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 삼십육계 가운데 병전계에는 가치부전(假痴不癲)이라는 것이 있다. 풀어 해석하면 거짓으로 바보인 척 하더라도 미치지는 말라는 것인데, 바보는 곧 순응하는 것이고 미친다는 것은 대세를 거스르는 것이니 결국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라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말로 외눈박이 마을에 가면 두 눈 가진 것이 이상하게 여겨진다는 것이 있을 것이다. 모두가 눈이 하나라면 같이 눈이 하나가 되어야지 둘인 채 있어서는 고립되기 쉽다.


당장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 힘도 세고 세력도 더 크다. 그러면 그냥 죽여달라 바짝 엎드리는 것이다. 비웃으면 오히려 좋다. 멸시하고 모욕하면 기쁘게 받아들인다. 나는 바보다. 간도 쓸개도 염치도 양심도 없다. 자식도 내놓으라면 내놓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죽이라면 기꺼이 죽여준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음 기회를 노려 볼 수도 있다. 괜히 자존심 지켜보겠다고 어설프게 고개를 치켜들었다가는 바로 먼저 죽임을 당한다. 혹시 모를 기회도 노려보지 못하고 처음부터 경계를 사서 말끔하게 제거당할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가치부전이다. 바보가 되라 하면 바보가 되고 미치라 하면 미치는데 그러나 정작 상황 자체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안희정의 보수화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보수가 주를 이루고 있다. 스스로 진보입네 중도입네 하는 유권자 가운데도 따지고 보면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다. 노무현의 실패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노무현의 실패 이후 노무현을 따랐던 이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야 말로 바로 그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시민이었다. 지역주의를 깨보려 했고 정당문화를 바꿔보려 했다. 민주당보다 왼쪽에서 제 3세력을 만들어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철저히 실패했다. 결국 남은 것은 싸가지없다는 오명 뿐이었다. 바로 그 싸가지없다는 말이 위에 이미 언급한 미친 짓에 대한 냉엄한 평가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안철수는 민주당의 오른쪽에서 3당인 국민의당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노무현이 유시민더러 열린우리당을 깨고 나가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하라 충고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대세다. 차기를 노리려면 대세에 순응해야지만 한다. 큰 흐름에 편입해 있어야 나중에라도 기회를 노려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에 있어 대세란 무엇인가. 어째서 그동안 민주당은 끊임없이 외연의 확장과 중도공략이라는 명분으로 우클릭만 반복하고 있었는가. 민주당 지지자들도 항상 하는 말이다. 집권을 위해서는 보수적인 스탠스가 중요하다. 문재인보다 안철수가 한때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도 문재인에 비해 안철수가 보다 오른쪽에 있었다는 사실이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성공하려면 보수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보수를 앞세울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보수가 숨죽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침묵하는 다수의 유권자들은 보수에 더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거스르며 싸우기보다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겠다.


실제 지자체장으로서 이재명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오히려 보수와 더 가깝게 지낸다. 보수를 더 가깝게 설득하고 이해시키면서 그들을 동반자로 여기려 한다. 특히 한 집단을 이글어갈 리더에게 적이 있어서는 안된다. 적이 있더라도 최소여야 한다. 더 많은 우군을 만들고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냄으로써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 상당히 보수적인 충청권에서 지자체장을 한 것도 나름대로 한 이유가 되고 있었을 것이다. 보수적인 노령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며 정치라고 하는 현실을 바로 직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더 많은 지지를 받는 쪽이 강한 것이다. 더 많은 아군을 가지는 쪽이 더 유리한 것이다. 그것이 정치다. 자신의 이념이나 성향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말하자면 철저한 직업정치인이다. 유권자의 지지에 죽고 사는 말 그대로 정치인인 것이다. 안희정을 높이 사면서도 그다지 끌리지 않는 이유다. 그것이 유리한 것도 알고 따라서 더 효과적인 것도 아는데 그다지 끌리지는 않는다. 자칫 바보인 척 시늉하다가 진짜 바보가 되는 경우도 역사에는 적지 않다. 선이 중요하다. 다시 멀쩡히 제정신을 차렸을 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매우 아슬아슬하다.


안희정의 선의를 인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희정이 말한 '선의'라는 말에도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다. 안희정이 생각하는 정치란 그런 것이다.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오히려 반대편의 힘을 얻어 자신의 날개로 삼는다. 충청도지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확인했고 지금 후발주자로서 높은 지지를 보이며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자신은 특정한 지지자가 아닌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 나쁘지는 않다. 물론 좋지도 않다. 그게 더 중요하겠지만.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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