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운데 사회주의 계열이 상당했던 이유는 사실 별 것 아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식민지 조선의 독립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들이 사회주의자들 뿐이었다. 심지어 소련의 경우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계급해방의 연장에서 제국주의의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는 약소민족들을 해방시키겠다며 적극적으로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의 호치민도 이때 소련으로 가서 스탈린과 만나고 있었다.


고립무원이었다. 지금 서방이라 불리우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야 당장 자신들부터 식민지배를 하던 입장이었으니 조선의 독립투쟁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중국은 청이 망하고 여러 군벌이 난립하며 당장 자신들부터 일본의 침탈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었다. 그래서 한 편으로 항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의기투합하여 중국공산당과 손잡은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일단 중국공산당을 도와서 일본을 무찌르고 나아가 조선과 조선인을 해방시키겠다. 바로 같은 목적에서 일본의 사회주의자들도 자국의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해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던 조선의 민중과 연대하려 했었다. 이른바 국제사회주의라는 것일 터다. 자본가와 제국주의라는 압제자들과 싸우려는 자신들은 오로지 동지고 형제들이다. 다만 일본의 사회주의는 해방도 되기 전에 일본이 고도로 군국주의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일본 국내에서도 사라지고 있었다.


더구나 만주침략이 시작되고 일본제국주의의 지배가 더욱 강화되며 식민지 조선 내부의 상황은 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나마 사회주의자들은 이념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마지막까지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을 유린하고 서구열강을 패배시키며 동남아시아까지 석권한 일본제국주의의 위세에 눌리며 조금씩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자신들만의 힘으로 유럽의 열강들마저 패배시키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무찌르고 독립을 이룰 수 없을 테니 그런 일본에 협력함으로써 최소한의 자치라도 얻어내자. 미국과 유럽의 열강들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일본의 힘을 배우고 일본의 지배 아래서 조선인의 자치와 발전을 이루도록 하자. 사실 일제강점기 말 친일로 전향한 이들에 대해서는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부분이 있기는 하다. 어느 쪽이든 현실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을 위한 최선인가 고민한 결과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일제강점기 말 독립운동을 하려면 사회주의자여야 했고 사회주의자들만이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는 지금 시각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나마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거의가 친일로 돌아섰거나 최소한 타협노선을 걷고 있었기에 사실상 국내에 독립운동이라고는 좌익계열밖에 남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오죽하면 임시정부가 귀국하며 당시 조선 국내에 남았던 이들은 모두 친일파라며 일갈하고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좌익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겠다 말하고 있으니. 그러면 좌익계열을 제외하고 당시 식민지 조선에 남았던 독립운동가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이며,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틀어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까 뉴라이트에서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본제국주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며 옹호론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을 빼면 조선인들은 그다지 식민지배에 항거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니까.


해방 이후 노선투쟁은 노선투쟁이고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이다. 일단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이루고 난 뒤에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배제한 바로 그 해방까지의 행적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여운형은 온전한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 단지 그나마 당시 조선에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사회주의자들 밖에 없었기에 그들과 연대해서 하루빨리 조선의 안정을 되찾고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시도들까지 깡그리 부정한다면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역사에 순종과 타협 말고 무엇이 남겠는가 하는 것이다.


좌파라서 안된다? 그 좌파들이 독립운동을 했으니까. 빨갱이 때려잡던 우익 우국지사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에 굴종하거나 혹은 타협하며 조선의 인민들을 약탈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 빨갱이 때려잡던 손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까지 때려잡고 있었다. 그래서 인정하기 싫은 것일 게다. 자신들의 정체성은 빨갱이 때려잡던 그 우국지사들에 있다. 나경원의 발언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다. 한국사회의 뿌리는 좌파 독립운동가가 아닌 그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앞잡이들에게 있다.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역사다.


정말 뭣같은 것이다. 그래도 미국이든 유럽이든 서방의 열강들이 우리의 독립을 도왔었다면. 심지어 어느 개신교인은 일제의 지배가 있었기에 개신교가 한국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며 긍정하기도 한다. 차라리 개신교 있는 일제의 지배가 개신교 없는 독립보다 낫다. 현실이 그랬었다.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았고 단지 사회주의자들만이 우리를 도우려 했었다. 모두가 깡그리 잊으려 하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신화들을 보더라도 한반도의 왕조는 이주민에 의해 세워진 경우가 많았다. 당장 마한만 하더라도 위만에 쫓겨온 고조선의 준왕이 세웠다 하고, 백제는 졸본의 온조가 유리왕을 피해 내려와 세운 나라였다. 가야의 신화는 북방계인 김알지와 해양문명인 허황옥과의 결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사로육촌은 원래 조선의 유민이라 일컫고 있었다. 그러면 과연 이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한반도에 살았었을까?


일본의 역사는 야요이인이 죠몽인을 정복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야요이인의 뿌리는 한반도에 있다. 그런데 정작 일본어와 한국어가 계통적으로 갈라진 시기는 그보다 더 오래다고 말한다. 즉 한반도에서 건너가 일본을 정복한 야요이인과 지금의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한국인의 원형은 기존에 한반도에 거주하던 선주민을 이주민들이 정복하거나 혹은 결합하여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이들 야요이인이야 말로 한반도의 선주민이라 보아도 옳지 않겠는가.


상당히 이른 시대에 특히 영산강 일대를 중심으로 발견되는 일본과 연관된 유적이나 유물들도 그런 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대에도 아직 한반도의 선주민들은 주로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어떤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었다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라는 단어는 그렇게 설명이 가능하다.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던 선주민들도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워 마한이나 변한 등에 속해 있었다면 백제와 가야가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이질적 집단이었던 신라는 초기부터 끊임없이 선주민인 왜와 갈등을 빚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임나일본부란 한반도 주류세력에 의한 한반도 정복사의 한 과정이라 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원래 한반도에 선주민이 있었고, 그들이 일본까지 일찌감치 진출했으며, 그들 사이에 바다를 사이에 둔 네트워크도 남아있었지만, 결국 이주민인 고구려, 백제, 신라에 의해 하나하나 정복당하고 멸망당하며 아예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완성지은 것이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멸망이었다. 굳이 일본이 수만의 구원군을 보내 백제를 도우려 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다. 사료를 기준으로 분명 한반도 남부에 임나는 있었다. 바로 그 임나에 가야와 백제마저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 임나는 무엇인가. 일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반도 왜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었다. 왜가 한반도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쫓겨간 것이다. 원래 역사란 자체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니. 한반도인의 조상은 저 멀리 바이칼호에서 왔다고 하지 않던가. 그냥 생각이다.

우습게도 인류의 문명은 바로 그 자극적인 맛을 쫓으며 번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유럽이 위험을 무릎쓰고 먼 바다로 나가며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이유와 같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사츠마가 류큐를 침략하면서 설탕이 대량으고 공급되자 비로소 음식들이 달아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그냥 짜기만 했다.


지금이야 워낙 이런저런 양념들이 넘쳐나니 차라리 아무것도 치거나 바르지 않은 순수한 재료의 맛이 최고라 여기는 것이지 이전에는 아니었다. 하다못해 소금이라도 쳐야 했고, 돈이라도 조금 있으면 진귀한 향신료 정도는 듬뿍 발라주어야 했었다. 어떻게하면 기존의 재료로 더 새롭고 더 맛있는 맛을 만들 수 있을까 끊임없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그저 고기를 구워 소금에 찍어먹던 고기구이가 갖은 양념에 재워 굽는 불고기로 발전한 것이다. 그냥 굽는 것은 그대로 달고 짠 간장양념에 굽는 것은 또 그대로 그렇게 인류는 색다른 맛을 추구해 왔었다.


물론 아예 재료의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달고 짜고 맵기만 한 음식들이 문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또한 원래 좋은 재료를 쓸 수 없는 환경에서 보다 쉽고 값싸게 음식을 만들어 공급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달한 일종의 편법들이었다. 어디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문명의 차이라기보다는 그냥 문명 안에서도 환경의 차이, 혹은 계급의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 그마저도 소금과 설탕과 고추가루가 싼값에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니 역시 문명의 발달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가난하고 문명이 뒤떨어진 사회에서는 짜고 달게 먹으려 해도 그럴만한 소금도 설탕도 구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아무튼 미식으로 유명한 나라들치고 감미료와 향신료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요리들도 다양한 것이다. 언제 어떤 재료를 어떤 감미료와 향신료를 써서 더 맛있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궁리와 고민이 그 많은 요리들을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쇠고기의 맛은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쇠고기 하나로 그 많은 맛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다만 그렇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맛을 해칠 정도로 달고 짜고 맵게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한 마디로 어찌되었거나 맛있다 여기기에 음식들도 달고 짜고 맵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세뇌됐다고 말하기에는 그래서 떡볶이를 맛있게 여기는 대중의 입맛은 솔직하다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달고 짜고 맵다. 물엿을 아예 색이 변하도록 넣고, 거기에 소금과 고추가루도 듬뿍 쓴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그나마 맛이 순하다는 간장떡볶이도 짠 간장에 설탕을 듬뿍 넣어도 달고 짜게 만든다. 결국 그렇게 만들고 소비되는 이유는 그것을 사람들이 맛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소한 매운맛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사람들은 떡 특유의 식감에만 적응하면 문화권을 떠나서 대부분 맛있게 여기기도 한다. 외국인에게 인기있는 한국음식들도 대개 그런 것들이다.


순수한 재료의 맛을 최고로 추구하는 일본만화를 보면서 한 번 써보고 싶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 건 단지 예전 일본에는 그만큼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는 재료 자체가 부족했던 때문 아닌가. 우리나라 음식도 원래는 매우 심심했었다. 소금도 귀했고, 설탕도, 고추가루도 아직 비싸기만 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추운 북쪽지방에서는 남쪽에서보다 더 심심한 음식을 즐겼다. 그래서 북쪽 지방의 음식이 남쪽 지방의 음식보다 더 발달해 있는가.


삼계탕에도 소금을 넣어 먹지 않는다. 설렁탕도 소금 없이 그 자체의 심심한 맛을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아무데서나 설렁탕을 사먹지 않는다. 그저 달고 짜고 맵기만 한 음식은 나도 혐오한다. 그러나 그건 그것 이건 이것. 그렇다고 재료의 맛을 해쳤다 할 수 있는가. 문명은 더더욱. 우스운 것이다.

멀리 가려 했더니 벌써 몇 년 전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개봉된 적 있었다. 원래는 '북두의 권'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아니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무협소설은 어떨까? 중앙정부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며 정파니 사파니 무림문파들이 제각각 무력을 소유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최선의 전쟁보다 최악의 평화가 차라리 낫다. 아무리 숭고한 이상을 위한 전쟁이라도 결국 전쟁이란 자체가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다. 내가 죽을 수도 있고, 내가 누군가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 그런 공포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최소한 김정은의 치세라도 김정은 한 놈만 조심하면 되는 것과 달리 오늘은 이편이 이겼다가 내일 저편이 이기면 그때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바로 국가가 폭력을 독점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국가 말고 어느 누구도 개인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된다. 개인의 인신과 재산에 대해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그를 위해서 국가는 더 강력한 폭력을 독점하지 않으면 안된다. 군대를 보유하고 경찰력을 동원하고 그럼으로써 국가 이외의 폭력이 국가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제약한다. 물론 그 국가가 더 나쁜놈일수도 있지만 말했듯 이놈저놈 칼들고 총든 놈들을 걱정하기보다 국가 하나만 조심하면 그래도 안전하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 당장 사악한 독재자를 몰아냈더니 군벌들이 서로 내전을 벌이고 있는 실제의 현실들을 돌아보라. 그래서 내전을 치르고 있는 지금이 독재자의 치하보다 더 나은가.


경제에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은 다름아닌 결제수단이자 가치의 수단인 화폐일 것이다. 누가 화폐를 독점하고 발행할 것인가에 따라 경제 전반이 크게 좌우되게 된다. 어느 나라의 경우처럼 아무 생각없이 화폐만 찍어냈다가는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국민들의 일상마저 위협하게 된다. 그렇다고 조선처럼 아예 화폐를 발행하지 않으면 화폐를 구하기 힘들어지며 역시 경제에 압박이 가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화폐를 독점하고 차익을 노리려는 놈들마저 있다.당장 흥선대원군부터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라며 당백전을 발행하고는 전작 세금은 상평통보만으로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그나마 권력자들은 그런 실정이 계속되면 반발이 일고 마침내 권력을 잃고 쫓겨나기라도 한다. 그런데 단지 돈만이 목적인 개인이라면 어떨까?


개인이 발행권을 갖는다. 개인이 임의로 화폐를 만들고 찍어내어 시장에 유통시킬 수 있다. 어떤 화폐를 어느 정도의 가치로 유통시킬 것인가도 개인이 정할 수 있다. 당연히 누가 얼만큼 어떻게 가질 것인가도 개인이 정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얼만큼 화폐를 발행할 것인가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다. 단지 화폐발행의 국가독점을 몇몇 개인의 독점으로 바꿀 뿐이다. 그나마 국가는 국민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가지지만 개인이 다른 개인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니 블록체인의 전제가 타인의 선의에 기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폐를 발행하는 주체들의 선의는 어떻게 믿어야 할까? 100명이 합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10명이서 서로 이해를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적 시간에 비례해서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책임과 권한 역시 강화되어 온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세계제국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언젠가 세계 역시 하나의 정치체로 묶이게 될 것이다. 단일한 통화와 단일한 규범과 단일한 권력구조를 가지고 보편적인 원리와 가치 아래 지배되게 될 것이다. 중동의 인권과 미국의 인권이 다르다. 유럽의 정의와 아프리카의 정의가 다르다. 그 혼란으로 인한 비용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 아래 하나가 되어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를 뻘로 배운 것인지. 화폐의 역사도 알지 못하면서 화폐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최초의 화폐는 국가가 발행한 것이 아니다. 최초의 화폐는 개인과 개인이 약속한 가치있는 재화였었다. 화폐를 국가로부터 독립시킨다. 화폐를 중앙으로부터 분리한다. 무슨 말들을 하는 것인지. 어이없다.

요즘은 모르겠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물렵 국사교과서에서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이점으로 중국과의 교통을 꼽았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해상으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혹은 한강 하구의 소금생산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이야 말로 전국 최고의 곡창이었다는 사실을.


아닐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이 바로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라는 한반도의 동서를 크게 가로지르는 두 개의 강이 만나 하나가 된 강이었다. 당장 지금도 완만한 산자락 가운데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 일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큰 도시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강남은 아예 산도 거의 없이 허허벌판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겠는가.


호남평야의 개간이 완료된 것이 조선 전기부터다. 조선전기까지도 무성한 숲과 늪지를 개간하고 위협이 되는 맹수를 사냥하는 일에 군사가 동원되고 있었다. 북한에서도 곡창인 황해평야의 개간 역시 조선 중기에 완료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한반도의 곡창은 어디였을까? 괜히 조선에서 경기도를 관료들에게 지급할 과전의 대상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다. 호남평야의 개간이 끝나기 전까지 한강유역이야 말로 가장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도 그래서 한강유역을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었고. 전근대사회에서 인구는 곧 국력이고, 그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것은 풍부한 식량생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 말도 안되는 소리다. 서울에서 농사를? 그런데 그게 불과 몇 십 년 전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한강 근처에 제법 늪지도 있었고 농사짓는 곳도 있었다. 곳곳에 비닐하우스며 논도 제법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도시가 되어 있는 백마, 일산, 광명, 안양 등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은 그 무렵 가보지 못해 모르겠다. 하여튼 부곡역만 해도 흔한 가게 하나 없이 덩그러니 역만 있던 곳이었으니. 


말하자면 지금 한반도의 식량생산은 호남평야에 비견할만한 중요한 곡창지대인 경기도를 싹 갈아엎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거다. 특히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너무 개발이 되어 농경지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생산된 식량을로 북쪽까지 먹여살리고 했었던 것인데. 조선시대에도 황해도 북쪽은 농사가 힘들어 항상 식량난을 겪곤 하던 지역이었다. 그나마 황해도와 평양 주변에서 제법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뿐.


그냥 서울의 옛날 사진을 보다가 떠올라 끄적여 봤다. 백제며 고려며 조선이 괜히 경기도에 도읍을 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고려말 남쪽지방이 온통 왜구의 약탈로 조세조차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도 개경의 조정이 버틸 수 있었던 근거였다. 최소한 바로 가까운 경기도 일대는 그래도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테니. 농사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산업혁명의 못된 유산 가운데 하나다. 아무튼.

플라톤이 주장한 불완전한 신 데미우르고스는 사실 그리스의 신들이었는지 모른다. 그리스의 신들은 불멸일지는 몰라도 전지하거나 전능하지 못했다.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완전하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의 세계가 넓어지고 사고가 깊어질수록 그같은 불완전한 자신들의 신들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축적되어갔을 것이다. 만일 진짜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들이 아는 신들과 달리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일 것이다.


아마 시작은 오르페우스였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오르페우스를 한때 지중해세계에 유행했던 미스테리아, 즉 비의주의의 시조로 여기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아다시피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사후세계까지 찾아갔던 인물로 유명하다. 오르페우스 자기가 그렇게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죽어서 직접 지하로 내려가 죽은 이들의 왕을 만나 아내를 구해서 나왔다. 그러나 마지막에 죽은 자들의 왕 하데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아내를 지하세계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당시까지 그리스인들에게 사후세계란 그저 막연한 관념으로만 존재했는지 모른다. 원래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에서도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은 매우 막연했었다. 자신들의 신을 신실하게 믿으면 죽은 뒤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지옥을 뜻하는 영어단어인 '헬'은 그래서 북유럽신화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르페우스는 죽은 뒤에도 살아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주장하고 있었다. 지상에서의 삶이 다하고 난 뒤에도 지하세계에서의 삶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 이집트 문명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라 일컬어지는 피타고라스 역시 이집트에서 신의 비밀스런 지식으로 여겨지던 수학을 배우고 그를 기초로 자신의 학파를 만들고 있었다. 철학이라는 단어 자체도 원래 피태고라스가 처음으로 만들어 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인간은 죽지만 죽은 뒤에도 영혼은 남아있어 언젠가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와 부활하게 된다.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다. 육신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불멸로 남아 언젠가 있을 부활을 대비하게 된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언제고 영혼이 다시 돌아와 깃들 수 있도록 살아서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려 막대한 비용과 수고를 들여 미이라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신들이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라면 인간의 영혼 역시 신과 같이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다. 그렇다면 인간과 신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조상신숭배와 만나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헤라클레스가 신이 되는 과정에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육신을 불사르고 불멸의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가 신들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는 이후 영지주의에서 주장하는 필멸의 육신과 불멸의 영혼이라는 대비와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 의도를 짐작케 한다. 인간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으며 그것은 신과 같은 신성을 가지는 진정한 자신이므로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 신성에 이를 수 있는가.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들이 보고 듣고 배워 온 신화들은 모두 거짓이다. 신들에 대한 모든 지식은 가짜다. 그래서 거짓신들을 대신할 새로운 신을 찾으려 한다. 이데아다. 그리고 그 이데아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이다. 피타고라스가 시작했고 이후 많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동참한 일종의 종교운동이었다.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 이성이란 그동안 자신들이 믿어온 거짓신들을 대신할 진짜 신의 이름이었다. 이후 그리스도교가 지중해를 지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스 철학이 추구했던 이성과 진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대신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며 오만하게 외쳤던 이제 비로소 완전한 진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선언은 그 연장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이야 말로 전지하고 전능하며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그리스인들으 추구했던 진짜 신 그 자체였다. 아니 거꾸로 그리스도교의 신 자체가 그같은 그리스 철학자에게서 시작된 완전한 진리와 그를 구현한 절대의 존재에 대한 추구를 반영한 존재였다. 진짜 신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그래서 그리스 철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교의 야훼야 말로 자신들이 찾던 진짜 신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신을 믿느냐가 아니었다. 역시나 불멸의 존재인 자신들의 영혼을 보다 신에 가깝게 끌어올릴 방법과 대상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들은 상징으로 여겼다.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로 인간세계에 내려온 것 역시 그를 위한 상징으로 여겼었다. 디오니소스가 인간에게서 태어나 인간의 육신을 죽이고 지고한 신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오리시스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신이 되었던 것처럼. 그것은 지중해 세계에서는 당시 이미 보편적인 믿음이기도 했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까지 원정하며 자연스럽게 섞여들어온 인도의 사상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몸으로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정확히 인간의 몸을 버리고 불멸의 영혼을 통해 진정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단순한 신앙의 대상인 야훼는 그런 점에서 그들의 신이 될 수 없었다. 진짜 신은 자신들을 불멸로 이끌 무언가여야 했다. 여전히 진리와 지식은 그들에게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괜히 영지주의를 오히려 이교도보다 더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를 지탱하는 근본을 그들은 철저히 부정하고 폄훼한다.


아무튼 인간이 필멸의 존재로써 불멸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집트의 사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의 비밀을 알면 된다. 신들만이 가진 진정한 세계의 지식을 깨달아 알면 된다. 그래서 영지주의다. 정확히 영지를 뜻하는 그노시스는 지식 그 자체를 뜻한다. 세계는 수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는 원자라는 물질의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잰다. 지구의 지름을 계산해낸다. 그럼으로써 세계의 지식을 쌓으면 신들만이 아는 진정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세계의 지식과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이야 말로 진정한 신의 진리에 다가가는 길인 것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을 과학이라는 신을 섬기는 제사장이라 일컫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적확한 지적인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이신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짜 신은 구체적인 이름과 형상이 아닌 세계의 진리 안에 존재한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신의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이다.


유럽문명이 세계문명을 지배하게 된 이유인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엄밀하게 세계의 구성요소를 찾아내고 그 법칙과 원리를 밝히는 과정은 그를 계승한 유럽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했다. 사실 대부분 거의 쓸데없는 노력들이었다. 그렇게 알아낸 지식들이 실제 현실에서 쓸모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엄숙하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었다. 아무 의미도 없고 크게 이익이 되는 것이 없어도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을 밝히고 진리를 쫓는다. 그 자체가 어쩌면 유럽인들이 진정으로 섬겼던 진짜 신이었는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째서 유럽에서 과학문명이 유독 크게 발달할 수 있었을까? 사실 유럽만이 아니다. 천문학과 수학의 지식은 많은 문명에서 신과 관련된 신성한 지식으로 비밀스럽게 전수되고 있었다. 그것을 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세속권력의 권위를 담보하는 중요한 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다만 더 철두철미하고 더 엄밀했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처럼. 근대 유럽문명의 진정한 뿌리는 이집트라는 것일까? 그냥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1. 그리스 왕정이 무너진 이유가 있었다. 원래 신들이 하는 짓거리란 당시 권력자가 하던 짓거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신이란 지고의 권위와 권능을 가진 존재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인 그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가 상상할 때 결국 참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에서 역시 막강한 권위와 권력을 가진 권력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도 최고신이라 할 수 있는 하늘의 신 옥황상제의 모습을 보면 가장 이상적인 당시 중국 황제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옥황상제가 머무는 천상의 모습부터가 당시 중국 황궁 자체였었다.


하여튼 이런 막장이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혈족살인에, 근친상간에, 자기들끼리만 그러는 것도 아니라 인간세계에서까지 온갖 해악을 미치고 있다. 당장 제우스만도 그나마 유혹에 성공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가 유인에 납치에 결국은 강간이었다. 제우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포세이돈도 만만치 않았고, 헤르메스를 비롯 그리스의 신들이 세상에 남긴 수많은 사생아들이 그렇게 신들의 강제와 억압에 의해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신화 후반 신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인 영웅들의 이야기로 넘어왔을 때 더 확실해진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영웅 헤라클레스가 오이칼리아를 멸망시키고 이올레를 납치해 오는 장면이나,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아마존의 여왕을 납치하고 아직 어린 나이였던 헬레네를 납치했다가 도리어 아테네가 함락당한 이야기등은 당시 그리스 지배층의 파렴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하긴 도덕이란 자체가 고도의 사유체계이고 보면 고대의 군주들이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기는 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여신 아테네보다 수를 잘 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거미가 되었고, 미다스는 아폴론이 아닌 판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귀가 당나귀귀로 변했었다. 이같은 신들의 막장성이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한 이유가 되고 있기도 했었다.


2. 고대 그리스의 왕가는 세습보다는 추대가 더 흔했고, 그럼에도 대부분 왕가가 서로 인척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당장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가멤논만 하더라도 자신이 미케네의 왕이면서 동생인 메넬라오스가 스파르타의 왕이기도 했었다. 오이디푸스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만 보더라도 반드시 혈연을 매개로 왕위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영웅전설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인 반면, 이들 영웅들 역시 씨줄과 날줄로 서로 혈연으로 엮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당시 그리스 지배층의 모습을 어렴풋 유추해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미니멀한 중세 유럽의 귀족사회나 일본의 무사계급과 닮지 않았을까. 그런 체계없는 계승 또한 고대 그리스의 권력이 보여주는 파렴치함의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왕위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인류역사에서 그것은 상식이었다.


3. 고대 그리스에서 양치기와 어부는 지배층에 속한 관직에 더 가까웠다. 하긴 고대사회에서 모든 생산수단은 전제군주의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관리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특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오이디푸스의 전설만 하더라도 아버지인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내다버릴 때 그 명령을 따른 것도 양치기였었고, 그 양치기가 버린 오이디푸스를 주워서 코린토스의 왕 폴뤼보스에게 데려간 것도 바로 양치기였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 역시 양치기로 있다가 여신들의 다툼의 심판을 맡고 헬레나를 아내로 얻고 있었다. 한 편 바다에 버려진 페르세우스 모자를 구한 것이 세리포스의 어부 딕티스였는데, 바로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티스의 동생이었었다. 페르세우스에 의해 폴리덱티스가 돌이 되자 뒤를 이어 왕이 되기도 한다. 


결국 양과 소는 당시 군주들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배 또한 값비싼 수단이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당시 사회규모에서 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후대의 고대화된 사회의 군주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고대사회에서는 토지 역시 군주의 소유로써 농민들은 단지 군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그로부터 필요한 식량을 얻을 뿐인 존재였었다. 농사를 짓는 씨앗까지도 그래서 모두 군주가 제공하고 있었다. 보이오티아의 왕비 이노가 전왕비인 네펠레의 자식들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밀 때 썼던 계략 가운데 하나가 농민들에게 줄 씨앗을 익혀서 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익힌 씨앗에서 싹이 틀리 없으므로 큰 흉년이 들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왕은 자신의 자식들을 신의 제물로 바쳐야 했었다. 아직 생산력이 부족하던 시대의 토지란 사유재산으로서는 너무 가치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4. 싸움에서 진 적의 성기를 자르는 것은 의외로 흔한 일이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전쟁에서도 수많은 포로들이 거세된 바 있었고, 가깝게는 원명교체기에 명군에 의해 원과 그에 협력하던 이민족포로들에 대한 광범위한 거세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화가 그렇게 운남에서 포로가 되어 거세당한 뒤 환관이 되었다 영락제의 측근이 된 경우였다. 처음에는 우라노스나 크로노스가 각각 아들들에게 찬탈당하고 거세까지 당한 것이 어떤 신화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궁리도 했었었다. 하지만 세계사를 보거나 지중해세계의 역사를 보았을 때 그냥 거세는 패자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에 지나지 않았다. 성기를 제거했으므로 더이상 후손을 낳을 수도 없고 남성으로써 권위를 세울수도 없다. 개인에게나 혹은 집단에게나 심각한 위협이자 모욕이다. 한 마디로 씨를 말리겠다는 말의 적극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5. 문득 석탈해 신화를 떠올릴게 되었다. 석탈해도 태어났을 때 알이었던 탓에 상자에 담겨져 바다에 버려진 바 있었다. 페르세우스 역시 어머니 다나에와 더불어 상자에 담겨 바다에 던져지고 있었다. 사생아로 태어났던 때문이었다. 비슷한 예가 신화에서는 몇 더 있는데 하나같이 결혼하지 않은 채 임신했거나 출산까지 한 경우였었다. 부정한 출생이기에 차마 산모와 아이를 죽이지는 못하고 신의 뜻에 맡겨 바다에 띄워 보낸 것은 아닐까. 생부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 신을 개입시키는 것은 그가 신에 의해서만 살 수 있는 운명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죽었어야 할 운명에서 끝내 살아났으므로 그것은 신의 뜻이고 그들은 신의 자식들이다. 그냥 망상.


6. 포세이돈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괴물에 범죄자들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바다가 주는 이미지였을 것이다. 당시 미케네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리스는 또한 뛰어난 해양문명이었음에도 여전히 바다는 정복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이 밀어닥치는 폭풍과 비바람, 높은 파도, 무엇보다 바다를 무대로 누비는 해적들까지. 테세우스가 살해한 스키론 역시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한 편으로 살라미스의 임금 키클레우스의 딸과 결혼한 사이이기도 했는데, 심지어 전승에 따라서는 테세우스와 사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맨 위와 이어진다. 하긴 불과 얼마전까지도 지역유지에 의해 주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여행자에 대한 범죄가 저질러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국사회에서도 있었다. 가족의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러 가는 차를 막아서고 돈을 갈취한 것이 그 마을 이장이었었다. 바다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한다.


7. 얼마전 다시 그리스신화를 읽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읽으니 확실히 그 맛이 전과는 전혀 다르다. 그냥 신들이 신들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신화에 녹아든 역사 이전 그리스 사회의 모습에도 눈길이 가게 된다. 무엇보다 어째서 고대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했는가 그 이유를 더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가짜 세계이고 가짜 신이다. 플라톤의 그 외침은 진리는 현실의 맹목적인 신앙이 아닌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감춰진 진짜에 있다. 영지주의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좀 먼 이야기다.

생산능력이 떨어졌던 전근대사회에서 한해걷이만으로 한 해를 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오히려 좁은데 아직 기술까지 부족해서 단위면적에서 생산되는 양도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에 세금이다 뭐다 다 떼어가고 나면 남은 것만으로 - 더구나 부양가족까지 먹여살리려면 결국 다른 수단을 빌지 않으면 안되었다. 참고로 이것은 한반도만의 사정이 아닌 거의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던 현실이었다.


결국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식량이 떨어질 때 쯤 되면 그래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대신할 수 있는 식량을 찾아 산으로 들로 헤메 돌아다녀야 했었다. 밤과 도토리는 그렇게 일찍부터 한반도인들에게 곡물을 대신할 수 있는 식량자원으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이마저도 없을 때는 산에 올라가 덩어리진 풀뿌리(草根)를 캐어 찌거나 나무의 여린 속껍질(木皮)을 벗겨 죽을 쑤어 먹기도 했었다. 그리고 함께 흔히 자주 먹었던 것이 신선들이 먹었다는 솔잎이었다. 솔잎에 콩가루로 만든 경단을 함께 먹는 것은 원래 부황을 막기 위한 민간요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나무껍질이나 솔잎을 너무 먹으면 섬유질이 뭉쳐 배변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항문에 열상이 생기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었다. 아예 섬유질이 뭉쳐서 항문을 막은 탓에 그것을 긁어내는 일도 흔한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서 상식문제. 여름 내내 솔잎을 먹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소나무껍질에 솔잎으로 연명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쌀을 수확해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수확을 거두었으니 천지신명께 떡을 지어 바쳐 올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연상될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여름내 먹건 솔잎을 얹어 밥을 짓고 떡을 찜으로써 그동안 덕분에 자신이 먹고 산 것에 대한 고마움에 더해 다시는 먹고 싶지 않다는 원망과 작별을 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까지 나를 살린 것은 솔잎이지만 이제부터 내가 먹는 것은 땅이 선물한 쌀이다. 어려서 시골에서 송편을 빚는다고 솔잎을 따는 것을 따라가 보면 솔잎도 아무 솔잎이나 쓰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솔잎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필요없는 잊혀진 지혜였을까?


그러고보면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imf당시 쌀이 없어 며칠동안 굶은 적이 있었다. 생선가게에서 일해주고 꽁치를 몇 마리 얻어왔는데 이것만으로 배를 채우려니 턱이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먹으며 버텼는데 그러다 쌀 한 줌 생겨서 밥을 해먹으니 어찌나 맛있고 좋던지. 그때 아직 남아있던 꽁치를 바라보던 나의 감정과 당시 사람들이 솔잎을 대하던 감정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고맙지만 원망스럽다. 그래서 지금도 꽁치를 잘 먹지 않는다. 한 동안 쌀 없어서 선물받은 장어로 버틴 적도 있던 탓에 장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참 당시는 고마운 먹거리들이었다.


인간이 한해걷이로 한 해를 살 수 있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쌀은 밀에 비해 생산력이 더 높았는데도 그랬다. 조선전기 사대부들이 필사적으로 백성들을 농지에 매어두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농사에 달라붙어 있어야 먹을 식량이 생산된다. 생산능력이 향상되었을 때는 그런 것 없었다. 아예 사노비마저 풀어주던 것이 조선후기였다. 역사의 무심한 흔적인 것이다.

사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정작 로마사회의 주류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나름대로 유력종파이기는 했지만 로마의 국교가 될 정도의 세력까지는 아직 없었다. 심지어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아예 기독교 교단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심각한 타격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 콘스탄티누스는 그런 기독교를 공인하고 자신의 종교로 삼았을까?


당시 지중해세계에 유행하던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주교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상명하복적 구조였다는 것이었다. 유대교의 유산이랄 수 있는 강한 율법주의적 경향이 복음서를 중심으로 주교의 해석과 가르침에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 특히 콘스탄티누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었다. 만일 누군가 이들 주교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 신자들까지 함께 자신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다. 실제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화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의 보호자로서 모든 주교의 위에 군림하며 기독교의 교리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신도들이 주교들에 복종하는 이상 따라서 당연히 주교를 지배하는 로마 황제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들은 그를 통해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안정된 황제로서의 지고한 권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거꾸로이야기하면 그렇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분열로부터 중세유럽의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전히 기독교는 로마교회의 지배 아래 있었고 교황의 지지를 받는 군주들이 합법적으로 그 권위를 빌어 제후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나서서 로마교회가 틀렸을 수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정작 그 배경이 되어주었던 로마교회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전부터 로마교회의 권위가 의심받기 시작하고 있었기에 그같은 주장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앙은 로마 교회가 아닌 각자가 성서 안에서 찾아야 한다. 성서만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로마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독일의 제후들은 당연히 그같은 루터의 주장을 지지하여 그를 보호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치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영지 아래에서 신앙은 영주인 자신이 정한다. 아예 영국의 핸리 8세처럼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자기가 수장이 되어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또라이도 있기는 했었다. 이제 유럽사회는 로마교회의 정신적 지배를 받는 단일한 세계가 아니다. 로마로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질서가 깨져나가는 순간이었다 할 수 있다.


로마 교회에 복음서가 있었다면 불교에는 각종 경전이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은 선학에 의해 후학에게로 위계를 가지고 전해지고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을 독점함으로써 불교의 사원과 승려들은 대중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대중은 알지 못하는 깊고 오묘한 말씀을 전하는 승려들이야 말로 부처님의 대신이었다. 당연히 부처와 같은 권위를 갖는 승려들은 대중들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즉 불교경전을 중심으로 한 위계의 구조를 틀어쥘 수 있다면 세속의 권력이 종교의 힘을 빌어 대중을 지배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했었다. 선종이 주로 주류불교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계층을 중심으로 출발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북송대에는 당말의 불교탄압과 오대십국의 혼란까지 더해지면서 불교의 중요한 경전 다수가 소실된 배경까지 더해지며 선종이 교종을 누르고 성세를 이루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이 없어도, 즉 선사의 가르침을 굳이 받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불성으로 오로지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북송연간 구법당과 신법당이 각각 교종과 선종과 손잡고 서로 대립한 것도 그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왕안석의 신법은 국가의 간섭과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고 사마광의 구법은 그로부터 사대부의 이익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고려의 의천이 천태종을 세우고 지눌이 거꾸로 조계종을 세운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의천은 왕족이었고 지눌은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의천의 불교개혁은 개경의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지눌의 종교운동은 지방에서 일반 백성과 향리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권력과 결탁한 불교가 타락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권력과 분리된 새로운 불교를 주장한 결과 지눌의 조계종은 조선건국 이후 숭유억불의 분위기 속에 마침내 불교의 주류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조계종이 지눌이 그토록 강조하던 권력과 분리되어 대중속에서 직접 실천하며 수행하는 본질을 지키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내가 불교도이기를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근세까지도 유럽사회에서 개인이 성서를 소지하고 읽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말했듯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성직자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일반 신도들은 그저 성직자들이 해석한 가르침만을 듣고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루터가 성서로 다시 돌아가자 주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활발하게 성경의 번역작업이 이루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는 자기말도 된 성서조차 없었다. 모든 성서는 일반 대중은 물론 어지간한 귀족들도 읽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쓰여 있었다. 그러니 기독교의 가르침이란 오로지 그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로마교회에 독점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교황이 옳다면 옳다. 로마 교황이 이단이라면 이단이다. 그러니까 진짜 이단인가 성서를 가지고 따져보자. 그런데 거꾸로 하나의 보편적인(가톨릭이라는 자체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해석이 사라지자 오만 놈들이 중구난방으로 자기 해석을 떠들어대며 기독교는 사분오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로마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만의 해석을 교조화하여 신도들에게 강제하는 이들도 나타나게 된다. 예전 어느 기독교 성직자의 말이 떠오른다. 신자들더러 멋대로 성서을 읽게 하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으니 성서를 읽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상당히 중의적이다.


어째서 로마는, 그리고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각각 기독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공인하고 국교로까지 삼았는가. 교리야 거기서 거기다. 중요한 건 그 종교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유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상당수 지배층이 스스로 성직자가 되어 성스러운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정확히 종교가 가지는 유용한 지배구조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더 유력한 가문의 출신들은 더 높은 지위에서 종교 그 자체를 지배하기도 했었다. 무속이야 하나로 모으기도 조직화하기도 아직 원시적인 상태였다. 당시 지중해의 여러 종교들도 상당히 느슨하게 기존의 지중해의 관습 속에 녹아 있었다. 대안이 필요했다. 국가를 하나로 만들고 왕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대안이. 종교는 매우 정치적이다.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진 현실에서 잠시 돌아보게 된다. 종교와 정치의 거리를. 종교와 정치가 갖는 관계를. 종교가 가진 표를 의식해서 정치인들이 종교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기도 한다. 종교적 이슈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세속화된 21세기에 종교는 이전보다 더한 권위를 갖는다. 대개는 성경이 아닌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다. 목사가 신의 대리인이 된다.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역사에 비하면.

현대에도 관용구로 흔히 쓰이는 '스파르타식 교육'은 사실 도시국가의 한정된 자원으로 최강의 군대를 이루기 위한 나름의 필연적 선택이었다. 다행히 이웃한 메세니아를 식민도시로 삼으면서 직접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방식이기도 했다. 모든 시민을 숙련된 전사로 만든다. 오로지 혹독한 훈련으로 모든 시민을 전사로 만들어 그것으로써 폴리스를 유지하고 지킨다.


하지만 정작 폴리스를 위해 모든 시민들을 엄혹한 집단생활로 내몰았으면서도 한 편으로 스파르타 역시 다른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같이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먹고 입고 자고, 더구나 평상시에도 조를 이루어 집단생활을 하면서 그 비용까지 모두 개인이 지불해야만 했다. 자식을 아고에라 불리운 학교에 보내려 해도 개인이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만 했다. 만일 그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면 폴리스의 시민으로서 모든 지위와 권리를 잃어야 했었다. 아예 나중에는 자식을 학교에 보낼 돈이 없어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마저 빈번하게 일어났다. 문제는 그 돈을 지불할 경제력이 모든 시민들에게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돈이 없으니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지 못해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돈이 없어서 아예 출산을 포기하기까지 했다. 영아살해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전쟁을 한 번 치르면 많은 인구가 죽어나간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존에 있던 시민의 수마저 줄이고 늘리기를 포기하니 제대로 사회가 유지될 리 없었다. 심지어 스파르타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던 코린토스 전쟁 당시 스파르타에 시민권을 가진 성인남성의 수는 불과 1천명 정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전성기에는 무려 9천 명이 넘고 있었다. 불과 수백년 사이에 완전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수가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코린토스 전쟁에서도 스파르타는 시민이외의 계급 - 즉 시민자격을 박탈당한 계급에서까지 충원하고서야 겨우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굳이 왜 지금 이런 글을 쓰는가는 아마 거의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부국강병을 기치로 개인을 수단으로 삼으며 집단속에 매몰시키면서도 정작 모든 부담과 책임은 개인에게로 돌린다. 결국 국가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도태되거나 사회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다. 과연 소수의 엘리트만이 남아 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별 건 아니지만. 그러고보니 스파르타식이라는 말을 유독 좋아하는 것이 어느 사회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인을 수단으로 삼아 사회의 부와 번영을 추구한다.


스파르타가 멸망한 이유는 단순히 코린토스 전쟁에서 패배해서가 아니었다. 코린토스 전쟁 이후에도 스파르타는 도시국가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메세니아가 독립하고 스파르타는 더이상 이전과 같은 성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나중에는 그리스에서도 가장 낙후된 도시로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전혀 바뀌는 것이 없었다. 흔적도 없이 역사에서 사라지기까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