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같은 경우 내가 없는 곳에서 누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내가 알지 못하면 없는 것이다. 내가 모르면 아예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만든 허상의 내가 공격당하는 것이지 정작 나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단지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자기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 이미 죽은지 오래인데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그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대화를 나눈다. 내가 없지만 그러나 내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거론됨으로써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름이란 곧 나 자신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우연히 한 번 스치지도 못한 사이인데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이름을 듣고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 좋은 이름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할 테고, 만일 나쁜 이름이라면 그야말로 원수를 만난 듯 경멸과 혐오, 심지어 폭력까지 휘두르려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중국의 고전소설 '수호전'에서 단지 풍문으로 전해들은 이름에 불과함에도 급시우 송강에 대한 평판만으로 그를 극진히 예우하던 강호의 호걸들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제멋대로에 난폭한 살인귀에 불과한 흑선풍 이규마저 그런 송강을 존경하여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굽히고 따랐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런 이름을 가질 수 있다면 천하로부터 인정받고 모두로부터 예우받을 수 있었다.


후한말 환관과 결탁한 탁류의 대표로서 4세 3공의 명문으로 꼽히던 원가의 후예 원소가 청류 사이에서 높은 명성을 얻고 그를 기반으로 당시 최강의 세력을 일구었던 것도 그 또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은 3년 시묘도 법도대로 제대로 치르기 힘들다. 엄격한 예법에 따라 철저히 금욕하며 시묘를 다한다는 자체가 이름있는 선비들 사이에서도 회자될만한 희귀한 사례였었다. 그런데 그것을 무려 의붓어머니와 양아버지의 몫까지 6년이나 치러내고 있었다. 워낙 출신이 출신인지라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살폈을 테니 시묘과정에서 트집잡힐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보는 것이 옳다. 어지간한 유학자도 3년을 다하기 힘든데 무려 6년을 해냈다. 그것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적모와 양부의 상을 모두 치러내고 있었다. 그때부터 유학을 숭상하던 청류는 적극적으로 원소와 교유하기 시작했고, 당고의 변을 전후로 많은 청류가 조정에서 쫓겨날 때도 그들을 도우면서 청류 사이에서 압도적인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십상시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하진이 원소를 측근에 두었던 것이나, 하진이 살해당하자 원소가 궁으로 쳐들어가 환관들을 몰살시킨 것도 그런 연장이었다. 그러니 원가의 후예라지만 얼자라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시작했던 원소가 혼자힘으로 하북을 평정하고 최강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었다. 처음 순욱마저 원소의 휘하에 있었을 정도이니 원소의 위세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참고로 순욱이 원소와 등지게 된 것은 원소가 사사로이 낙양의 황제를 대신하여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 것이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원소는 당시 한왕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북해태수 공융이 황건적 잔당의 공격을 받아 위태롭자 공손찬의 휘하에 있던 유비에게 구원을 청했는데 이때 유비가 공자의 후예이자 당시 명성이 자자한 유학자이던 공융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구원을 요청해준 것에 대해 무척 감격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상 유비의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라 할 수 있었다. 공손찬 휘하에서 단지 싸움을 조금 잘하는 무장에서 대의를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도울 줄 아는 의인으로서 난세로 빠져들던 당시 중국의 천하에 널려 이름을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불리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겸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기꺼이 이미 명성이 자자하던 조조와 맞서고 있었다. 사실 이것이 유비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다 할 수 있을 텐데, 하필 조조가 서주에서 무참한 학살을 저지르고 난 바로 뒤에 그 학살을 멈추고 도겸을 구하기 위해 유비가 도착해서 그와 맞서고 있었다. 물론 진짜 유비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황제의 밀조를 가지고 허도를 탈출하여 조조를 토벌하고자 나서고부터였다. 실력으로 천하를 아우르다시피 한 조조와 맞설 수 있는 마지막 대의이고 정의였다.


어째서 유비는 당시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형주의 수비를 관우에게 맡기고 있었던 것일까. 무장으로서는 뛰어나지만 한 지역을 다스리는 책임자로서는 아직 검증된 것이 없었다. 검증되기는 커녕 이미 사대부들에 대해 오만하고 무례한 것이 여러차례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당장 형주의 명사인 반준이 관우와 불화하여 그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과연 형주의 수많은 명사들을 이름만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인물이 당시 유비군 가운데 누가 있었을까. 더구나 관우에게는 다른 유비군 장수들과는 달리 황제로부터 직접 받은 편장군과 한수정후라는 관직과 작위까지 있었다. 일개 군벌이 사사로이 부여한 관직이나 작위가 아닌 조조를 거치기는 했지만 황제로부터 부여받은 관직이고 작위였던 것이다. 당시 유비군에서 관직이든 작위든 관우를 넘어서는 것은 유비 한 사람 뿐이었다. 사실 그것이 관우를 오만하게 만든 것이기도 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되었다. 일개 시골에 불과했던 형주에서 관우의 명성과 지위를 넘어서는 인물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출사표에서 제갈량이 유비가 자신을 세 번이나 찾아와 등용한 것을 갚지 못할 큰 은혜로 여기는 내용을 적은 것도 결국 그런 연장에 있는 것이었다. 당시 제갈량의 나이가 아직 28살 정도였다. 물론 순욱의 경우는 그보다 일찍 명성을 떨치기는 했지만 워낙 후한의 명문인 순씨의 후예라는 후광도 적잖이 역할을 했던 때문이었다. 형주도 아닌 서주 출신에, 선조 가운데 그나마 이름을 떨친 인물이 제갈풍 정도였으니 집안까지 그렇게 대수로운 편이 못되었다. 그나마 누이들이 형주의 명가인 방씨와 괴씨에게 출가하여 형주의 명사들 사이에 교분이 있기는 했으나 그 가운데서도 그의 재주를 인정하는 것은 최주평과 서서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유비는 단지 사마휘의 천거만을 듣고 아직 젊은데다 명성도 높지 못한 제갈량을 무려 세 번이나 찾아가 그를 등용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다름아닌 자신의 이름을 알아준다. 단지 이름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고 예우해준다. 이 알아준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훨씬 후대인 명나라 때도 정작 사대부들은 자기에게 학문을 가르쳐준 스승보다 자신을 급제시킨 시험관을 더 스승으로 여기고 따랐을 정도였다. 일개 시골의 무명의 촌부를 단지 이름만 듣고 찾아와서 나라의 선비로써 예우하여 등용한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을 인정해 준 큰 은혜일 수 있는 것이다. 역시 이름과 관계있다.


그렇다 보니 고대 중국인들은 그야말로 이름에 살고 이름에 죽었다. 이름을 행동의 동기이자 목적으로 삼았다. 이름을 널리 알기기 위해서.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그래서 나온 말이 입신양명이다. 그저 관직만 높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얻고 부귀를 누려도 결국 그것을 모두가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다시 금의환향이다. 자기가 성공한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해 영원과 불멸을 얻으려 했었다. 자기가 죽어도 이름은 남는다. 이름은 남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된다. 영혼보다 더 확실하다. 그렇다면 어떤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오고갈 것인가. 그래서 정명과 청명을 얻기 위해 많은 충신과 열사와 의사들이 목숨을 걸고 불의와 부정과 맞섰던 것이었다. 지금 자신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도 청사에 반드시 그 이름을 바로 찾아줄 이가 있다면 불멸의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조선조 세조 당시 세조의 불의한 찬탈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모의했던 사육신은 가족들마도 모두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후손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러나 이름만은 남아 충성의 상징처럼 지금까지도 여겨지고 있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당시에는 오히려 신숙주가 더 많은 영화를 누리고 그 후손 역시 크게 번창하여 지금도 상당한 수가 남아있지만 신숙주에 평가는 성삼문 등에 비하면 그나마 좋게 봐줘야 능력있는 재상이었다는 정도다. 더구나 문종의 고명까지 받은 입장에서 문종의 당부를 어기고 단종의 죽음에까지 앞장선 배신행위는 최소한 신숙주의 이름을 거론할 때는 그 후손들마저 비웃을 정도가 되었다. 죽고 나서 이름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지만 어차피 죽고 나면 관직이고 재물이고 아무 의미도 상관도 없는 것이다. 후손을 많이 남긴다고 이미 죽었는데 그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을 리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이름이다.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 무엇보다 잊히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영원히 사람들 사이에 잊히지 않고 좋은 이름으로 거론되어야 한다. 죽어도 영원히 사는 방법이다. 그것이 천국이고 그것이 곧 죽은 이의 지옥이다.


더 나은 이름을 위해서. 더 훌륭한 이름을 위해서. 그래서 벼슬도 하고 권세도 누린다. 부도 쌓고 그것을 세상에 과시하기도 한다. 확실히 그런 점에서 조선은 삼국 가운데서도 가장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름을 알리기는 해야겠는데 그것을 자기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이름을 알아주는 것도 인정하는 것도 오로지 자신의 이름을 전해들은 타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이름에 대한 평가는 틀림없이 옳다. 그러므로 혼자 있을 때도 누가 있는 것처럼, 아무도 보지 않아도 알지 못하는 먼 곳에서, 혹은 먼 후손들이 직접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항상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 물론 그런 정도로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한 선비는 조선사회에서도 매우 드물기는 했다.


지금 와서 보면 상당히 이해안가는 불합리한 행동들일 수 있다. 고작 이름이 뭐라고. 조상의 위패가 뭐라고.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들이 살아가게 하는 이유였다. 평균수명도 짧았다. 언제 어떻게 죽을 지 몰랐다. 후손이라도 남길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아예 일족이 씨몰살당했다.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할 신따위 현실적이던 중국인들에게는 없었다. 신이 아닌 사람에 맡긴다. 신이 아닌 사람들의 눈과 귀와 평가에 맡긴다. 역사에 맡긴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사람이 죽어도 이름이 남는다. 영원히 불멸로 살아남을 수 있다.


사실 이 이름이 아니라면 고대중국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마치 죽기 위해 사는 듯 거리낌없이 죽어간다. 가족도 친지도 돌보지 않는다. 부성이란 없는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이다. 지금도 그 이름을 위해 목숨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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