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서프라이즈에서 놀던 당시 재미있는 논쟁이 붙었었다. 이른바 직업여성들을 비하한 글을 쓴 특정인에 대해 누군가 비난하면서 불거진 것이었는데, 요약하자면 한 마디로,


"비판은 그럴 수 있지만 말이 너무 지나치다."


물론 거친 말로 비난한 그 사람은 결국 서프라이즈를 떠나야 했었다.


내가 이른바 진보적인 인사들과 어울리기를 꺼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이 배우고, 그런 만큼 말도 정중하고 현란하다. 그에 비하면 보다시피 나는 말이 졸렬하고 경박한 편이다. 가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표현들을 문제삼을 때가 있다. 절제하지 못하고 정제되지 못한 불학무식이 그대로 드러난 표현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씨발, 그러면 니들끼리 니들 언어로 떠들던가.


원래 나고 자란 환경이 그렇다. 아저씨들은 대낮부터 술에 취해 동네 아무 평상에나 널브러져 있고, 아주머니들은 단 돈 몇 천 원 때문에도 거리에서 알몸이 되어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싸워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이 보고 듣고 배우는 것들이야 너무 뻔하다. 대학에 가서야 - 아니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내가 쓰는 말들이 거칠고 천박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가장 예민한 시절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그런 것들인데. 예전에는 굳이 그런 것들을 감추려 애쓰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예 대놓고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만큼 그런 것 문제삼는 인간들 꼴보기 싫었던 것도 있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후보의 녹취록을 들으며 남들과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인격의 문제라기보다는 환경의 문제다. 어려서부터 학교도 못하고 공장에서 어른들 사이에 섞여 일해야 했었다. 그런데 그 어른들이라고 단정하고 점잖은 언어를 쓰던 어른들은 아니었을 터다. 당장 노가다 몇 번 나가보면 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감정이 격해지거나 하면 그때 배운 표현들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일상에서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욕설들과 같다. 어떤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한창 말을 배우던 시기 그렇게 말하도록 직접 주위로부터 보고 들으며 익숙해진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보는 이재명 경기도지사 후보의 녹취록이란 그저 당시 이후보가 무척이나 감정이 격해져 있었구나.


그래서 더욱 남경필 자유한국당 후보와의 거리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문재인을 지지한다고 해도 그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살아온 환경과 배경이 이만큼이나 다르구나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차라리 그들은 남경필과 더 가깝다. 굳이 상스러운 표현을 쓸 필요도 없고, 굳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을 필요도 없다. 그런 것을 굳이 보고 듣고 배울 일도 없었다. 햇빛도 안드는 좁고 축축한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은 골방이며, 전깃세 아끼겠다고 불도 켜지 않아 한낮에도 책을 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아이들의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냥 욕설을 한 자체가 중요하다. 그런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표현을 쓴 자체가 문제다. 그로부터 그 뒤에 숨은 일상어를 읽어내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읽는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발전한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많이 성장한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는 그런 곳이 많이 남아 있지만 최소한 그들이 더이상 인터넷 등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일은 없을 것이다. 많이 배우고, 가진 것도 제법 되고,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지위에 있다. 내가 볼 때는 말만 정중했지 타인을 쉽게 비하하고 부정하고 무시하는 그 사람의 글이 더 문제였지만, 그러나 당시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보다는 비난에 쓰인 표현이 더 문제였다. 항상 어디가나 느끼는 것이다. 참 말로도 서로 섞이기가 무척 어렵다.


사실 영국만 해도 계급어가 명확하다. 미국 역시 같은 영어라도 흑인이 쓰는 영어와 남부 백인이 쓰는 영어가 전혀 다르다. 언어란 것이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만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물리적 공간에 의해서만 언어가 서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왕과 일반 백성과 천민인 백정이 쓰던 언어가 달랐다. 아예 영국에서는 유한계급을 위한 영어를 따로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었다. 한국 표준어를 정의하는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이라는 말도 그 영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자체가 교양이 있고 없고에 따라 쓰는 언어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몇 년 전 박재범과 관련한 오역논란도 박재범이 살아온 환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었다. 허세어린 거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며 자라온 배경을 무시한 채 단어만으로 그의 말들을 멋대로 번역하고 그를 근거로 문제삼고 있었다. 


결국은 같은 과라는 것이다. 그래봐야 이재명은 스스로 노력해서 변호사도 되었고 성남시장으로 나름대로 성과를 낸 끝에 경기도지사 선거에 도전하고 있으니 나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하지만 성장배경이 비슷하다. 가끔 튀어나오는 언어들이 같은 환경 아래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것이 계급이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결코 바뀔 수 없는 출신에 대한 것이다. 그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실드라면 실드고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어머니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 그를 이해하게 된다. 내가 하는 말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아니면 단지 이재명을 편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런 표현들을 써서는 안된다는 엄격하고 엄숙한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바로 그것이 차이라는 것이다. 다름이라는 것이고, 이 사회에 존재하는 구분이고 서로의 계급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표현들을 일상으로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사회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그런 사람이 어느새 주류사회에서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까지.


최소한 내가 이재명을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문제가 된 녹취록 때문에 싫어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말이다. 오히려 이재명의 욕설과 막말은 나와의 공감대이기도 하다. 그와 나는 출신이 같다. 계급이 같다. 정치적으로도 같은가는 차치하더라도. 나 또한 그리 비루하고 천박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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