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되었을 것이다. 악착같이 폐지를 주워다 파는 어느 건물주 노인에 대한 논쟁이 붙었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아끼며 모았으니 건물주가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본받아야 한다. 한 편으로 아무리 그래도 그런 폐지를 모아 겨우 생계를 해결하는 이들도 있는데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닌 건물주가 그것마저 가져다 팔아야겠는가. 당연히 나는 후자였다. 폐지 아무리 팔아봐야 건물주 입장에서 용돈벌이도 안 됨을 알기 때문이다.


부자에게 지워지는 사회적 도덕적 책임과 의무와 같은 것들은 사실 그와 같은 비례관계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절실하고 절박한데 누군가에게는 그저 소소한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자기와 가족의 목숨이 걸린 일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누구에게 우선해야겠는가. 그러니까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누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남들보다 덜 아쉽고 덜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만큼을 더 간절하고 절실한 이들을 위해 조금은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부자에게 세금도 더 내고 기부도 더 하란다고 생계가 위험할 정도로 많은 돈을 내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되어서도 가난하다. 남들 100억 가졌는데 난 10억밖에 가지지 못했으니까. 누구는 100층 건물을 가졌는데 나는 10층 건물밖에 가지지 못했으니까. 누구는 아파트만 10채인데 나는 2채밖에 가지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더 불쌍하다. 그러니까 내가 더 어렵다. 그래서 수 억 대 건물을 가진 건물주가 정부의 보조로 겨우 살아가는 노인의 폐지까지 가져다 팔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폐지가 노인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건물주가 폐지를 주워다 팔면 노인은 그만큼의 벌이를 포기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는 아직 더 가난하므로 그 얼마 안되는 돈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내가 더 아쉽고 급하다.


한국사회에서 오히려 가진 이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더 가혹한 이유다. 복지 좀 하려 하면 가난한 사람을 위해 퍼준다며 난리를 쳐대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쓰는 것이 퍼주기이고 낭비인 이유는 그만큼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몇 채나 가진 서민을 위해서 보유세를 낮춰야 하고, 수 십, 수 백억 하는 부동산을 가진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서 공시지가도 올려서는 안된다. 대기업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니 그를 위해 법인세도 낮추고,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올리거나 노동시간을 줄이는 일도 해서는 안된다. 워낙 빠르게 성장하다 보니 대부분 국민들의 의식이 가난하던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수 십억의 재산이 있어도 아직 가난하던 시절의 기억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며 그때 수준으로 돈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 부자들이 특별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런 자각을 갖기에는 재산형성의 기간이 너무 짧았다 보는 것이 옳다. 그런 부자들을 보고 새롭게 부자가 된 이들도 따라하게 된다.


왜 이런 생뚱맞은 이야기들을 하는가. 분명 여성들이 그동안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약자이고 희생자였던 것은 맞다. 남성들이 거의 대부분 사회적 역할을 독점하는 동안 여성을 일방적으로 소외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여성이 과연 남성과 사회적으로 대등한가 묻는다면 아니라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여성이 남성들보다 약자인가. 항상 모든 여성은 약자이기만 한 것인가. 여성 국회의원이 내놓은 법안으로 인해 다수 남성들의 삶이 영향받고, 여성 장관이 내놓은 정책으로 인해 대부분 남성들은 일상을 강제당한다. 여성이라서가 아니다. 그것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같은 공적인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도 여성은 그저 피해자이고 희생자이기만 한 것인가.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은 공동체의 절반을 이루는 남성에 대해 어떤 책임도 의무도 가지지 않는 것인가.


내가 언제부터 어떤 논리로 여성주의를 비판해 왔는가 떠올려 보라. 내가 왜 여성주의자들에게 기생페미니즘이라며 모욕적인 표현까지 쓰게 되었을까? 이미 권력을 가졌다면 자신들은 강자다.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까지 되었다면 그에 걸맞는 공동체에 대한 공적인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다. 여성이기 이전에 공인이며 남성우월주의 사회의 피해자이기 이전에 공동체의 절반을 이루는 남성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공적인 존재다. 그런데 어떠한가? 그러나 여전히 여성은 오로지 약자이고 피해자일 분이니까. 약자이고 피해자로서 여성의 권리를 챙기는 것만이 최우선일 테니까. 그래서 윽박지른다. 그래서 하소연한다. 앙탈부린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선의에 기대어 자신들은 오로지 약자이고 피해자라며 일방적인 양보와 배려만을 요구한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약자이고 피해자이니 그냥 보아 달라. 공동체의 절반인 남성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강자인 남성들의 몫이고 약자인 자신들은 그저 여성들의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여성주의자 자신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약자다. 여성은 피해자다. 그러므로 양보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타협해서도 안된다. 안희정 전지사의 부인에 대한 공격도 그런 맥락이다. 여성이기 이전에 아내다. 아이들의 엄마다. 여성이 여성으로서만 존재하는가. 남성 역시 남성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수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주장이고 정책임에도 기꺼이 여성들의 편에서 행동을 함께 하고는 한다. 자신들의 어머니이거나 딸이거나 아내이거나 혹은 동료들의 이야기일 수 있으니까. 여성들 역시 자신들의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남편이고 동료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깡그리 무시한 채 오로지 약자이고 피해자인 여성만 남기려 한다. 그들의 억울함과 원망과 분노와 증오와 공포만을 남기려 한다.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강자인 남성들의 일방적인 이해와 배려와 양보 뿐이다. 그를 위해 남성들에게 죄책감을 강요하려 한다.


여성은 약자다. 여성은 피해자다. 그러므로 연민해야 할 존재다. 동정해야 할 존재다. 여성 스스로가 그렇게 여기도록 만든다. 자기를 가난하게 여기도록. 자기를 불쌍하게 안타깝게 여기도록. 그러므로 오로지 자기만을 바라보도록. 공동체를 해체한다. 다른 모든 사회적 역할로부터 여성을 분리하고 약자이고 피해자인 여성만을 남긴다. 자기연민을 통해 자기 아닌 다른 존재를 돌아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여성주의자인 자신들이 있다. 특정 대학 출신들이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여성주의를 앞세우게 되었다는 음모론이 음모론만은 아닌 이유다. 증오와 공포야 말로 권력의 원천이다. 특정한 대상에 대한 증오와 공포는 대중의 자신들에 대한 의존을, 기대를 강화시킨다. 과거 보수진영은 북한에 대한 공포와 증오에 기대서, 민주진영은 그런 보수에 대한 공포와 증오에 기대어 연명해 왔었다. 그것을 여성주의자들도 반복한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다른 사회적 약자나 피해자들에 대해 관심을 돌릴 필요가 없다.


여성주의자 가운데 오히려 다른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의 표현을 서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여성주의자들이 지지하는 여성들의 사이트에서 그같은 표현들이 오히려 전혀 거침없이 나오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 할 수 있다. 가난한 남성들을 경멸한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지 않은 남성들을 멸시하고 차별한다. 그래도 된다. 자신들은 약자이므로. 자신들은 오로지 피해자이므로. 오로지 자신들만이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강자인 남성들이야. 그런데도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잘난 남성들이 아닌 어떻게 대해도 상관없는 약자에 대해 자신들의 폭력성을 드러내며 그것을 정당화한다. 여성이란 그렇게 권력이 된다. 자신보다 강한 남성이 아닌 자신보다 약한 남성에 대해 더욱 무자비한 권력이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여성가족부이고, 그런 여성주의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인 것이다.


남성들이 아무 생각이 없어 여성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진짜 여성을 혐오해서, 여성의 현실을 아예 몰라서 반대하는 경우도 물론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여성주의에 우호적이던 남성들마저 이번 정부들어 여성주의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번 정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동안 막연히 그래도 공동체를 위한 것이겠거니 호감으로 대하던 여성주의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리고 말았다. 강여상이나 제갈량은 과연 옳았다. 일단 권력을 쥐어주고 하는 것을 봐야 사람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권력이 주어졌을 때 여성주의는 어떤 행동들을 보이겠는가. 과연 여성주의자들은 공동체에 대한 공적인 존재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인가. 오죽하면 기생페미니즘이라고까지 말할까. 자신들은 약자니까. 자신들은 피해자니까. 그런데 또 그런 것이 먹힌다. 권력이라는 구조 안에서 그들마저 진짜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 비하면 약자인 탓이다.


사실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성들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기는 하다. 다수 남성들의 주장이란 그저 남성이 여성주의로 인한 일방적인 피해자라는 것이다. 여성우월사회이고 여성들로 인해 자신들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 악순환이다. 여성주의자들은 남성을 앞세워 여성을 약자로 피해자로 만드는데 남성들 역시 여성주의자를 앞세워 남성을 약자로 피해자로 만들려 한다. 세상에 온통 연민과 동정의 대상인 약자와 피해자만 남는다. 그렇다고 모두를 연민하며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적대하며 약탈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그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결국은 과거의 가부장적 사회의 그릇된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대로 그저 서로 적대하며 갈등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인가.


그래서 전부터도 갈수록 심화되는 젠더갈등을 해결할 열쇠는 정작 여성주의자들 자신들의 손에 들려 있다 말해 온 것이다. 그러면 누가 어디서부터 이런 문제들을 풀어가야 할 것인가. 강자인 남성들의 양보와 배려에 힘입어 여성주의자들도 비로소 권력을 가지고 강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강자가 되어 무엇부터 해야 하겠는가. 다시 처음의 논리로 돌아간다. 사회적 강자로서 그들에게 지워진 공적인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다. 여전히 약자로서 피해자로서 사고하기보다 강자가 된 자신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수 남성들 역시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대상이다. 여성정치인이라고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되는가. 여성이 권력을 가지고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올랐다고 모두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가.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강자인 남성들이 길을 열었다면 이제는 강자인 여성들의 몫인 것이다. 강자인 남성들이 강자인 여성을 강제하는 것도 보기 안 좋다. 여전히 권력의 구조 안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강자인 여성이 강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그저 남성의 양보에만, 배려에만, 남성들의 죄책감에만, 여성들의 피해의식에만 기댈 것이 아닌. 아직 어린 아이가 울며 떼쓰면 그래도 가엾게 여겨지기라도 하지 다 자라서 떼써봐야 매만 부를 뿐이다. 더구나 대부분 남성들은 그런 떼를 감당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그저 몰라서 못배워서 그러는 것이라 여기는 오만함이란 과연 약자로서 피해자로서 가질 수 있는 태도인가.


나는 그래서 현정부를 페미니즘 정부라 여기지 않는다. 페미니즘 정부라면 현정부 아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가 높아져야 한다.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나 실제 그런가. 그러면 원인은 무엇인가. 여성주의자들 스스로도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무엇이 진정 여성들을 위한 것이고 여성주의를 위한 것인가. 그럼에도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권력을 쥔 남성들만 보일 것이다. 그들을 경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혐오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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