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회사에 강도당한 사람과 성폭행당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황을 가정해 보자. 과연 같은 범죄의 피해자로서 사실이 알려지고 난 뒤 사람들이 대하는 것도 같을 것인가? 아니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이후로도 계속 회사에 남아 일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같은 반 여자아이 가운데 한 아이에 대한 어떤 소문이 남자아이들 사이에 돌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언제 어디서 성폭행을 당했다. 그런데 정작 그 소문에는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자아이에 대한 어떤 연민도 동정도 담겨 있지 않았었다. 오히려 피해자여야 할 여자아이에 대한 경멸과 조소와 관음만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그것이 목적이었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제법 예쁘기도 하고 잘나기도 한 여자아이를 헐뜯고 모욕주기 위한 의도로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에 대한 성폭행 소문을 서로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여성이란 곧 자궁에 지나지 않았다. 여성이란 단지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따라서 여성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이유인 자궁을 지켜야 할 책임이 지워지고 있었다. 장차 자신을 소유할 남성과 자신이 임신하게 될 그 남성의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자궁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순결하게 지키고 가꾸어야 했었다. 심지어 그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걸어야 했었다. 고작 정조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면 다른 이가 죽여 명예를 지켜야만 한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상관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오히려 성폭행을 당하고서도 그 수치심과 모멸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피해자는 자신인데 왜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할까?


바로 여기에 성범죄의 특수성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성폭행만의 특별한 점이 있다. 성폭행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 성폭행을 당한 순간 피해자는 자신의 정조에 대한 가해자가 되어야 한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자궁을 순결하게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회적인 제제와 응징이 가해진다.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명예살인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숨이 끊어져야만 죽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되고 무력화되었을 때도 사람은 사회적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모욕할 때 사람은 더이상 스스로 존엄한 존재로 남아있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성범죄 피해자들이 흔히 느끼는 죽을 정도의 수치심과 모멸감이란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연 아주 오래전 정조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도 여성들은 단지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했을까?


많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해도 그 사실을 알리기를 꺼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더 당당하게 더 악랄하게 적지 않은 남성들이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성폭행을 여성의 입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다. 피해자인 여성이 아니라 가해자인 남성이 오히려 스스로 성폭행 증거를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협박까지 하는 경우도 그래서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과연 도둑이나 강도, 혹은 사기와 같은 다른 범죄에서도 가해자가 스스로 증거를 남겨 사실을 알리겠다 피해자를 협박하는 것이 가능한가. 협박을 당한 피해자가 오히려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피해자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하는 경우가 다른 범죄들에도 있는가. 


성범죄의 무고죄과 다른 범죄의 무고죄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범죄의 무고죄는 여성의 정조에 대한 고발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아예 아무 근거없이 사실을 조작해서 고발했다는 무고죄와 다르다.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다. 여성에게도 잘못이 있다. 그러니까 여성에게 얼마만큼의 잘못이 있는가?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는가? 그러니까 자신의 정조에 대해 여성은 어느 정도 유죄인가?


당장 성범죄 기사에 달린 리플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체육계에서 비로소 불거져 나온 성폭행 폭로에 대해서마저 피해자의 책임과 잘못을 따져묻는 내용들이 벌써 적지 않다. 왜 거기서 그렇게 행동했는가? 어째서 이후 그런 식으로 대응했는가? 그러니까 피해자에게 잘못은 없는가? 피해자에게 책임은 혹시 없는가? 피해자는 절대적으로 결백한가? 한 점의 의혹조차 없이 순결한가? 그러므로 피해자가 완벽히 순결하지 못했으니 유죄다. 그런 의도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피해자는 어째서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 최선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는 최선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순결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으라.


도둑맞은 피해자더러 그때 왜 그렇게 했는가? 폭행당하고 강도당했는데 이후 왜 그런 식으로 행동했는가? 살해당한 피해자에게 그때 그곳에서 그러고 있었으니 피해자의 잘못이다. 하긴 그러는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성범죄에 대해서는 너무 일반적이다. 남성만이 아니다. 여성 가운데서도 그런 경우가 많다. 어째서인가? 성범죄는 피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정조, 즉 피해자의 자궁에 대해 저질러진 범죄라 여기기 때문이다. 지난 안희정 전지사의 재판에서 판사가 했다는 정조라는 발언이 문제가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피해자 개인에 대해 저질러진 범죄를 피해자의 정조에 대한 범죄로 치환한다. 문제는 그런 의도 아래에서 피해자와 정조는 쉽게 분리된다는 사실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한 행위와 별개로 피해자는 어째서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더 적극적이지도 더 철두철미하지도 못했는가. 


그래서 같은 범죄자라도 현실에서 주위의 반응이나 태도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오히려 같은 집단 안에 성폭행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때 오히려 가해자는 멀쩡한데 피해자가 내몰리는 경우도 아주 흔하게 보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 물었던 것이다. 비교대상을 성폭행 가해자로 놨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 둘 중 누가 살아남겠는가? 누가 더 오래 조직에 남아있겠는가? 심지어 학교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은 멀쩡히 학교에 다니는데 피해자만 오히려 학교측의 종용이나 주위의 시선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성범죄를 다른 범죄와 같다 여겨야 하는 것인가?


내가 극단적인 페미니즘에 대해 날선 비판을 쏟아내다가도 반페미니즘을 내세우는 인간들을 보면 한숨부터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냥 감정 뿐이다. 그냥 싫다는 감정 뿐이다. 워마드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윾튜브 같은 인간말종의 선동에도 놀아나는 것이다. 성범죄가 왜 특별한가. 성범죄가 왜 특수한가? 어째서 검경이며 사법부며 성범죄만 특별하게 다루려 하는가? 피해자를 가해자와 대질시킨 탓에 오히려 피해자와 그 동생까지 자살한 사건에 대해 분노하던 그들이 성범죄 피해자를 무고죄로 가해자와 함께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고죄 수사를 아예 말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성범죄를 수사하는 동안 뒤로 미루자는 것이고, 무고가 인지되었을 때 수사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피해를 당했다고 바로 신고할 수 있는 범죄도 아니다. 바로 경찰에 신고할 경우 주위에서 알게 된다. 가족과 친구와 학교, 혹은 직장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전처럼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미투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설사 그렇더라도 전처럼 사회는 당신을 지켜 줄 것이다. 당신을 지지하고 응원해 줄 것이다. 사소한 문제와 부작용이 있어도 그럼에도 피해자들이 솔직하게 당당하게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릴 수 있도록 한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더 우선해야 할 시급한 목표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물론 남성들만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성폭행 피해자들에 더 잔인한 2차 가해를 저지르는 것은 같은 여성들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여성만의 문제도 아니다. 남성이 피해자일 경우는 또 다를 것인가? 남성에게는 남성만의 지켜야만 하는 당위가 있다. 그런데도 단지 남성을 이유로 여성을 핑계로 사실을 외면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인가?


어려운 것이다. 살면서 느끼는 것은 세상 일이란 산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학마저도 고차원으로 가면 산수처럼 단답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것까지 모두 고려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는 것일 테지만. 그러면 나에게는 답이 있는가? 그러면 내가 이러고 있을까?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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