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외국인에 대한, 특히 자국에 들어와 일하는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혐오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일자리문제일 것이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와서 더 싼 값에 일자리를 쓸어가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사라져야 내 일자리도 늘어난다. 더불어 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 역시 외국인 노동자가 종사하는 일자리와 관계가 있다. 대개는 그 사회에서 잘 하지 않으려는 일이거든.

 

그래서 웃긴다는 것이, 지금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직종들이 내국인들이 아예 하지 않으려 해서 어쩔 수 없이 외국인을 쓰는 곳들이란 것이다. 심지어 임금마저 낮지 않아 최저임금보다 더 쳐 주는데도 내국인은 없고 외국인만 있다. 오죽하면 외국인 노동자 다 내쫓으면 아예 국내 경제가 안돌아간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그런데도 또 어이가 없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 핑계대며 최저임금을 지금보다 더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청년세대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 임금수준에서도 내국인은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외국인 쓰는데, 더구나 그마저도 사람 없다고 최저임금보다 더 주는데 그러고서도 외국인노동자 다 내쫓자?

 

원래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하류인생이란 게 그렇다. 그동안에도 몇 번이나 말했을 것이다. 자기 나라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국내에서 그들이 하는 일이란 대개 그런 일들이란 것이다. 직업적인 차별에, 계급적인 차이까지 더해지면 그것이 다시 외국인에 대한 인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저 일 열심히 잘하는 외국인에 대한 기억보다 또 꼭 그런 외국인에 대한 기억만 강하게 남는다. 그러니 그들은 그런 좀재다. 그럼 그런 존재들에 일 빼앗기기 싫으면 지들이 하던가.

 

최저임금 너무 올라 불만, 근로조건 너무 좋아져서 불만, 쉬는 시간 많아져서 싫고, 자기주장 더 확실하게 할 수 있어서 싫고,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어서 싫다. 실제 일베하는 것 같은 동료직원이 일하다 말고 떠드는 소리다. 그래서 나라 망하고 있다. 외국인들만 좋아지고 있다. 자기가 그 급여 받고 그 근로조건 아래서 혜택받고 일하면서 하는 소리다. 얼마나 웃기는가. 겨우 최저임금 인상된 만큼 돈 받으며 일하면서 사람 없어서 그보다 더 많은 돈 받으며 일하는 외국인을 차별하는 그 태도라는 것이.

 

그래서 지금 청년세대 사이에 떠도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주장들을 의미없다 여기는 것이다. 그냥 싫은 것이다. 그저 자기보다 열등하다 여기고 업수이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외국인 노동자에 의한 범죄발생율이 한국인의 그것에 비해 얼마나 더 높기는 한가. 기억이란 샘플링은 인상적인 특수한 것들만 가려서 남기는 법이다. 한국인의 범죄는 특별할 것이 없다. 누가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해 테러라도 난 줄 알겠다. 

원래 노조는 진보정당의 중요 지지기반이었다. 진보정당은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고 노동자는 진보정당에 표를 주어 제도권에서 자신들을 대신할 수 있도록 밀어준다. 그런데 실제 그랬느냐면,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에서 노조원들은 진보정당이 아닌 민주당에 투표를 하고 있었다. 특히 기초단체에서 광역단체, 국회의원, 지자체장, 대통령까지 큰 선거일수록 그런 경향은 강해지고 있었다. 일단 진보정당이 자기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지역을 대대표할 국회의원까지는 의문부호가 찍히는 것이다. 지금 진보정당이라는 정의당이 노동자는 외면한 채 여성에만 매달리는 진짜 이유다. 노동자를 대변해봐야 표가 안 된다.

 

이준석 병신인 것 20대 남성들도 거의 대부분 안다. 이준석이 반페미를 앞세워 20대 청년들을 대변한다고 나섰을 때 반응도 그래서 그래도 자기들 목소리 대변해주는 정치인도 하나 있구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놈이라도 자기들 목소리를 대변해주니 한 번 밀어줘야겠다. 무슨 말인가? 이준석 하나 당대표 된다고 국민의힘이 바뀌지 않을 것도 알고, 이준석 하나 능력으로 지금 정치판에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려울 것이란 점도 안다. 아마 더 크게 망하기 쉬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들 편에서 말해주는 것은 이준석 뿐이지 않은가. 능력이나 인품 때문이 아닌 오로지 그 사실 하나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뭔가 지켜야 할 대단한 것이 있는 정치인이 현재 국내에서 교회표 다음으로 조직력이 강한 여성표 떨어져나갈 소리를 대놓고 떠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수도 얼마 안되는 직능단체에 대해서도 혹시라도 반감을 사지 않을까 단어 하나까지 신중하게 고르는 것이 바로 정치인이란 존재들이다. 오죽 비빌 데가 없으면 반페미에 올인하고 덤비는가. 그래서 과연 당대표가 되었다고 0선 시절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며 하고 싶은대로 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20대 남성들이 죄다 이준석 같은 병신은 아니다. 그저 한 번 힘을 보여주고 싶다. 이준석 말고 더 쓸만한 대안이 있으면 바로 그리로 옮겨간다. 그게 현실이다. 딱 정의당이 그 수준인 것이다. 

언론이 보도를 제대로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사실인데, 지금 우리 정부가 확보한 백신 물량이 7천만 명 분을 훌쩍 넘어간다. 새삼 새롭게 백신을 확보할 필요 없이 이미 확보한 물량만 제대로 들어와도 연말까지 집단면역을 만드는데 전혀 아무런 지장이 없다. 더구나 이미 확보한 백신 가운데 화이자를 제외한 대부분이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거나 생산될 예정에 있다. 여차하면 그냥 나라문 걸어잠그고 물량 모두 국내로만 돌려도 차고 넘치는 게 백신이다. 그러면 어째서 정상회담 의제로 백신공급이 올라가게 되었는가. 하도 언론이 지랄들 해대니까.

 

이미 SK가 아스트라제네카를 생산중이고, 삼성 바이오로직스가 모더나와 생산계약을 맺었다. 얀센은 아예 기술이전까지 해주겠다 나서는 중이다. 따라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백신을 의제로 올리는 것은 백신을 얼마나 한국에 공급하겠느냐는 차원이 아닌 장차 백신을 어디에서 주도적으로 생산할 것인가 하는 보다 글로벌적인 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이 세계 백신생산의 허브가 된다면 그 이익이야 말할 것 없이 막대할 것이다. 장차 미국의 국제전략에서 한국의 위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하도 언론이 지랄하니 문재인 정부를 위해 명목상 넘겨준 것이 바로 군인들 몫의 55만 명 분이다.

 

누가 보면 아직 한국 정부가 백신도 제대로 확보 못했는 줄 알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접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고, 27일 부터는 하루 100명씩 접종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고 있는 중이다. 아스트라제네카에 이어 모더나와 얀센에 스푸트니크까지 생산하는 백신 종류만 여럿에 이 모두가 세계 각국으로 공급되고 있는 와중에 55만 명이 마치 정부가 확보한 백신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떠드는 국민의힘이나 마찬가지로 그렇게 보도하는 언론이나 그것을 믿어버리는 국민은 도대체 뭐하는 버러지들인 것인지.

 

이미 7천만 명 분 확보한 위에 군인들 몫으로 미국으로부터 55만 명 분의 지원을 받아낸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고 이후 코로나19 백신공급에 있어 한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진 것이 더 큰 성과일 수 있는 것이다. 역시나 보도하면 국민들이 현정부를 더 지지할 테니 그러지 못할 것이다. 더 웃기는 건 백신이 안전하지 못해 맞지 않겠다는 놈들이 저따위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화이자 맞고 사망한 사례들도 열심히 보도하는 중이더만. 뇌가 구더기일 수 있음을 새삼 확인케 한다.

그러고보니 여성주의자와 민주당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약자도 아니면서 약자인 척 한다. 아니 오히려 강자이면서 약자인 척만 죽어라 한다. 가증스럽지 않은가. 나는 돈도 직장도 아무것도 없는데 저 새끼들은 다 가지고서도 약자인 척 아무것도 않으며 더 가지려고만 한다. 벤츠 타고 다니며 구걸하는 거지새끼 보는 느낌이다.

 

젊은 층들이 민주당을 싫어하는 어쩌면 진짜 이유일 것이다. 젊을수록 직관적인 걸 좋아한다. 간결하고 분명하고 확실한 걸 더 추구하게 된다. 복잡하고 어려운 건 싫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 하는 것 보라. 문재인도 마찬가지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려 했으면 그렇게 했어야 했다. 허구헌날 국민의힘이 발목 잡는다고 우는 소리 하길래 혼자서 모든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180석까지 만들어 줬다. 그런데도 여전히 야당탓 언론 탓이다. 그 야당과 언론을 밟아버릴 힘을 가지고서도 그저 우는 소리만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LH사태가 벌어졌을 때 민주당이 저지른 가장 큰 실책 중 하나일 것이다. 너무 재고 따졌다. 180석이면 일단 지르고 봐야 하는 것이다. 결과부터 보이고 봐야 하는 것이다. 위헌인가 여부는 헌법재판소에서 따지면 된다. 그래서 뭘 하고 싶다고? 뭘 해야 한다고? 왜 안하는데? 조국사태 당시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렇게 검찰개혁이 중요하면 왜 일찌감치 검찰개혁에 착수하지 않았는가.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 문재인 정부와 그 여당의 초대 총리이고 당대표였던 인간이 국가에 책임을 묻고 있더란 것이다. 코인에 희망을 거는 청년들의 문제를 정부에 묻겠다. 넌 뭘 했는데?

 

항상 이따위다. 하는 건 없고 책임만 묻는다. 오죽하면 책임지기 싫다고 기껏 되찾아 놓은 법사위원장 자리마저 내주자는 놈들이 있겠는가.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이 얼마나 편하게 정치해 왔었는지. 그런 점에서 그동안 어렵게 정치해 온 우상호, 우원식, 홍영표, 이인영 등은 다시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강자면 강자답게 자기들에 대한 책임 역시 분명하게 져 달라. 당장 이슈가 되고 있는 군 급식문제에서도 정작 정부와 여당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다. 여성만 신경쓰지 말고 나라를 위해 희생중인 남성들에 대해서도 좀 신경써 달라.

 

한 마디로 20대 젊은 남성을 위해 아무것도 않는다는 인식은 무엇보다 민주당이 여성주의 정책을 제외하고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인식의 연장에 있는 것이다. 그깟 윤석열 따위에게. 그깟 조중동한경오따위에게. 그깟. 그깟. 그깟. 그에 비해 정부든 여당이든 얼마나 크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그런데도 정작 한 것이 무엇인가.

 

이낙연에 대한 실망은 이제 더 커질 것도 없다. 그러고서도 자기 일이 아닌 양 정부에 책임을 묻겠다는데 이건 진짜 노망의 전조증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총리며 당대표 지내는 동안 그런 문제를 인지하지 못했으면 멍청한 것이고, 인지했음에도 이따위면 무능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럼에도 그따위 소리를 내뱉는 건 인간이 덜 된 것이다. 어이가 없다.

예를 들어 뼛속까지 귀족인 사람이 비천한 노예의 언어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면 과연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흑인이라면 혐오와 경멸을 감추지 않는 인물이 굳이 어떤 대상을 향해 흑인의 언어를 사용해 조롱하려 한다.

 

원래 한겨레는 일베를 무척 싫어했을 터였다. 한겨레 뿐만 아니라 자칭진보 대부분이 혐오와 증오의 총본산일 일베에 대한 경계와 적대감을 훨씬 전부터 드러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공교롭게도 딱 노무현 전대통령의 12주기에 맞춰서 한겨레 지면에 일베가 노무현 전대통령을 조롱하는 어휘들이 제목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하긴 대놓고 '놈현 관장사'라는 제목을 크게 붙여 기사로 내기도 했던 언론이었으니.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설마 싶었었다. 그러다가 조국 전장관에 대한 한겨레의 적의를 보면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불행한 선택을 하던 그날 한겨레 편집국에서는 환호성이 들렸다더라. 그리고 다시 문재인 대통령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수구세력과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평소 김어준과 가까운 듯 보이던 김완이 그를 계기로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던 것이었다. 문재인만 죽일 수 있으면 가짜뉴스도 의도된 오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죄인이 되어 실형까지 선고받은 이명박과 단지 의혹 뿐이던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한겨레의 기사만 보더라도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 이명박은 안타깝고 노무현은 당장 죽어 사라져야만 한다. 한겨레의 진정한 속내일 것이다. 그보다는 한겨레가 대변하는 자칭진보의 너무나 노골적인 속내다.

 

어쨌거나 정말 더러운 새끼들이란 것이다. 12년이나 지나서도 죽은 이를 이렇게까지 모욕하는가. 그것도 딱 눈치채기 좋은 정도로 위장하고 있었다. 제발 알아달라는 듯. 버러지 새끼들. 아직도 보고 있는 놈들이 역겨울 정도다.

자아가 불안하고 주체성이 부족할수록 위계관계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똥구멍으로 나이만 쳐먹은 새끼들에게 흔히 듣는 말이다.

 

"너 몇 살이야?"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다. 어렵게 고민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나이로 서열 정해서 그대로 찍어누르겠다. 반대로 내가 어리다면 그냥 아무말없이 따르겠다. 그러면 편해진다. 다툴 일도 고민할 일도 상처입을 일도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엘리트란 그런 구조 안에서 상위 위계에 속하고자 노력한 놈팽이들이란 것이다.

 

상대가 나보다 우위에 있는가? 아니면 열위에 있는가? 여성주의자들이 저따위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다. 강자와 약자를 나누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한다. 민주당은 약자다. 20대 남성은 약자다. 국민의힘은 강자다. 50대 이상 기득권 남성들은 강자다. 같은 여성이라도 그래서 직급이 낮은 일선검사보다 직급이 높은 검사 수뇌부 남성들과 더 가깝다. 자칭 진보가 국민의힘을 노동존중의 정당이라 추앙하고 여성존중의 정당이라 추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가짜뉴스든 뭐든 수구언론이 터뜨리면 따라가기 바쁜 것이다.

 

검찰은 강하다. 그러므로 김학의가 무고한 것이다. 민주당은 약하고 박원순은 죽은 사람이기에 박원순이 김학의보다 더 파렴치한 범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김학의에 대해서는 철저히 원칙과 절차와 무엇보다 당사자의 인권을 존중해서 행동해야 하지만 박원순은 아니다. 같은 논리에서 박근혜에 비해 문재인은 뭘 어떻게 해도 가만 놔두니 약자로서 기자들이 평가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되도 않는 놈이 면접관이랍시고 앉아 있을 때 인재를 가려내기보다 그저 지원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려는 경우와 닮았을 것이다. 나는 일방적으로 문제를 내고 너는 그 문제를 푼 다음 평가까지 받아야 한다. 

 

그래서 기자들이 밖에 나가면 질문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하긴 국내에서도 질문을 제대로 하는 경우란 드물다. 질문의 가지수만 많을 뿐이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상대를 곤란케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질문만을 사람과 장소만 바꿔서 반복한다. 내가 채점하는 입장이다. 반면 밖에 나가서는 진짜 권위 앞에 내가 채점받는 입장이다. 비유하자면 윤석열에게는 오보 냈다고 납죽 엎드려 용서를 구걸하던 한겨레가 민주당에 대해서는 오보를 내고서도 오히려 오만한 상황과 닮았을 것이다. 윤석열은 강자고 민주당은 약자다.

 

그러니까 민주당이 병신이란 것이다. 오죽하면 180석 가지고 채 10석도 안되는 정의당 따위에 얕보일 수 있는 것인가. 그런 현실을 전혀 문제라 여기지 못하고 더 약자로 보이기 위한 궁리만 하고 있다. 그래서 약자인 것이다.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라도 그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멕시코에게도 휘둘리는 약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기레기가 기레기인증을 또다시 미국에서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국 여기자에게 질문기회를 주고 싶다. 진짜 권위 앞에서 저들은 얼마나 비루하고 비천한 존재들인가.

 

한겨레가 아무리 잘난 척 해봐야 윤석열 앞에 오체투지하고 똥오줌까지 지리던 모습 덕분에 그저 우습기만 한 이유인 것이다. 박근혜 앞에서는 감히 질문조차 하지 못하던 버러지들이다.

 

한국 교육시스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이유다. 그래도 좋은 대학 나와서 기자까지 되었다는 놈들 수준이 이렇다. 지식이란 인간을 보다 현명하게 지혜롭게 용감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 아니던가. 버러지는 버러지다. 똥냄새난다.

금이 화폐로 쓰인 것은 아직 상거래가 일반화되기 이전의 한정된 시기 정도였었다. 사실 인류라 상거래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상당기간 동안 그 주된 형태는 물물교환이었었다. 금은 물물교환을 하기에는 이동거리가 너무 멀거나, 혹은 교환할 재화의 가치를 보다 확실하게 계량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했을 때, 보증하는 주체가 없어도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거래수단으로써 주로 사용되는 편이었다. 확실히 항아리 100개 싣고 다니는 것보다 팔아치우고 금으로 바꾼 다음 그에 해당하는 포도주를 다른 지역에서 사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기는 하다.

 

오히려 상거래가 일반화되면서 화폐로서 금의 비중은 줄어드는 경우가 많았으니, 당연한 것이 금이란 것이 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금속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일찍부터 은을 화폐의 단위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나마 금보다는 그래도 흔하다는 은조차도 중국 안에서만 조달해 쓰려니 한계가 분명해서 명말에 이르러서는 세금을 내려 해도 은을 구하지 못해 내지 못하는 경우마저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 당시 조선을 찾은 사신들마저 어떻게든 부족한 은을 확보하려 온갖 패악을 부렸을 정도이니 그 사정을 알 만하다. 조선에서도 구리가 부족해서 기껏 구리로 돈을 찍어내봐야 오히려 그 돈을 녹여 구리로 물건을 만들어 쓰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화폐의 가치가 너무 높아서 정작 거래수단으로 쓰이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 말 유럽에서는 상거래의 발달로 금의 수요가 늘어나자 정작 금을 구하지 못해 물물교환에 나서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며 하마트면 화폐경제 자체가 무너질 뻔한 위기도 겪고 있었다. 당시 봉건영주들도 대부분 세금을 현물이 아닌 금화 등의 화폐로 거두어들이고 있었는데 화폐의 수량 자체가 한정되어 있어 억지로 화폐를 구하려면 그만큼 더 많은비용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차라리 현물로 내는 것이 낫다 싶을 정도로 농민들에게 크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은 잉카를 멸망시키고 얻은 금을 죄다 녹여서 금화로 만들어 유럽에 유통시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금이 있었기에 유럽의 화폐경제는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중국의 경우도 모든 세금을 일정하게 은으로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은을 사들여 유통시킨 덕분이었다. 이후 일본의 은광이 고갈되자 멕시코의 은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이 은광을 개발하지 않을 것을 실책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당시 은이 부족하던 중국의 사정상 조선에서 은광이 개발되고 은이 생산되었을 경우 발생할 일들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은광을 모두 막아둔 상태에서도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은 내놓으라고 온갖 지랄을 해댔었는데 과연 은광이 있었다면 조선의 역량으로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영향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숙종 연간에야 겨우 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은 효종 연간 조선에서 구리광산이 개발되었던 영향이 컸었다. 그 전에는 필요한 구리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기에 화폐로써 구리의 가치가 실제 구리의 가치에 밑도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차라리 구리를 녹여서 현물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편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조선에서도 구리가 생산되기 시작했으니 구리의 가치가 일정 이하로 유지되며 화폐가 안정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다. 이때 유통되기 시작한 상평통보가 일제강점기까지 계속 쓰이면서 엽전이란 비칭의 어원이 되었다.

 

달러가 기축통화로 쓰일 수 있는 이유는 그 가치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여전히 금본위제를 고수하고 화폐의 유통을 일정 수준으로만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달러를 필요로 하는 나라는 넘쳐나는데 정작 그 달러가 한정되어 있다면 결국 그 가치는 오를 수밖에 없다. 장차 가치가 크게 오르게 될 달러를 거래수단으로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달러를 미친듯이 세계가 달러를 필요로 하는 만큼 뿌려서, 혹은 미국이 아무리 달러를 뿌려도 어떻게든 그 가치를 유지하 위해 세계의 정부들이 나서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근대의 화폐제도다. 이전의 화폐가 자연화폐로써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면 근대의 화폐는 확실한 주체들에 의해 그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관리받는다.

 

그래서 화폐는 어지간히 경제가 막장이 되지 않으면, 즉 관리의 주체가 그 역량을 잃지 않으면 가치가 크게 오르도 내리는 경우가 거의 흔치 않다. 환률이 급락했네 급등했네 할 때도 보면 거의 몇 % 안에서 움직이는 정도다. 아니면 화폐의 가치에 대한 신뢰가 없어 상거래에 쓰이지 못한다. 기축통화란 바로 그런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그런 신뢰가 있는 통화를 가리킨다. 그러면 관리할 주체가 없고 보증도 없는 가상화폐는 어떨까?

 

일론 머스크가 가상화폐로 자기회사 차를 살 수 있도록 하겠다 했지만 실제 산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의문스러울 뿐이다. 가치가 오르고 있는 게 보이는데. 가치가 오르고 있다면 더욱 장래의 가치를 기대해서라도 화폐로서 쓸 수 없고, 가치가 떨어진다면 역시 앞으로 가치라 떨어질 것이 보이므로 거래수단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아무도 없다. 정부는 개입하지 말라. 정치권은 개입하지 말라. 그러나 결국 가치가 하락하면 그로 인한 손실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에서 대신 책임져달라. 그런 일 벌어지지 말라고 이미 달러가 있고 원화가 있고 위안화가 있는 것이다. 그를 부정한 순간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에 한 번은 크게 급등하고, 한 번은 크게 급락하고, 그동안 반복되어 온 과정이었었다. 사실 그마저도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그러면 그동안 돈을 번 사람은 누구고 돈을 잃은 사람은 누구인가. 현실의 화폐처럼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나설 주체도 없기에 오히려 더욱 그런 투기성을 강화해서 더 큰 이익을 얻으려는 놈들이 지배하는 판이란 것이다. 더구나 그 가상화폐를 채굴하기 위해 중국에서는 더 많은 화력발전과 원자력발전을 동원해야 한다. 아마 대부분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이 반기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금보다도 더하다. 금은 그나마 일정한 가치를 계속 유지하지만 가상화폐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오르도록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채굴의 난이도가 계속 높아질 것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는 더욱 상승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화폐로 쓰기에는 한계가 뚜렷한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그 밖에 가상화폐에는 무슨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가치를 부여하니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인정하는 이들 사이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언론까지 나서서 부추기며 헛된 바람을 불어넣는다. 바로 거품이란 것이다. 폰지사기에 다름 아닌 이유다.

같은 본다는 뜻이지만 관은 시나 견과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주체가 있고 대상이 있으며 목적과 의도가 있다. 구체적이고 실체가 있다. 그래서 볼 관이지만 살필 관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경제관, 외교관, 복지관, 여성관, 세계관, 정치관 등등등이다. 이런 단어들이 어떤 의도로 쓰였는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냥 벼락치기로 공부만 해서는 이런 관이 생겨나지 않는다. 관은 지혜지 지식이 아니다. 경제에 어떤 이론이 있더라. 어떤 사례들에 어떤 설명들이 있더라. 그런 모든 지식들을 아우르고 체계화한 뒤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를 통해 다시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세계와 자신을 통하는 창구인 셈이다. 그런데 그런 걸 단 몇 달 전문가에게 벼락치기로 배운다고 만들 수 있을까? 그러면 그것은 과연 자신의 관일 것인가?

 

아직 정치인으로서 역사와 경제와 외교와 행정과 통치행위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자기만의 관이 없다. 그러면 이미 정치인으로서 실격인 것이다. 그것을 배운다고 바로 얻을 수 있다면 관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리 없다. 무엇보다 그 관이 과연 자신이 가진 관과 일치하는가도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웃기는 게 그래도 진보를 자처한다는 한겨레가 수구언론과 같은 입장에서 그런 윤석열의 학습에 대해 찬양 일변도라는 것이다. 수구언론이 바라는 경제관, 노동관과 한겨레가 바라는 그것이 과연 같을 것인가.

 

아니지. 신민이란 군주의 관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윤석열이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 폭동이라 규정지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빨갱이들이 남파되어 일으킨 반란이었다면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노조는 악이다. 최저임금은 3천원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믿고 따르면 된다. 그런 의미인 것이다. 윤석열이 지금 누구에게서 어떤 내용을 배우고 있는가는 전혀 관심조차 없이 그저 배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환호하며 희열마저 느끼고 있다. 그를 찬양하기에 바쁘기만 하다. 달리 이해할 논리가 있을까?

 

역대 민주정부들이 관료들에 개혁의 발목을 잡혔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름대로 개혁을 위한 관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관료들의 전문성을 넘어설 정도로 치밀하지도 강고하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그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타협하며 주저했던 것인데 그를 비판하던 자칭 진보가 윤석열의 학습을 칭찬하는 것은 어떤 의도일 것인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평소 관심도 없다가 몇 달 공부한다고 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토론하면 드러난다. 지식이 부족해도 관이 확실하면 그 방향성만큼은 제대로 제시할 수 있다. 나머지는 따로 그 내용을 채워주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게 리더란 것일 테지만. 자칭 진보의 바닥이야 모르지 않으니. 똥걸레는 똥걸레다. 답이 없다.

예를 들어 전근대 유럽의 남성들이 여성을 배려한 것은 여성을 동등한 인격이 아닌 보호가 필요한 약자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편에서는 살부비고 살 던 마누라를 목줄 묶어 내다 팔면서도 한 편에서는 기사도네 신사도네 여성을 마치 귀중품마냥 아끼고 떠받드는 모순이 일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모순도 아니었다. 여성은 단지 남성을 위한 자궁이며 트로피였다. 그게 바로 남페미라 불리는 놈들의 정체이기도 한 것이다.

 

남자들이 서로에게 상당히 무례하게 폭력도 휘두르고 쌍욕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데도 또 때로 서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서로를 대등한 인격으로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당해도 상관없는 만큼 상대에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거리낌이 있다면 남자들 사이에서도 말이며 행동들은 무척 조심스러워지게 된다. 아마 남자들끼리 서로 내뱉는 농담이며 장난을 그대로 여자들에게 했다가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이네 바로 수갑부터 차게 되지 않을까. 바로 남자들이 여성주의에 진심으로 분노를 넘어 경멸과 혐오의 감정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것이야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당위에 가까운 것이다. 문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남성과 대등하게 높이는 건 좋은데 이전까지 약자로서 받던 배려까지 같이 누리려 한다는 것이다. 군대도 가지 않고, 그렇다고 군대에 준하는 사회적 의무를 행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하거나 할 때도 경제적 책임은 온전히 남성에게만 부담지우려 한다. 하다못해 데이트할 때도 비용을 남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기려 하면 이게 뭔가 싶어질 것이다. 대등한 인격으로 동등하게 지내고 싶다면서?

 

비유하자면 돈도 벌 만큼 버는 인간이 무료급식소에서 밥 얻어먹고, 경제적 취약층을 위한 복지혜택까지 챙겨먹으려는 상황과 비슷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지가 어려운 것 같아서 박스며 캔이며 모아서 챙겨줬는데 알고 보니 건물도 여러 채 있는 알부자라더라. 나는 지금 겨우 월세 사는데 건물주님을 동정하여 도와주려 했던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오만과 독선으로 인해 여성주의 자체가, 심지어 여성 자신마저 권력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상황에 여성을 약자로 간주한 배려들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오히려 더 강화하려는 시도들이 모순되고 불공정한 구조로써 인식되고 마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성을 약자로서 배려하면서 여성의 권력마저 감당해야 하는 것인데.

 

그래서 초창기 여성주의자 가운데는 여성에 대한 약자로서의 배려와 보호를 거부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신사도네 기사도네 남성들이 허영으로 베푸는 그같은 행동들이 오히려 여성을 약자로서 고착화시킨다. 그러니까 내가 기생이라 부르는 것이다. 기생페미니즘이다. 권력을 가진 남성에 빌붙어서 그들의 배려와 보호에 기대어 권력을 빌리고 약자인 남성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 성인지감수성이란 그런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인 셈이다. 정확히 인권감수성이어야 한다. 동등한 인격으로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함을 이해한다. 여성과 남성이 대등함을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그런데 인권감수성이 아닌 성인지감수성인 이유가 무엇인가. 여성을 약자로서 여전히 보호하고 배려하면서도 여성을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하고 존경하라. 그것도 여성 스스로 쟁취한 권력이 아닌 여성을 약자로써 배려하려는 남성에 기대서.

 

박원순 논란 당시 여성주의자들이 남성인 검찰 지도부를 움직여서 같은 여성인 검사들을 징계하려 시도한 사례가 그를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같은 여성이면서 성추행 피해자인 서지현 검사의 피해사실마저 의심하며 부정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여성의 편인가? 그들 자신에게 여성이란 과연 존중받아 마땅한 대등한 인격인 것인가. 그리고 남성이기에 그런 모순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하면 된다. 약자로서 보호와 배려를 받거나, 아니면 동등한 인격으로서 대등한 권리와 책임을 함께 누리거나. 둘 다는 아니다. 정히 그러고 싶으면 여성 스스로 힘으로 권력을 쟁취한 다음 그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주의자들은 지난 서울시장선거에서도 같은 여성이 아닌 남성에 기대어 여성주의를 실현하려 하고 있었다. 박영선이 아닌 오세훈이 여성주의를 실천해 주기를 바란다. 그게 현실이다. 경멸조차 아깝다. 혐오스런 것들이다.

어이가 없어 한참을 웃었다. 게임회사 다닌다고 다 저렇게 무식한 것 아니다. 오히려 게임을 만들어야 하기에 별 잡스런 지식들을 머리가 터지도록 우겨넣고 일상에서 흘리고 다니는 놈들이 더 많을 것이다.

 

원래 3인칭으로 쓸 때 '당신'은 '자신'의 높임말이다. 어머니 자신, 혹은 아버지 자신이라 하지 않고 어머니 당신께서 아버지 당신께서라 쓰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라는 뜻이다. 대통령 당신께서 어떤 뜻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당신이라는 호칭 뒤에는 반드시 높임말이 뒤따라온다.

 

물론 정의당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단이 나고 바로 지도부가 나서서 사과도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다 끝난 일을 대화의 앞뒤를 다 잘라가며 민주당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는가? 별 것 없다. 사람 심리란 그렇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누군가 왕따가 되면 처음에는 동정하다가도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왕따에 동참하게 되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인간은 그래도 되는 상대에 대해서는 그렇게 대하려는 본능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강자라면 자신 역시 조심하며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모두가 우습게 여기는 약자라면 자신도 역시 마찬가지로 무시하고 비웃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상대가 평소 자기보다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인기가 많아서 열등감을 가져야 했던 대상이면 더욱 그렇다. 그야말로 사과 자판기 아닌가. 주위에서 누가 한 마디 하면 뭐가 잘못인지도 모르고 무릎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힌다. 대통령까지 마음대로 하라며 내놓는 놈들이다. 저놈들은 조국을 버린 게 아니다. 이성윤을 버린 게 아니다. 대통령을 버린 것이다. 다만 대놓고 말하지 못하니 대통령이 인사한 조국과 이성윤을 대신해서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정의당도 민주당을 한 번 찍어 눌러야 하지 않겠는가.

 

우습게 보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180석 의석을 가지고도 겁이 뭔지도 모르는 구더기마냥 이리저리 몸을 움츠리기만 바쁘다. 뭘 해보겠다는 생각조차 없이 어떻게 하면 주위에 미움을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 무릎으로 기어다니며 연신 대가리나 조아리는 중이다. 정의당이 강하게 나서면 정의당에도 마찬가지로 사과할 것이라 생각한 거겠지. 

 

누구의 잘못인가? 권력이란 냉정한 것이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약자가 있으면 짓밟는다. 지금 민주당은 그래도 되는 약자다. 누가 지금의 민주당을 180석이란 압도적 의석을 가진 강력한 거대여당이라 여기겠는가. 언론이 기사 한 줄만 쓰면 바로 흩어져 사라져 버릴 군소정당도 이렇게 비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럴만한 힘과 책임을 가진 자의 겸손은 비굴이며 비겁이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다.

 

정의당이 어이없으면서 오히려 민주당이 당한 상황이 우스워지는 것은 그런 이유인 것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더 우습게 여겨지기 위해 경쟁하는 저 버러지들을 두고. 그래도 되는 대상으로 스스로 여긴다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지금 민주당의 현주소인 것이다. 아무도 민주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하기는 커녕 존중조차 하지 않는다. 민주당은 버러지다. 버러지보다 못한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더 비천해지기 위해 경쟁한다. 답이 없는 새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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