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은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평등하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다 관대한 도덕적 기준이, 어떤 사람에게는 보다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결국 공평하지 않은 도덕을 그나마 공정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에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어지간히 불리한 선택을 해도 기본적인 우월함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 반대로 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에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서야 겨우 상대에 너무 뒤지지 않을 수 있다. 키만 2미터가 넘어가고 손에 칼까지 든 강도를 상대하면서 정정당당을 따진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겠는가. 총을 들고 협박하는 살인자를 상대로 가족을 인질로 삼는다면 부당하다 말할 수 있는가. 다수의 적을 상대로 모래를 끼얹고, 함정에 빠뜨리고, 뒤에서 기습을 한다. 모두 정당하다.


온건한 수단을 사용해서 상대의 이해와 공감을 구하는 것은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상대일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설득하다 보면 언젠가는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온건하다는 자체가 결국 상대에게 자신은 맞춰가는 것을 뜻한다.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수단에 대해 상대가 판단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상대에게 맞춰 하나둘 양보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상대에게 길들여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순치라 부른다. 상대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로지 상대가 이해와 공감을 베풀기만을 막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원래의 의도는 상대의 반응에 따라 완전히 종속되어 버린다. 선택도 결정도 오로지 내가 아닌 상대의 판단에 달렸다.


일제강점기 온건주의 노선을 걷던 독립운동가들이 어느 순간 대부분 친일파로 전향해 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기는 그 순간에도 많은 온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조선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위한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을 도와야 한다. 일본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일본이 고마워서라도 자신들을 달리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맞서싸워봐야 상대가 안되니까. 싸울 수 있는 수단이란 이미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저 일본의 자비에 기대어 일본의 인정이 조선과 조선인들을 돌아봐줄 날만을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독립의지는 사라진다. 그 자체가 이미 일본에 종속된 식민지의 현실 그 자체였을 테니까. 불관용과 비타협을 앞세운 상대와의 온건주의란 그래서 한계가 명확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도 그동안 많은 온건한 여성주의자들이 있었다. 남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눈높이에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들 자신이 만든 보편작 사고와 가치에 크게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굳이 크게 다투거나 싸우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순리에 따라 천천히 진행하고자 한다. 물론 그 주된 목적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 주체라 할 수 있는 남성의 이해와 공감이었다. 그들의 호의였다. 그렇게 느리지만 조금씩 여성들을 위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왔다. 분명 성과였다. 그런데 정작 그 결과가 그나마 알량한 여성주의의 성과에 대한 남성의 비아냥과 적개심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성의 당연한 권리주장마저 무시하며 여성주의마저 남성에 종속시키려 시도한다면? 남성이 보기 좋은 여성주의란 남성을 위한 여성주의다. 여성주의는 여성을 위한 것이다.


벌써 오래전이다. 어느 여성주의 논쟁에서 한 여성주의자에게 남성은 이 논쟁에서 빠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도 어차피 남성이지 않은가. 똑같은 남성일 뿐이다. 여성의 문제는 여성 자신이 해결한다. 여성의 문제는 오로지 여성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것이다. 서운할 정도로 냉정하던 그 말의 뒤에는 그같은 시리도록 자조적인 짙은 절망과 체념이 묻어 있었다. 남성의 이해를 구해서는 안된다. 남성의 공감을 구해서도 안된다. 남성과 싸워야 한다. 남성과 싸워서 여성이 남성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남성이 타협하고 양보할 수밖에 없음을 직접 인식시켜야 한다. 일깨워야 한다.


메갈리아라는 사이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에 있어 메갈리아는 일종의 상징이다. 어째서 많은 여성들, 여성주의자들,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지식인들이 이토록 메갈리아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가. 메갈리아 역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약자인 여성이 자신을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일베와는 다르다. 일베는 기득권에 더 가깝다.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비주류가 주류의 흉내를 내는 곳이다. 비주류의 목소리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이 사회 기득권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강자와 약자의 도덕은 분명 다르다 말했었다. 허용의 범위가 다르다. 메갈리아를 옹호한다 해서 메갈리아가 한국사회의 주류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의 주장이 당장 현실이 될 수도 없다. 하물며 그보다 더 약하고 영향력도 없는 보다 온건한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그럼에도 그런 주장들을 하는 이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벌써 여러해 전이다. 장애인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시위를 했던 적이 있었다. 도로를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며 정부에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언론이 그를 비판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네티즌 역시 그에 적대적이었다. 불편하다. 시끄럽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아무에게도 불편끼치지 말고 조용하게 시위하도록 하라. 실제 그렇게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장애인들의 목소리는 그나마 비판적 기사로조차 다루어지지 않았다. 남성들이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서 남성들이 바라는대로 양보만 계속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남성들이 바라는대로 온건하고 착실한 투쟁만을 한다면 여성주의는 과연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정확히 메갈리아를 옹호한다기보다는 어떻게 해도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희망도 기대도 가질 수 없는, 그럼에도 막연한 기대로 점차 순치되어 정체를 잃어가는 현실에 대한 반발일 수 있다. 메갈리아라고 하는 사이트 자체가 아닌, 그런 주장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배경들에 대한 공감이다. 남성은, 그리고 남성들이 만든 지금의 사회는 이해와 공간의 대상이 아니다. 대화와 타협의 대상도 아니다. 극복과 저항의 대상이다. 투쟁과 타도의 대상이다. 혁명가가 된다. 온건한 수단으로 불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과격한 수단 뿐이다.


메갈리아가 어떤 사이트인가를 따지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시작은 특정한 몇몇사람이 했어도 결국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그리로 이끄는 것은 전혀 다른 이유인 것이다. 어째서 메갈리아에 비판적이면서도 메갈리아와 함께일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배울 만큼 배웠고 남들보다 똑똑하기도 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메갈리아의 편을 드는 것일까. 그러면 메갈리아가 나타나기 전 그들은 여성주의에 대해 우호적이었는가. 메갈리아가 아니었다면 메갈리아에 비판적인 다수 네티즌들은 여성주의자의 편에서 여성주의를 위해 싸울 수 있었을 것인가.


불통의 사회가 만든 비극이다. 서로를 향해 총과 자살폭탄테러를 주고받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와도 닮았다. 온건주의는 설 곳을 잃는다. 여성주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었다. 메갈리아가 시작이 아니었다. 여성주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여성 자체에 대한 비하와 멸시로까지 이어졌다. 작용은 반작용을 부른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미 많은 여성주의자들에게 남성이란 단지 자신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함께 대화하고 이해를 구할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다. 남성과 여서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산다.


회의적인 것이다. 메갈리아가 아니라면 여성주의는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인터넷에서 여성은 그나마 지금보다 더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남성들은 여성을 다르게 보게 될 것인가?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이기에 어느새 메갈리아에 이끌리는 여성도 늘어난다. 어느새 인터넷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 심지어 그것을 감추려는 최소한의 시도조차 안보이는 남성들의 속내가 여성들을 메갈리아로 등떠밀어 보내고 있다.


남성은 적이다. 여성은 차라리 적조차 아니었다. 차라리 적이기를 바란다. 메갈리아에 가지는 유일한 불만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이고 악이기를 선택하라. 정작 남성들이 만든 논리와 가치의 뒤에 숨는다. 자신들은 원래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관용과 배려를 바라며. 비겁하다. 최소한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의 자살폭탄테러범들은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그들은 과연 자신의 신념을 위해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일베사냥에 이어 메갈사냥이다. 강자라는 자신감이다. 사회의 룰을 자신들이 정한다고 하는 자존감이다. 그럼에도 여성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 굴복할 수밖에 없다. 순종해야만 한다. 끝이 없다. 답은 명확하다.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무엇이 원인이고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한 걸음만 물러서면 되는데, 역시 이 경우에도 대칭성은 적용되지 않는다. 보다 우선해야 하는 주체가 있다.


어차피 메갈리아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이해하고 일정부분 공감하며 아마 대부분은 이해도 공감도 못할 것이다. 너무 이질적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다고 배척하지 않는 것은 그런 대상도 한국사회와 같이 극단으로 기운 사회에서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 때문이다. 늦었다. 아직 너무 뜨겁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은 아직 비주류에 머물러 있었다. 하는 사람들만 했다. 단지 인터넷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보통의 일반 대중과 다른 무언가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당연히 비주류로서 당시의 이른바 네티즌들은 사회의 주류에 도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유행하게 된 것이 바로 '엽기'코드였다.


엽기란 기성의 관습과 관성을 부수는 것이다. 기존의 인식과 사고를 부수는 것이다. 혐오스럽고 기분나쁠수록 그것은 옳은 것이었다. 당시도 차마 두려워서 클릭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유행처럼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김구라의 등장 또한 그런 연장에 있었다. 당시 기만적이고 권위적인 기성언론을 비판하며 상스럽고 저렴한 언어로서 인터넷 대중들을 사로잡았던 딴지일보의 한 컨텐츠로써 '김구라와 황봉알의 시사대담'은 시작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금기인 - 그것도 아주 지독할 정도의 욕설들을 공공연히 내뱉어가며 사회각분야를 씹어대는 방송은 그 가운데서도 열렬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나 역시 당시 김구라의 방송을 즐겨 듣던 애청자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 당시 인터넷에 발을 담그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김구라의 열렬한 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후련했다. 통쾌했다. 아무도 그렇게까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입이 바로 간질간질한데 누구도 감히 나처럼 들을 욕해주지 않았었다. 불만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항상 불만은 넘친다. 그래서 여기 블로그에서도 내 글은 항상 표현이 거칠다. 세상에 불만이 많던 그야말로 아웃사이더를 위한 방송이었다. 그마저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2002년의 대선은 어쩌면 그같은 인터넷 대중들의 뿌리깊은 비주류의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을 것이다. 인터넷이 대통령을 만들었다. 인터넷의 힘으로 마침내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인터넷은 비주류가 아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거치면서 과감한 정책적 지원과 투자로 고도로 발달한 한국의 인터넷환경은 인터넷이라는 자체를 대중화 보편화시켰다. 이제는 인터넷 없이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인터넷을 지배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들 네티즌이다.


이제는 오히려 평가하는 입장이 되었다. 사회의 기성권력에 도전하던 비주류에서 어느새 대상을 평가하고 때로 응징할 수 있는 또다른 권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문희준과 타블로였다. 백만안티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 가운데 자신들의 힘으로 문희준을 어떻게 해아겠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냥 놀이였다. 그냥 게임이었다. 그래서 더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것이다. 그에 비해 타블로의 경우는 타블로를 파멸시키겠다느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대중의 눈에 전과 전혀 다름없이 방송을 하는데도 꼰대라 불리게 된 김구라가 그 다라진 위사을 말해준다.


아니꼬운 것이다. 피곤한 것이다. 늬들이 뭔데 사실 일베를 만들어낸 것은 인터넷에서조차 어느새 권위를 앞세우기 시작한 일부 극성 네티즌들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깨시민이라 말하기도 한다. 전과 하는 것이 전혀 다르지 않은데 이미 사회적 위치부터 전혀 달라지게 되었다. 실질적힌 힘이 그들의 손에 쥐어지고 있었다. 그 힘이 실제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수의 힘으로 더욱 인터넷에서 자신과 다른 소수자들을 억압한다. 반발하여 예전 그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엇나가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엽기다. 혐오와 공포와 불쾌감이 기존의 관성과 인식을 부수는 쾌감으로 돌아온다.


과거와 똑같다. 일베에도 그것은 단지 놀이다. 무언가를 실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일관된 의지가 없다. 공유하는 목표나 의식이 없다. 조롱하며 논다. 비웃으며 논다. 모욕하며 논다. 그런 자신들을 욕하는 것을 들으며 역시 계속해서 논다. 문희준을 욕하던 때처럼. 그리고 마찬가지로 당시 네티즌을 비웃던 기성의 권위들처럼 기성의 네티즌들은 인터넷을 경멸함으로써 자신의 정의를 달성한다.


솔직히 일베와 2000년 초반 유행하던 엽기코드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그때 유행하던 것들 가운데는 당시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들마저 상당했다. 그리고 이제 일베가 인터넷의 주류가 된다면 이번에는 또다른 엽기코드가 일베에 도전장을 내밀게 될까.


물론 가치의 문제다. 정의의 문제다. 인간으로서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선 표현들도 적지 않다. 비판한다. 부정한다. 이 사회가 고유하는 보편의 정의를 부정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권력이 바뀌기까지 기성의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틀렸다 여기지 않는다. 다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도전인 결국 반역으로부터 시작된다. 반역은 패역이다. 무도다.


문득 떠올랐다. 벌써 오래전 옛날이야기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김구라의 욕이 대중적 코드이던 시절이 있었다. 서로 불쾌해하고 혐오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즐겼다. 다른 일반의 대중이 보는 그 모습은 어땠을까. 역사는 반복하며 발전한다. 김구라는 스타MC로서 확실히 방송의 주류가 되었다. 격세지감이다.

사실 이것은 기자 역시 마찬가지다. 항상 보는 얼굴이다 보니 익숙하고 친숙하다. 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역시 그들과 같은 부류라 생각한다. 더구나 좋은 기사 써달라 친절한 웃음까지 지어보이면 이제는 자기가 저들의 위에 있는 것 같다. 자칫 기자들이 유명인들의 위에서 그들을 굽어보는 기사를 쓰게 되는 이유다. 하물며 연예부기자는 자기가 쓴 기사로 연예인 하나쯤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늘 쓰는 글들이 그런 글들이다. 비평이란 대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거리를 두는 건 좋은데 그 거리에 자꾸만 익숙해진다. 상대를 대상화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에 길들여지게 된다. 마치 자기가 하는 말들이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자기가 쓰는 글들이 무슨 대단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더구나 누군가 주위에서 추켜주는 사람까지 있으면 거의 완벽하다. 아, 나도 겪어 본 일이라 안다. 그래봐야 고작 어디서 글이나 찌끄리는 수준이다.

타인은 객관화하는데 자신은 객관화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도 자기 얼굴을 바로 보지는 못한다. 거울이 필요한데 어떤 거울로 비춰 볼 것인가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이다. 그마저도 자신의 주관에 따른다. 자기에 도취된다. 정확히 자기에게 속고 만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영영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가지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모씨같은.

유력정치인을 훈계한다. 타인이기 때문이다. 전혀 상관없는 남이기 때문이다. 굳이 건드리기보다 그냥 내버려두는 쪽이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건드려봐야 이익도 없고 괜한 논란만 일크일 수 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지만 먼지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간다. 많은 자타칭 논객들이 빠지는 함정이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줄 안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주제이면서. 가끔은 안쓰럽다. 이름까지 알려져 있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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