 

더불어 그러면 어째서 하마스는 이스라엘인들 뿐만이 아닌 다른 외국인들마저 무차별로 공격하는가. 과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채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80년을 이어갔다고 생각해 보라. 하긴 일본의 조선합병을 승인해주고 식민지지배를 내내 지지해주었던 미국의 뜻을 따라 다시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잊으려 하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기는 할 터다. 그래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저들이 막나가는 이유를 동의는 못하더라도 왜 그러는가 알 수는 있게 된다. 저들의 행위와 별개로 보다 근본적인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다시 평화롭게 자유로운 삶을 누리며 문명의 세계로 나올 수 있도록. 고타마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출가한 이유일 것이다.

지난 정부 내내 2030, 특히 남성들은 공정을 아예 입에 달고 살다시피 다양한 분야에서 그 공정의 기준을 제시했었다. 그 가운데는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노동현안도 꽤나 중요하게 포함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근로시간을 줄이면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사이에 변별력이 떨어진다. 더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고통받아야 하고 더 노력하는 사람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노동만 하는 사람은 고통받을 수 있도록 최저임금을 낮추고 더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럴 수 있도록 근로시간을 늘려야 한다. 괜히 윤석열이 120시간 노동을 주장했을 때 2030에서 지지율이 올랐던 것이 아니다. 전경련에서도 2030들이 주 69시간근로를 지지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한 바 있었다.

 

시험을 치르지 않았으면 비정규직은 끝까지 비정규직으로 남아야 한다. 시험을 치르지 않고 취업했는데 고용이 보장되거나 정규직에 준하는 복리가 제공되는 것은 공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워낙 일이 힘들어서 하려는 사람이 없어 추천으로 채용한 것을 두고 불공정 운운하는 대가리들이란 것이다. 그런데도 무기직으로 전환해서 고용도 안정화시키고 복리도 충분히 제공하려 했더니 그를 불공정이라고 비난하던 것이 바로 2030이었다. 그러면서 2030들이 하던 말이 있다.

 

"하기 싫으면 말던가."

"그런 조건에 동의하고 일한 것 아니던가."

 

그래서 정작 김용균법에 대해서도 2030들은 비판적이었었다. 김용균법을 아예 무효화하려는 시도를 지지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그마저도 공정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다. 더 위험한 곳에서 더 힘들게 일하며 고통을 받아야 더 노력하려는 동기가 생긴다. 

 

같은 이유로 건강보험도 돈이 더 많은 사람은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하고, 건강보험도 늙어서 놀고먹지 못하게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전기와 가스와 수도를 쓰는 것도 불공정한 것이니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쓸 수 있게 민영화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대중교통도 주로 이용하는 사람이 부담해야지 자기차로 이동하는 사람이 부담해서는 안된다. 오죽하면 그런다.

 

"나랏돈을 없는 사람에게 쓰는 것은 낭비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몰아주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어째서 2030은 정작 한동훈에게는 분노하지 않는가. 오히려 열광하고 있는가. 그래서인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공정이다.

 

다시 말해 2030과, 특히 남성과 관련한 노동이슈에서 괜히 그들을 동정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인국공 사태 당시도 정작 자회사 무기직으로 전환되었을 대상자 다수는 그를 비판하던 2030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2030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다. 더 적은 돈을 받고 더 오랜 시간 일하면서 더 위험하고 더 더럽고 더 힘들게 일할 수 있어야 공정하다. 사회적인 보장과 투자는 불공정하니 각자 알아서 살아남자.

 

그래서 최근 노동이슈들에 대한 2030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지지하는 목소리만 간간히 내 귀에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말한 것이다. 2030 남성들의 공정에 우리가 귀기울일 필요는 없다.

 

나야 앞으로 10년만 더 버티면 되니 크게 상관은 없다. 집도 있고, 저축도 어느 정도 있고, 딸린 식구도 없어서 꽤나 자유롭다. 우리 세대가 시대의 발전이라 여겼던 것들을 아예 부정당하고 있는 지금 과연 굳이 더 싸울 필요가 있을 것인가. 어차피 앞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것은 저들일 것이니.

 

그래서 요즘 정치뉴스를 잘 안 보는 중이다. 크게 분노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저들이 바라는 것이니까. 지난 정부 내내 저들이 분노하던 것이니까. 저들의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이다. 선거에서 진 결과다. 그냥 지켜보려 한다.

주 52시간조차 개념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2찍들이 상당하다. 주 40시간이라면 일 8시간 노동에 법이 정한 4시간당 30분의 휴게시간 포함 하루 9시간을 직장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 여기에 주 52시간이면 하루 평균 2시간 이상에, 결국 하루는 4시간 더 연장근무를 해야 한다. 혹은 주말에도 불려나가 일해야 하는데 해보면 알겠지만 진짜 좆같다. 쉬어야 하는 날인데 불려나가서 특근수당 더 받겠다고 일해야 한다. 결론은 주 52시간일 때 하루 직장에 붙잡혀 지내는 시간이 평균 11시간 이상, 하루는 13시간까지 된다는 것이다. 출퇴근에 편도 30분 이상 걸리면 12시간, 14시간을 일과 관련해서만 써야 한다. 그러면 나머지 12시간, 10시간으로 먹고 자는 것 빼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나도 운동하고 목욕하고 밥먹고 자니, 항상 자는 시간이 부족해서 개고생이다.

 

주 69시간이면 주 5일 근무 기준 여기에서 3시간씩 추가될 것이다. 그냥 하루 14시간씩 일한다고 보면 된다. 나야 집이 가까우니 왕복 넉넉잡고 1시간이지만 집 좀 멀면 자기 시간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9시간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주말에 나가 일해야 하는데 쉬어야 할 주말에까지 일하고 나면 그 후유증이 꽤 남는다. 당연히 그렇게 일하는 만큼 자기 시간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러면 돈 쓸 시간이 없어 돈이 꽤 모이기도 하겠다. 일단 직장 근처 자영업자는 죽어나간다 보는 게 옳다. 여가와 관련한 자영업도 박살이다. 헬스장 주인들 그리 정권교체에 목매더니면 아주 잘 됐다. 주 69시간 되고도 헬스장 가서 운동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그나마 시급제는 그러면 돈 더 받을 수 있으니 낫기는 하다. 지금 다니는 곳에서도 자동화로 근무시간을 줄이네 마네 하는 것 때문에 부양가족 있는 직원들이 꽤 심란한 상황이다. 일을 더 적게 하면 더 적게 받는다. 더구나 줄어드는 임금 대부분이 추가근무수당이 붙은 임금이라 손해가 꽤 크다.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야 몸이 힘들더라도 돈 더 받을 수 있으면 좋다. 하지만 시급제가 아닌 포괄임금제라면 사정은 다르다. 연봉제란 곧 일하는 시간과 상관없이 정해진 연봉만 받을 수 있는 임금제라는 것이다. 잘하면 연봉 받으면서 최저시급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지 모르겠다. 

 

물론 자칭 진보가 바란 결과이기도 하다. 당시에도 민주노총에서 근로시간 단축에 반발이 있었다. 주로 수당으로 임금을 보전받는 대기업 노조에서 일하는 시간이 줄면 수입도 줄어든다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괜히 정의당 당대표 경선에서 최저임금 올려서 일자리 줄이고, 근로시간 줄여서 노동자 수입을 줄였다며 반성하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당연히 민주당에서는 이것을 막으려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 자칭 보수와 자칭 진보와 자라나는 청년세대들 모두가 지지한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말했듯 적자 문제로 인건비 줄이겠다고 일하는 시간을 더 줄이려 발악하는 중이니 상관없고.어차피 주 70시간 이상도 일해봤던 터라. 열심히 하라. 그게 공정이다. 이제 이해한다.

예를 들어 가족 가운데 누군가 죽었다. 그런데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누구인지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멀리 살던 사촌이 죽었는데 그냥 사촌 죽은 것만 알고 추모만 하라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들의 명단을 대중에 공개하는 이유는 그것이 공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로서 함께 추모해야 할 죽음이기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들의 존재를 알리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개개인의 사적인 부분들은 배제한 채 오로지 공적인 존재로써 공동체의 구성원인 그들을 추모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인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공적인 죽음들에 대해 자격을 따지기 시작했다. 희생자들은 선량한가? 남은 유가족들은 한 점 흠결없이 순수한가? 세월호 참사 이후 그 유가족들에 대해 가해진 끔찍할 정도의 인신공격들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그를 이유로 이제는 공적인 죽음에 대한 명단공개조차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시키려 한다. 참사조차도 개인의 죽음이지 공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음 자체만 추모해야지 추모의 대상까지 알 필요는 없다.

 

그래서 개인의 잘못으로 일어난 죽음이었는가? 피해자 자신의 잘못으로 그런 끔찍한 참사가 일어난 것이었는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죽음을 개인의 영역으로, 그를 위해서 익명으로 몰아가려는 것이다. 정부의 책임과 지자체의 책임을 지우고 오로지 죽음 그 자체만 남기기 위해서.

 

그것이 바로 2찍의 정서이기도 할 터다. 공동체를 부정한다. 공동체를 철저히 배제하려 한다. 개인만을 남긴다. 권력을 가진 개인과 가지지 못한 개인이다. 그 위에 자유를 덧씌운다. 그게 바로 자유민주주의다. 

 

아무튼 별 해괴한 논쟁을 다 보게 된다. 이런 논쟁이 가능하다는 자체가 바로 한국 사회의 비루한 민낯이기도 할 것이다. 공적인 죽음을 공적으로 추모하는 것조차 이리 힘들다. 한국인이 정이 많다? 내가 가장 개소리라 여기는 말일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같은 인간을 노예로 부린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집단의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대사회에서 대부분의 농지와 농산물은 지배자 개인의 소유였다. 지배자는 피지배자인 농민을 부려서 농사를 짓고 생산물을 거둔 뒤 이를 개인들에 분배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하고자 했다. 생산력이 부족한 시대였기에 개인에게 농지와 농산물을 소유케 하고 세금을 거두는 것보다 그쪽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세금을 가두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특수한 전사계급을 만들고 그를 위해 생산을 담당할 또다른 신분을 만들었다. 그렇게 게르만의 전사집단은 중세의 봉건귀족이 되었으며, 같은 방식으로 일본의 지자무라이들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다이묘로 성장해갔다. 농민들과 같이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외부의 침략이 있거나 혹은 약탈할 필요가 생기면 스스로 무장하고 선두에 서서 싸움을 주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확보한 지배력이 이후 신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력이 늘고 사회의 구조가 고도화되면서 더이상 그와 같은 분업이 필요없게 되었을 때 당연하게 신분의 질서도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민족의 침략으로 인해 몇 번이나 사회구조가 파괴되었던 중국에서 더이상 이전과 같은 신분제도가 유지되지 못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구성원을 지켜줄 수 있을 때 사회의 구조는 의미를 갖는다. 그를 위해 개인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나 통제, 강제도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이 권력이었다. 그에 동의했기에 심지어 농민이나 천민들조차 그같은 사회적 구조에 순응하며 불이익과 불편을 감수했던 것이었다. 차라리 노예일 때가 더 나았다. 차라리 봉건영주의 지배를 받을 때가 혁명이 일어난 이후보다 더 좋았다. 인간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같은 관성이 곧 사회의 구조이며 신분의 질서이며 또한 보편의 정의이고 가치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리주의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서는 차라리 지금 다수에 대한 억압과 수탈과 지배가 더 현명할 수 있다.

 

그래서 국가가 권력을 가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국가가 아니었다. 단위였다. 마을 하나였고, 읍락 하나였으며, 도시 하나였고, 지역 하나였다. 그러다가 조금씩 그 범위가 넓어지면서 어느새 국가가 되었고, 하나의 영역이 되었고, 나아가 세계가 되고 인류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나라들의 연합인 국제연합은 복잡하고 성가신 절차를 통해서라도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강제력이 없다면 세계니 국제니 인류니 하는 것도 다 의미가 없다. 

 

물론 반대주장도 있다. 개인이 더 소중하다. 그 어떤 당위보다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있는 자들은 마음껏 돈을 쓸 수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는 자들 또한 마음껏 권력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억압하는 권력의 존재란 용납되지 않는다. 자칭 진보가 그동안 코로나 방역과 시민의 안전을 위한 민주당 정부의 통제와 강제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유였다. 더불어 지금 정부에서의 사실상 방임에 가까운 행태에 침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 큰 사고와 피해를 막기 위한 정부 차원의 통제를 비판하던 자칭 진보가 10.29 참사에 대해서는 단지 추모에 대해서만 문제삼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시민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풀어주는 것은 옳다. 단, 비국민인 민주시민들의 촛불집회는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차단하는 것이 정의롭다. 2030의 가치이기도 하다.

 

말한 바 있을 것이다. 2030의 자유는 자유의지주의의 자유다. 공동체도 없고, 당연히 공공도 집단도 사회도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방임의 자유다. 부동산투기도 자유다. 방역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그들은 투쟁한 것이었다. 안전을 위한 통제를 거부하고 스스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그들은 싸워 온 것이었다. 그래서 10.29 참사에도 그들은 정부의 무책임을 비판하기보다 그런 비판을 하는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무리한 요구와 주장을 비판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누가 그들더러 그곳에 가라 했는가. 죽은 건 불쌍하지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2030과 7080은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 근저에 깔린 사고가 상당히 다르다. 7080에게 개인이란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 객체다. 2030에게 개인이란 국가와 분리된 객체다. 둘 다 객체인 것은 같다. 더불어 둘 다 국가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 또한 같다. 국가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도 되는 것 또한 공통된다. 나와 상관만 없다면. 그러니까 내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아니 그래서 노인들은 강요하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어째서 자칭 진보가 10.29 참사에 대해서는 이전 정부와 달리 조용하기만 한가. 정부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묻고자 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경제상황에 대해서도 정부에 어떤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노동자의 권리는 정부와 사용자와의 협상이 아닌 노동자 개인의 각자도생 - 즉 노조의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공동체가 사라진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란 어떤 의미일까? 정의당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끔찍한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 아래에서도 KBS가 조작된 뉴스까지 내보내가며 정부를 비판하는데 올인할 수 있었던 것은 내부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정부에서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초반의 모습에서 오로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공격에만 모든 것을 걸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래서 그리 길지 않았다. 보수정당의 잘못은 철저히 묻고 가리면서, 민주정부와 민주당을 공격하는데는 수구언론과 연합하여 힘을 더했다. 그 결과가 윤석열 정부의 출범이었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최경영이니 홍사훈이니 김원장이니, 아, 그 아저씨들이야 나이도 있고 체면도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참기자가 되어 보겠다며 유튜브를 시작했던 김기화나 정연욱 등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래서 옳다 여겼다면 싸워야 했을 것이고, 부당하다 여겼으면 고발하고 바로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정연욱은 댓읽기에서도 스스로 자백했지만 한동훈이 주도한 검언유착을 묻기 위한 자발적 가짜뉴스를 보도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하고 있었다. 사실상 한 게 아무것도 없다. 보는 사람만 보는 유튜브에서 잘난 척 입만 살아 떠들었을 뿐 정작 실제 자신들의 업무인 취재와 보도란 영역에서 그들은 실제 아무것도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이번 이태원 참사에 대한 보도태도에서도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보도행태를 반성한다며 파업하던 새끼들이 지금도 그때 하던 그대로, 아니 그때보다 더 악랄하게 여론을 호도하려 발악하는 중이다. 그런데 정작 기자란 새끼들은 그저  SNS에 글 몇 줄 쓰고, 유튜브에서 눈물이나 짤 뿐 실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지난 정부에서 여론의 비판에도 당당히 할 말 다 하며 결국 KBS를 자기들 입맛대로 끌고갔던 다른 기자들과 비교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일 것이다. 싸울 용기도 의지도 없이 그저 입만 살았다. 그런데 자기는 기자라고 또 입바른 소리는 하려 한다.

 

하긴 그놈들 뿐일까. 방통위원장 걔 이름이 뭐더라? 씨발 진짜 말만 번드르르한 새끼가 그동안 지난 정부에서 하던 짓거리며 정권 바뀌었다고 하고 있는 짓거리 보면 이쪽 동네인간들인 왜 다 저모양인가 싶을 정도다. 이래서 혁명이란 게 필요한 것인가? 기자는 옳은 것을 알아도 직장이 중요하고, 사회 엘리트는 자신의 지위와 명성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민주당부터 저 꼬라지이니. 내가 댓읽기 저 새끼들 혐오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가장 끔찍한 벌레들이다. 흉악하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생리와 안전, 소속, 인정, 자아실현 다섯단계로 나누었었다. 일단 먹고 자고 입고 싸는 문제가 해결되고, 어디 가서도 죽거나 다칠 일이 없다는 안도가 생겼을 때 자신의 소속을 찾고, 주위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면 놀이는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할까?

 

노래하고 논다고 밥이나 옷이 생기지는 않는다. 춤추고 게임을 한다고 맹수로부터 자신이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롤을 하다 보니 롤 팀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노래 못한다고 타박듣고, 연기 못한다고 놀림거리가 되면서도 끝내 그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다는 행위에 있어 과연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이 옳은 것인가.

 

놀다가 죽었으니 추모할 가치가 없다. 놀러 가서 죽었으니 죽음에 의미를 둘 이유가 없다. 세월호 때도 나온 이야기다. 먹고 살만해지고, 주위에 다른 위험도 없어서 안전도 확보했고, 있을 곳이 있고, 인정도 받게 되었으니 놀기도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목숨걸고 번지점프 하고 스카이다이빙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그들의 안전을 무엇보다 우선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놀이가 된다. 자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만이 아니다. 유희를 즐기는 대부분 동물들이 바로 저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상태에서 놀이라는 것을 즐기기도 하는 것이다. 배고픈 고양이가 집고양이처럼 장난감 가지고 노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천적이 주변에 있는데 마음놓고 놀 수 있는 것은 부모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새끼고양이 정도다. 그런데 놀러 가서 죽었으니 죽어도 싸다. 대한민국이란 고작 그런 정도의 사회인가?

 

더 웃긴 건 일하다가 죽으면 또 일하다 죽었다고 조롱하는 놈들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거의 같은 놈들이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안해서 그런 데서 일하다 죽었다. 학교 다닐 때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그런 정도 조건에서 일하는 것도 적절한 징벌일 수 있다. 그로 인해 기업이 돈 벌고 나라경제가 좋아지만 의미있는 희생일 수 있다. 죽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다가 죽은 것은 그의 자업자득이지 누가 추모할 것이 아니다. 그동안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에 대한 자칭 보수의 일관된 태도였다. 특히 그들과 비슷한 또래의 2030들에게서 그런 반응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현재 한국 2030의 사고방식은 7080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인간을 개 좆으로 여긴다. 자기들이 개좆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모들도 아마 그놈들을 개좆으로 여기며 길렀겠지. 그러니 저런 괴물이 만들어진다. 저런 괴물 언론과 괴물 정부와 괴물 국민들이 만들어진다. 놀다 죽었으니 슬퍼할 이유도 없다.

 

그러라고 나라가 있는 것이다. 마음놓고 놀라고 나라가 있는 것이고, 그럴 수 있도록 경제도 발전시키고, 사회도 고도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전제를 부정한다. 노는 사람들은 안전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누가 안전해야 하는가? 일하는 사람? 같은 입으로 하는 말이란 게 더 역겨워지는 이유다. 더러운 것들이다.

조선 중기 당대의 거유 퇴계 이황과 젊은 학자 기대승 사이에 벌어졌던 사단칠정논쟁은 한 마디로 인간의 이성이란 홀로 존재하고 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실 논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퇴계의 패배가 예정되어 있기도 했었다. 퇴계는 기대승에게 발린 뒤에도 율곡에게도 또 한 차례 발리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이란 자체가 리와 기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고, 유학의 정통이론에서도 리와 기는 구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주희가 성리학을 만든 이유부터 당시 북송에서 엄한 놈들이 불성을 깨닫겠다고 별 개짓거리 하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기에 그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가 상당했다는 것이다. 불성이든 도든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학습과 정진 이후에 다가오는 것이다. 깨달음은 한순간일지라도 그를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그같은 노력의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우주론으로 확장하여 해설하려는 노력이 곧 성리학의 시작이었고, 따라서 리와 기를 구분하는 자체가 성리학의 입장에서 이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이이가 설명한 것이었다. 오로지 바른 정, 바른 기만이 바른 단, 바른 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리얼리티와 리얼은 다른 것이다. 사실적인 것과 사실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합리적이라거나 논리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합리이고 논리인 것은 아니란 뜻이다. 내가 강간을 저질렀다. 아주 어린 여자아이를 무참히 강간하여 다시는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를 합리화하려는 시도는 존재한다. 그리고 때로 꽤 그럴싸한 이유도 만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2대남들이 n번방에 대해 그를 소비한 행위를 스스로 합리화하며 정당화하고는 그 자체로 납득하고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새끼들이 나쁜 새끼들 - 심지어 당한 여자들이 이상한 거지 범죄자가 뭐 잘못이냐는 아주 훌륭하신 분들고 적지 않았다. 그를 위해 동원된 온간 논리와 이유들을 보면 이 또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을까.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논리는 허구다. 실제에 근거하지 않는 합리란 궤변이다. 당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 사실과 실제를 학습하고 확인한다는 자체가 꽤나 지난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결론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만의 사실을 내세운다. 실제를 앞세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타진요였다. 실제의 사실이 있었지만 그들이 선택한 것은 자기들이 자의적으로 선택한 진실이었다. 올바르지 못한 근거에서 과연 올바른 근거가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정의롭지 못한 전제에서 정의가 추구될 수 있는 것이며 도덕적이지 못한 의도에서 도덕이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인가. 타인을 업수이여기는 인간들의 공정이란 결국 자기보다 못한 인간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그동안 2대남들이 주장하던 공정의 실체는 힘없고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더구나 사회적으로 열위에 있는 이들을 정당하게 차별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딜 감히 경비원따위가 정규직을. 주방보조원 따위가 정규직을. 이런 논리에 다수 자칭 진보들까지 동참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도 단지 논리 비슷하고 이성 비슷하다고 그를 논리적이네 합리적이네 이성적이네 개짓거리를 일삼는다.

 

일베가 말하는 팩트의 실체다. 사실을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같은 것을 근거한다. 자기가 사실로 여기고 싶은 것을 전제로 자신이 목적한 바 결론에 이르는 과정만을 추구한다. 그래서 2대남 사이에 지성에 대한 혐오가 넘쳐자는 것이다. 명징이란 단어를 썼다고 별 개소리들 늘어놓는 2대남들이 그리 많았었다. 정의로운 것도 싫고, 도덕적인 것도 싫고, 그런데 그 논리로써 정의와 도덕을 이야기하려 한다. 전에도 말한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하여 논리를 펴는 이상한 현상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스스로 논리적이라 여기기에 그를 위한 이유를 찾아내야 하는데, 사실을 근거하지 못하므로 사실처럼 여겨지는 가상을 사실의 자리에 갖다 놓는다. 그렇게 최선의 가정을 전제로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반대로 최악의 간정을 전제하여 윤석열 정부의 실정을 옹호한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이들이다.

 

하필 윤서인의 유튜브채널이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의해 내 눈에 띄게 된 것이 이유일 것이다. 윤서인이 욕먹은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모든 것이 자기 머릿속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자기 머릿속에서 근거를 만들고 전제를 만들고 그 위에 이유를 붙여 그를 진실처럼 떠들어댄다. 딱 2대남들 하는 짓거리 그대로다. 처음부터 아류였던 것이다. 2대남의 공정과 정의와 상식과 도덕과 윤리란 어디에 있는가. 단지 그들의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비유하자면 성경 몇 줄 읽었다고 그를 근거로 온갖 망상을 떠들어대는 사이비교주 비스무리한 놈들이라 보면 된다. 심지어 성경이라고는 아예 한 줄도 안 읽었음에도 성경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자기만의 교리를 설파하는 놈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의 교리를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긴 2대남들이 그리 신천지를 좋아했었다. 신천지의 아류들이라 할 수 있다. 이만희가 그들의 교주다. 자칭 진보도 마찬가지다. 돈 주면 주인이다. 한심한 것들이다.

저 기회가 나의 기회였다면. 저 놈이 누리는 기회가 나의 기회일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나온 것이 회귀물일 터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게임회귀물, 혹은 시스템 회귀물들.

 

한 번 살았던 과거이기에 남들보다 한 발 앞서서 남들이 누려야 했을 것들을 누린다. 기회를 빼앗고 성취를 빼앗는다. 그럼으로써 남들 위에 서게 된다.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인다. 누구에게는 기회를 나눠주고 누구에게서는 모든 기회를 빼앗는다. 나는 그래도 된다.

 

내가 살면서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가 결국은 사람은 난대로 산다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이면 결국 비슷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타고난 때문이다. 이미 아는 상황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비슷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미 그런 판단을 내려서 망한 인생이라면 결국 언젠가는 비슷한 판단으로 망하게 될 것이란 뜻이다. 특히 회귀물의 주인공들과 같은 병신모지리찌질이들이라면.

 

아마 그래서 더 이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병신이니까. 내가 모지리니까. 내가 찌질이니까. 그러니까 나도 회귀하면 저렇게 소설속 주인공들처럼 기회를 찾아 잘 나갈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한심한 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더 뛰어나질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기회를 탐내는 것이다. 여성의 기회를 욕심내고, 장애인의 기회를 욕심내고, 국가유공자의 기회를 욕심내고, 부모세대의 기회를 욕심낸다.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아 내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기회를 빼앗는데 열중한다. 그러면 그것들이 내 기회가 될 줄 알고. 그를 위해 연대한 대상이 사실상 기득권의 끝판인 60대라는 게 우습다면 우스울 뿐. 그래서 해 주고 싶은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아주 오래전 읽은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그렇게 억울해 하더란다. 다시 살아나게 되면 이렇게는 안 살 거라고. 그래서 염라대왕이 다시 살려주었더니 전혀 달라지지 않은 채 똑같은 삶을 살다가 다시 죽게 되었다. 

 

타고난 지능이 다르고, 성격이나 성향이 다르고, 느끼는 감정도 서로 다른 것이다. 하물며 평생을 병신찌질이로 살던 놈이 한 순간에 달라질 수 있을까? 그냥 네가 그토록 한심한 주제인 것은 원래 너란 인간이 한심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20대 남성들이 주장하는 공정의 실체다. 새삼 기회가 주어진다고 별다른 것이 없으므로 타고난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기회를 빼앗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자신은 그 빼앗은 기회를 누리려 한다. 자기는 단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요즘 모든 것이 시들해지며 장르소설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알게 되었다. 2대남은 어째서 병신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기회를 빼앗으면 그 기회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누리는 기회는 원래 내가 누렸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4050 기성세대의 현실은 자신의 기회가 되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2대남 늬들을은 왜 그 모양 그꼬라지인가.

 

그래서 깽판까지 치는 놈들을 보면서는 우습지조차 않게 된다. 이따위 소설이 인기를 얻고 심지어 추천까지 받는다. 주 소비층을 보면 그래서 더 어이없을 뿐이다. 역겨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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