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해 온 여성이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어렸기에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자각조차 없었다. 조금 나이가 들고서는 그럼에도 아버지에게 반항할 경제적 육체적 능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른이 되었을 때 여성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로소 자신이 아버지를 죽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자신이 당한 일들에 대한 되갚음을 해주었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부터 이렇게 크게 이슈가 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80년대까지 쉬쉬하며 스스로가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아직도 노인 세대에서는 그런 것을 말하는 자체를 창피한 일이라며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괜히 노인층이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합의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감추고 그래서 피해자들을 억압하고 내쫓으며 없는 일이라 여기고 지나 왔었다. 하긴 불과 얼마전에도 위안부 피해자의 가족을 애들 보기 안좋다며 내쫓으려던 이웃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사회는 유린당한 정조에 대한 부끄러움보다 인간에 대한 존엄과 연민을 앞세울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가 전국민적인 공분을 불러오게 된 것은 그래서 민주화와 궤를 같이 한다.


욱일기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기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여러가지로 어수선하고 어설펐다. 아직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협력하던 이들이 정부의 요직에 남아 있었기에 강점기 역사에 대한 청산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미국의 중재를 거부하고 일본을 적대하기도 부담스런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겨우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고 있던 가난한 신생국가가 다시 경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일본과 마냥 대립만 하는 자체도 현실적이지 못했다. 이런 저런 이유가 더해지며 여전히 반일감정은 드높지만 현실적으로는 일본이라는 이웃나라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관계가 지금껏 이어져 온 것이었다. 물론 그동안 일본 역시 한국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고려하고 있었기에 큰 문제 없이 그런 미묘하고 불안한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덕분에 90년대 쯤에는 일본문화의 급속한 유입과 맞물려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 또한 꽤나 늘고 있었다. 더이상 과거사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자는 주장 역시 제법 설득력있게 들리기도 했었다. 한류 이전에 일류라 할 것이다. 그만큼 가끔 나오는 망언을 제외하면 일본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고, 경제와 문화에 있어 일본의 영향이란 현실이기도 했었다. 국제적으로는 미일동맹이 한미동맹의 상위에 존재하는 이상 일본과의 관계는 한국정부에 있어 상수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90년대 말부터 오랜 경제불황의 영향으로 크게 확산되기 시작한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었다. 일본의 우경화가 한국내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한국내 반일감정이 일본내 혐한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그 극단에 이명박의 일본국왕 발언이 있었고, 일본의 위안부 협상이 있었다. 둘 다 일본내 혐한여론과 한국내 반일여론에 방점을 찍은 사건들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지금에 와서 욱일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이런 맥락인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루었다. 군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근본적인 해결은 없을지라도 서로를 의식하며 조심하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거침이 없어졌다. 하필 그런 일본의 극우들이 자신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욱일기라는 것이다. 전부터도 욱일기와 관련한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일본의 우경화와 함께 욱일기에 대한 한국인의 인상 역시 명확해졌다. 저건 일본 극우의 상징이다. 당장 태극기부대 때문에 국기임에도 태극기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드는 것의 연장이라 보면 된다. 


한 마디로 과거와 사정이 달라졌다. 그때는 됐지만 지금은 안된다. 그때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심각한 문제였다. 아니면 그때는 상관없었는데 이제 하는 것을 보니 상관해야겠다. 정히 그렇게 욱일기가 자랑스러우면 거리에서 남부끄러운 소리나 지껄이는 인간들 욱일기 사용을 자제해달라 요청하던가. 과연 일본은 과거사를 반성하는가. 욱일기란 그저 전통의 깃발이기만 한가.


굳이 너무 쿨해질 필요는 없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 될 필요도 없다. 원래 인간이란 자체가 직관과 감정의 동물이다. 먼저 결론이 있고 논리가 따라붙는다. 어쩌면 일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그같은 행동들마저 어떤 자기만의 결론에 짜맞춘 논리일 수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빠지는 함정이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 그러니 저들과 다른 말과 생각을 들려주어야 한다. 아마 인터넷이기 때문일 테지만.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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