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론에 따르면 먹고 마시고 싸고 입고 자고 섹스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욕구들을 1단계인 생리적 욕구로 분류한다. 아니 인간이 아니더라도, 아니 심지어 생명인지조차도 애매한 바이러스조차 당연하게 가지는 본능이기도 하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먹고 어떻게 배설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쫓아 움직이는 한 편 후손을 남기기 위해 유전자를 복제하고 증식한다. 그래서 그런 활동들을 하는 유기체를 따로 정의해서 부르는 말이 생명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이고 지금껏 그 존재를 이어 온 것이다.

 

1단계의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로 인간은 안전이란 것을 고민하게 된다. 자신을 위협하는 외부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고 그로부터 회피해여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들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역시 신경이란 것이 존재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생명이라면 대부분 가지는 본능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작은 새우들조차 물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물결이 거세게 일면 포식자가 나타난 것을 알고 바쁘게 사방으로 흩어져 숨으려 한다. 사람이 손으로 잡으면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도 칠 줄 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안전하게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당연히 그같은 안전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하고 더욱 철저할수록 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더 높아지게 된다. 그렇게 수 억 년을 진화해 온 결과인 것이다.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들이란.

 

3단계인 인정의 욕구는 어쩌면 새끼 때부터 부모와 강한 유대를 경험하게 되는 포유류나 조류 이상에서나 가지는 욕구일 것이다. 자기 아닌 다른 존재와 동질성을 느끼고 따라서 동류의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는 충동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항상 정확하지는 않아서 갓 알에서 깨어난 새끼새들은 처음 본 존재를 부모라 여기고 무작정 따르기도 하고, 어린 새끼 때부터 기른 고양이 역시 자신을 보살피는 존재를 부모라 여기며 평생을 새끼인 채로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하긴 다 자란 고양이조차 자신을 돌봐주는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에 맞춰 여전히 새끼인 채로 행동하는 자체가 인간에게 인정받고 그에게 소속되고자 하는 본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나 그래야 포유류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 홀로 떠도는 것보다 무리에 속하고 서로 유대감을 갖는 것이야 말로 생존의 확률을 높여준다. 그래서 그를 위해 고도의 소통수단까지 진화를 통해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4단계인 존중의 욕구는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가 집단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찾게 되는 단계인 것이다. 이를테면 당연히 자기도 배가 고플 텐데 자기 새끼도 그렇다고 형제도 아닌 어린 고양이를 위해 먹을 것을 양보하는 고양이의 모습도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당연하게 생명으로서 더 확실하게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하고, 생존의 가능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무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혹은 그럴 수 있음을 다른 존재들에게 증명해 보여야만 한다. 사냥에 성공하고서 괜히 길게 울부짖거나 자랑하듯 주위를 서성이는 것 역시 그런 경우에 속할 것이다. 이만큼 내가 대단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나를 모두가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생존과 상관없이 활짝 펼쳐진 공작의 꼬리깃털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처음에는 당연히 번식을 위한 것이었을 테지만 그 이상의 무리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기희생적 자기과시적 행동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자아실현의 욕구다.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인간만이, 인간이 가지는 고도의 지능과 지성에 의해 가지게 되는 추상적인 욕구라 할 수 있다. 자연에 의해 부여된 본능이 아닌, 혹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이 정의한 자신이라는 존재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상적인 자신이라는 존재를 위해 때로 본능을 거스르고, 때로 자연적인 욕구마저 거스르며, 자신이 정의한 자기라고 하는 가치만을 오로지 추구하려 한다. 문제는 과연 자신이란 무엇인가? 자기란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무엇을 통해 그를 증명하고 실현하려는 것인가? 그래서 모든 개인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통해 그것을 이루고자 하고, 누군가는 아무도 하지 않는 모험과 도전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려 하며, 오로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선택들을 통해 자기만족을 얻고자 한다. 공통점이라면 모두가 이전의 욕구들과는 상관없는 무모하고 생기는 것 없는 충동들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폭풍우치는 바다로 일부러 배를 몰아 나가고, 숨쉬기도 힘든 혹한 속으로 자신을 내던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 높은 하늘로, 더 깊은 바다로, 더 험한 오지로, 하긴 그렇게 인간은 고향인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나간 것이기도 하다. 흔히 사람들이 감정적이 되지 말라 할 때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어째서 맹자는 선비가 말해야 할 것은 이익이 아니라 인의라 외쳤던 것이었을까? 어려서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당연히 사람에게 이익이 더 중요하지 인의가 무에 그리 중요한가? 위정자라면 당연히 백성들에게 이익이 될 것을 고민해야지 도움도 안되는 인의로 고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가 그렇게 대단하게 여겨졌었다. 스탈린이며 마오쩌둥이 그리 훌륭한 인물들로 여겨졌었다.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박정희를 추종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백성들 먹여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민주주의고 인권이고 자유고 당장 백성들이 배두드리며 편히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백성이다. 국민도 시민도 인민도 아닌 백성이어야 한다.

 

최근 좀 배웠다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언론지면을 통해 그리 떠들어대고 있다. 자존보다는 생존이다. 존엄보다 생존이다. 이미 말했다. 그저 살아남기만 하는 것이라면 아메바도 집신벌레도 굳이 가르치거나 배울 필요 없이 그냥 아는 생리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고. 욕구조차도 아닌 그냥 유전자 레벨에서 결정된 물리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먹을 것을 쫓아 촉수를 움직이고, 포식자를 만나면 회피하려는 동작 같은 것은 굳이 고도의 지능이나 지성 없이도 말단의 세포 수준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반응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플라나리아나 지렁이 같은 생물들은 당연하게 본능이 시키는대로 그렇게 할 뿐이라면 인간은 기껏 발달한 뇌를 가지고 굳이 그것을 변명하고 합리화하려 한다는 정도일 것이다. 자신도 아는 것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고 자아를 추구하는 인간이기에.

 

위협을 느끼기에 반응한다. 국가에, 혹은 민족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그를 위해 행동한다. 자신이 무시당한 것 같아서, 자신이 모욕당한 것 같기에 그에 반발하려 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국가와 민족, 혹은 개인이나 세계에 대한 신념과 어긋났기에 그에 분노하려 한다. 뒤로 갈수록 이익도 없고 오히려 자신의 손해와 피해가 커지기까지 한다. 그래도 전자는 위험을 회피한다는 당위라도 있지만 국가나 민족에 굳이 속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며, 무시당했다고 모욕감에 발끈해서 생기는 것은 무엇이고, 하물며 자신이 가지는 신념이나 이념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심지어 대학교수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지성이라며 제법 높은 곳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던 인간들까지 아무렇지 않게 이따위 소리를 냉정한 이성이랍시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고도의 지성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저 먹고 마시고 싸고 입고 섹스하는 그런 원초적인 욕망을 위해 봉사하는 이성이란 것인가.

 

얼마나 인간이 하찮은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하찮은 것인가. 먹고 살기 위해서. 당장 굶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언론들은 더욱 그런 기사들을 쏟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직 자신들은 굶주리고 있다. 가장 원초적인 생리적인 욕구마저 충분히 채워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걱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상의 어떤 가치도 욕구도 아직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 앞세우는 것이 공포란 감정이다. 그것도 가장 원초적인 생리적 공포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배설할 수도 없다는 생명이기에 가지는 가장 근본의 공포인 것이다. 가장 장사가 된다. 경제가 망한다. 외교가 망했다. 당장 나라가 망할 것이다. 가장 이성적이지 못한 것은 과연 어디의 누구인가.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대해 근본부터 고민할 일이다. 무엇이 냉정이며 합리인가. 그저 먹고 사는 이성이라면 짚신벌레도 이성적이다. 그저 손해보지 않는 지성이라면 태연히 자기 새끼마저 영양분으로 여기는 물고기나 곤충들이 더 지성적일 것이다. 국가도 민족도 세계도 아닌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돌아보라고. 더 고차원의 이상이나 신념보다 당장의 본능과 욕망만을 추구하라고. 그것이 진정으로 냉정한 이성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누가 그렇게 가르쳤고 어디서 그렇게 배웠던 것일까? 오히려 그런 이들이 더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현실이 섬뜩하기만 하다. 그동안의 사법농단이나 국정농단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이지만 과연 이 나라의 엘리트교육이란 어떻게 무엇을 바라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까 당시까지 아직 나는 아주 저차원의 원초적인 욕구만을 추구하던 단계였다는 것이다. 당장 대학입시가 전부이던 고등학생 시절이었으니 그럴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째서 선비란 이해가 아닌 인의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가?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 하지만 오로지 선비만은 항산이 없어도 항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인의 역할이기도 할 것이다. 오히려 거꾸로 되었다. 국민은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더 높은 고차원의 욕구를 추구하고 지식인은 더 저차원의 욕구를 이성이라 지성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과연 모두가 이익만을 주장할 때 한 사회는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사회가 과연 옳은 것인가?

 

엉뚱하게 자사고 지정철회의 이슈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과연 이 사회의 엘리트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래도 엘리트라 불리는 이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하나같이 저 모양인 것인가. 부모의 탓을 하기에는 대부분 부모들이란 장삼이사 갑남을녀 필부필부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부모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할 책임이 이 사회의 지성들에게는 있는 것이다. 학교와 교사는 그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지향하려 하는가. 한심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 사회의 지성이라 불리는 인간들이다. 끔찍하다. 

프랑스대혁명기를 살았던 작가 마르퀴 드 사드는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자신의 여러 작품들을 통해 아주 놀라운 직관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인간은 단지 욕망을 쫓는가. 아니면 욕망을 추상하는가. 추상은 이성의 영역이다. 도덕과 양심과 정의를 판단하는 인간의 존엄이다. 그런데 정작 사드는 바로 그 이성을 통해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욕망을 추상하는 또다른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성매매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개인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적절한 수단을 통해 자유롭게 해소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두어야 더 큰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성범죄는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성적 욕망을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발산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있기에 일어나는 반작용이다. 과연 옳은가? 그렇다면 당장의 성적 충동과 욕망만 해결할 수 있으면 더이사의 추가적인 충동이나 욕망은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포르노를 보면서, 그리고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사창가 근처에서 성범죄는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포르노의 합법화와도 관계가 있다. 성매매를 합법화했더니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면서 불법적인 성매매도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포르노가 유통되는 사회에서 불법적인 포르노 역시 함께 생산되며 유통되고 있었다. 인간은 욕망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재주가 있다. 욕망한 적 없는 것들마저 욕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상상력이다. 그것이 추상이다. 그것이 이성이다. 더 큰 욕망을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 그래서 항상 궁리하고 새로운 답을 찾아 나선다. 하나가 충족되면 새로운 하나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인간의 타락 역시 끝이 없다.


과연 섹스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과 한 번이라도 섹스를 해 본 사람, 어느 쪽이 더 성욕을 억제하기 쉬울까? 당장 오늘 성매매를 통해 자신의 성욕을 해결했다. 직접적인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성적 충동을 발산했다. 그러면 한동안은 어떤 충동도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부부사이에서도 어느새 찾아온 권태기를 이기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이 실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디 가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들만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부부라는 이름 아래 쌓여간다. 욕망을 가르친다. 물론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욕망을 어디서나 쉽게 단지 돈만 있으면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다.


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매매가 합법화되었을 때 성매매여성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성매매라고 하는 자체를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자신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대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인간이 도구가 된다. 인간이 수단이 된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서 수단으로서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 어째서 성매매업소 근처에서 더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는가. 포르노를 접한 사람들 가운데 성범죄의 발생빈도가 더 높은가. 그곳에서 여성은 수단이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다. 오로지 그로써만 존재한다. 포르노에 익숙한 사람치고 정상적인 여성관을 가진 경우가 드물다. 설사 성범죄가 사라지더라도 사회에는 또다른 계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멸시와 혐오가 당연한 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인간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한때는 나 역시 성매매합법화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어쩌면 나 자신은 성매매여성에 대해 전혀 차별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실제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의 문제다. 보다 다수의 일반의 문제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한 사회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어야 한다. 여성 또한 인간이어야 한다. 목적이며 존엄이어야 한다. 자신의 성욕을 위해서는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설득하여 자신의 욕망에 동의토록 할 수 있을까. 쉽다는 자체가 이미 상대를 존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을 자본의 대상으로 여긴다. 도구로서 객관화한다.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또한 자본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오랜 욕망의 정수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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