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목희가 걸렸을 때도 그리 말한 바 있었다. 이건 상납이 아닌 횡령이다. 딸을 인턴으로 취업시켰다. 차라리 딸에게 월급을 그대로 주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딸에게 지급해야 할 인턴월급마저 자기 후원계좌로 넣어 버렸다. 


그냥 일차원적으로 보자면 그저 자기 딸에게 돌아가야 할 월급마저 어머니라는 이유로 갈취한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자면 원래 지급하지 않아도 되었을 돈을 일부러 딸을 인턴으로 채용하면서까지 굳이 세금에서 받아갔다. 


원래 국회의원 상납의혹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원래 채용하기로 한 직급보다 한 단계 이상 높여 채용함으로써 법으로 보장된 임금을 보다 많이 받도록 함으로써 그 차액만큼을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계좌로 넣는다. 혹은 사무실의 운영비로 쓰고 추가로 고용된 법외인력들에 대한 인건비로 사용한다. 결국은 원래 세금에서 지급되었을 임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공문서를 위조하여 가로채는 것이다.


보좌진들도 모르고 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동의하나 도의하지 않으나 받는 돈은 같다. 단지 외부로 드러난 직급만 차이날 뿐이다. 임금은 같은데 직급은 더 높다.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후자쪽이 더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다만 국회의원과의 사이가 틀어질 경우 이것을 빌미삼기도 한다.


자꾸 상납이라 하니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보좌관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급여 가운데 일부를 후원으로 운영비로 내놓았다. 모두가 합의한 관행적 행위였다. 하지만 그 관행이 사실은 국민의 재산인 세금을 임의로 유용하는 관행이었다. 나라를 속이고 국민을 속이는 관행이었다.


딸을 인턴으로 채용하는 것은 전에도 말했듯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턴으로 채용해서 정당하게 월급을 주고 제대로 일도 시켰다면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인턴이 아니더라도 부모를, 혹은 친인척이거나 지인이기에 가까이서 돕는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채용하고서 정작 인턴으로서 일도 안 시키고 급여도 정한대로 주지 않았다. 법을 어긴 것이다. 법을 속인 것이다.


그래서 기다린 것이다. 구체적인 사실들이 드러나기를. 이런 걸 관행이라 부른다. 이미 마비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행위인지. 얼마나 크고 중대한 범죄인지. 냉장고에 머리를 식히며 찬찬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 의미에 대해서.


이러니 그놈이나 이놈이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정치인이란 다 똑같다며 냉소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최소한의 죄의식마저 없다. 세상이 그들을 그리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런 놈들이기에 세상이 이모양인 것인지.


더민주 차원에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차라리 보좌관의 수를 늘리라. 당연히 늘어난 만큼 세금에서 확실히 임금은 지급한다. 다만 후원은 금지한다. 기부도 금지한다. 보좌관들의 임금을 보호하며 규제한다.


다시 말하지만 상납이 아니다. 본질을 흐린다. 세금을 횡령한 것이고 그를 위해 공문서를 위조한 것이다. 위계로써 보좌관들에 범죄에 가담하도록 한 것이다. 모두 잡아 처벌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디까지 썩은 것인지. 한심하다.

프랑스대혁명기를 살았던 작가 마르퀴 드 사드는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자신의 여러 작품들을 통해 아주 놀라운 직관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인간은 단지 욕망을 쫓는가. 아니면 욕망을 추상하는가. 추상은 이성의 영역이다. 도덕과 양심과 정의를 판단하는 인간의 존엄이다. 그런데 정작 사드는 바로 그 이성을 통해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욕망을 추상하는 또다른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성매매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개인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적절한 수단을 통해 자유롭게 해소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두어야 더 큰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성범죄는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성적 욕망을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발산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있기에 일어나는 반작용이다. 과연 옳은가? 그렇다면 당장의 성적 충동과 욕망만 해결할 수 있으면 더이사의 추가적인 충동이나 욕망은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포르노를 보면서, 그리고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사창가 근처에서 성범죄는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포르노의 합법화와도 관계가 있다. 성매매를 합법화했더니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면서 불법적인 성매매도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포르노가 유통되는 사회에서 불법적인 포르노 역시 함께 생산되며 유통되고 있었다. 인간은 욕망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재주가 있다. 욕망한 적 없는 것들마저 욕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상상력이다. 그것이 추상이다. 그것이 이성이다. 더 큰 욕망을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 그래서 항상 궁리하고 새로운 답을 찾아 나선다. 하나가 충족되면 새로운 하나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인간의 타락 역시 끝이 없다.


과연 섹스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과 한 번이라도 섹스를 해 본 사람, 어느 쪽이 더 성욕을 억제하기 쉬울까? 당장 오늘 성매매를 통해 자신의 성욕을 해결했다. 직접적인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성적 충동을 발산했다. 그러면 한동안은 어떤 충동도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부부사이에서도 어느새 찾아온 권태기를 이기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이 실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디 가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들만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부부라는 이름 아래 쌓여간다. 욕망을 가르친다. 물론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욕망을 어디서나 쉽게 단지 돈만 있으면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다.


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매매가 합법화되었을 때 성매매여성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성매매라고 하는 자체를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자신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대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인간이 도구가 된다. 인간이 수단이 된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서 수단으로서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 어째서 성매매업소 근처에서 더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는가. 포르노를 접한 사람들 가운데 성범죄의 발생빈도가 더 높은가. 그곳에서 여성은 수단이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다. 오로지 그로써만 존재한다. 포르노에 익숙한 사람치고 정상적인 여성관을 가진 경우가 드물다. 설사 성범죄가 사라지더라도 사회에는 또다른 계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멸시와 혐오가 당연한 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인간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한때는 나 역시 성매매합법화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어쩌면 나 자신은 성매매여성에 대해 전혀 차별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실제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의 문제다. 보다 다수의 일반의 문제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한 사회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어야 한다. 여성 또한 인간이어야 한다. 목적이며 존엄이어야 한다. 자신의 성욕을 위해서는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설득하여 자신의 욕망에 동의토록 할 수 있을까. 쉽다는 자체가 이미 상대를 존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을 자본의 대상으로 여긴다. 도구로서 객관화한다.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또한 자본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오랜 욕망의 정수다. 아무튼.

내가 인정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다. 같은 이유로 역지사지라는 말도 싫어한다. 정의는 보편적이다. 그리고 일반적이다. 그 말은 곧 인격이 없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다. 누구도 정의를 소유할 수 없다. 사람을 위해 정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 원래부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성의 역사란 원래 있는 그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아직도 인간은 그런 과정 위에 있다.


그런데 인정은 다르다. 인정은 철저히 개인에게 귀속된다. 그리고 대개는 현실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더 직접적이기도 하다. 그 사람은 착하다. 성실하다. 예의바르다. 주위에 두루 잘한다. 하지만 그 평가조차 결국은 그를 지켜보는 주위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테면 동네사람 누군가 성폭행을 저질렀다. 그 사실이 알려졌다. 한 사람은 그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실을 감추려 움직였다. 누가 더 인정이 있는가.


그래서 역지사지라는 말도 싫어한다. 네가 그 입장이 되어 보라. 네가 그 성폭행범의 입장이 되어 보라.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세상의 비난을 받고 법적인 처벌까지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 보라. 눈앞에 무방비의 여자가 있는데 너라고 눈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거랑 별개다. 네 가족이 그렇게 참혹하게 살해당했는데 너라면 참고만 있겠는가. 당연히 참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참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이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 감정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간을 저열한 감정과 욕망의 노예로 격하시킨다.


폐쇄된 시골마을에서 곧잘 이같은 끔찍하고 말하기에도 괴기스런 사건들이 곧잘 일어나게 되는 이유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싸준다. 인정이 넘친다. 그래서 그 인정을 위해 때로 타인을 희생시킨다. 자기 마을 사람이 아니라면 - 즉 서로 인정을 공유하는 '우리'라는 집단에 들어 있지 않다면 기꺼이 그 인정을 위해 대상을 희생시키려 한다. 서로 좋으니까. 서로가 기쁘면 그만이니까. 내일도 보고 모레도 봐야 할 상대다. 그런 사람이 불편한 것이나 그로 인해 자기가 불편한 것을 피할 수 있다. 어차피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자기들끼리 결정하면 폐쇄된 환경에서 그런 모든 것이 가능하다.


여러 해 전 이슈가 되었던 섬노예 사건도 결국 그런 연장이었다. 마을사람 모두 - 심지어 경찰들까지 섬노예의 존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편해지기 싫다. 그냥 이대로 좋은 채 지내고 싶다. 그냥 하찮은 노예 하나 희생시키면 되는 일이다.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한다. 인정의 세계에서 인간의 가치는 인간의 거리에 비례한다. 보편적인 인간이란 보편적인 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익숙한 인간의 관계가 보편의 정의와 윤리를 대신한다. 법마저 그 완고한 인정의 고리를 파고들지 못한다. 완벽하게 닫혀 있는 그들만의 세계다.


분명 시골이 도시보다 인심이 좋다. 인정이 많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서로 좋기 위해서. 서로 편하기 위해서. 차라리 피해자를 비난한다. 피해자를 마을에서 쫓아낸다. 너희가 마을 물을 다 흐려놓았다. 너희로 인해 마을의 체면이 떨어졌다. 그렇게 피해자만 쫓아내고 나면 다시 전처럼 문제없이 살수 있다. 죄인가의 여부마저 자기들끼리 결정한다. 서로의 관계를 고려해가며. 그것이 그들의 정의이며 윤리이며 도덕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마 대중문화를 통해 이해하는 바로 세계 어디에나 비슷한 문제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때로 시골이라는 공간이 공포와 스릴러의 배경으로 흔하게 쓰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편의 정의가 사라지고 개인의 인정이 지배하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넘어가는 원시사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다. 인간은 정의를 추구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지성이다. 우울한 현실이다.

맞다. 일부 남성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체 살인사건 피해자 가운데 남성의 비율이 여성보다 높다. 작년 한 해 동안 미수까지 포함해서 남성 피해자가 511명인데 반해 여성피해자는 402명에 불과하다. 무언가 억울하다. 실제 가장 강력한 범죄인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남성이 더 많지 않은가.


그런데 위 주장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빠져있다. 실제 인용한 경찰청 통계에도 바로 뒤에 한 가지 통계가 다시 뒤따르고 있었다. 바로 살인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통계였다. 당연하다. 피해자만 존재하는 범죄란 없다. 가해자가 있으니 범죄다. 피해자만 있으면 사고다. 미제사건조차 단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 누군가 가해자가 있기에 사건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면 전체 살인범죄자 가운데 남성의 비율은 어떻게 되는가.


놀라지 마시라. 무려 83.5%다. 전체 살인범죄자 1024명 가운데 무려 855명이 남성이었다. 여성은 169명이 전부였다. 이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살인사건이라는 중대한 범죄에 있어 성별비대칭성을 보여준다. 최소한 여성에 의해 남성이 살해당하는 것보다 남성에 의해 여성이 살해당하는 경우가 산술적으로도 더 많다. 남성피해자의 경우도 대개는 남성인 범인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냥 단순이 남성이 여성보다 살인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해서일까? 아니면 남성이 여성보다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아서일까?


어떤 범죄든 마찬가지다. 아니 범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에게 부당한 행위를 강요하려 할 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은 상대와 자신과의 우열관계다. 상대의 반발이나 저항을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을 때 상대에게 불리한 행동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결심도 계획도 가져볼 수 있다. 하다못해 무기를 따로 장만한다거나,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린다거나, 그렇더라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형제가 범죄예방에 도움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범죄 역시 자신이 범인인 것이 밝혀지지 않을 것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자기가 잡힐 것을 알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겨우는 매우 드물다.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열세인 여성이 남성을 살해하고자 마음먹게 되는 경우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반대로 같은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더 자제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똑같이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하는 충동이나 욕구가 있을 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그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려는 내적 동기가 얼마나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통계인 것이다. 여성이 그러고 싶다고 남성을 폭행하기란 사실 매우 어렵다. 남성이 스스로 여성의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 여성은 신체적으로 열세이기에 남성의 반격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강도사건의 경우도 전체 2087건 가운데 압도적인 1908건이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무기를 들었든 어쨌든 상대를 위력으로 제압할 자신이 있기에 강도로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기를 든 상태에서도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할 자신이 없으면 망설이게 된다. 상대를 제압하더라도 무사히 현장을 탈출할 자신이 서지 않으면 주저하게 된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라 야만상태에서의 신체적 우열이 범죄의 비율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대부분의 범죄의 추세는 사회적 신체적 심리적 강자에 의해 저질러지며 그 대상은 상대적 약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절대다수는 남성이 남성을, 혹은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저지르는 범죄들이다. 다시 말해 많은 살인사건에 있어 남성이 여성에 대한 잠재적인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전제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물리적 위력의 열세로 인해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더 그같은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불어 어째서 강력범죄에는 남성피해자가 압도적인 폭행은 들어가지 않는 것인가. 단순폭행이거나 쌍방폭행은 사실 강력사건이라 보기에 어려움이 있다. 전체 폭행사건 가운데 남성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비율이 무려 84%, 67%다. 사건의 피해정도 역시 피해없음으로 분류된 사건이 68%에 이른다. 대부분은 남성과 남성 사이에서 일어난 대수롭지 않은 단순폭행에 불과한 것이다. 성범죄의 경우도 그 절대다수는 경미하다 할 수 있는 성추행이지만 차이라면 대개 위력을 동반하여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공권력이 강하게 개입하지 않는다면 피해자의 존엄과 권리는 회복될 수 없다. 범죄의 동기나 성격에서 차이가 분명하다. 더구나 설사 폭행을 강력사건에 집어넣더라도 폭행의 가해자 비율에서도 여성은 고작 15.7%에 불과하여 32.9%에 이르는 피해자의 비율과 대조를 이룬다. 그냥 산수만 해도 전체 폭행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남성과 여성인 경우가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폭행사건조차 사실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가해를 증명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남성인 가해자의 수가 남성인 피해자의 수보다 많다. 반대로 여성인 가해자의 수가 여서인 피해자의 수보다 적다. 물론 이해한다. 남성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성폭행의 피해자가 겪는 고통과 굴욕과 수치심을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성폭행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지. 명백히 피해자임에도 오히려 죄인처럼 가해자에게 숙이고 살아야 하는지. 성범죄는 강력범죄가 아니다. 폭행도 강력범죄로 포함해야 한다. 사소한 성추행조차 위력를 동반해 저질러지며 여성의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니다. 폭행에 있어서도 남성은 여전히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남성도 살인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가해자의 비율은 여성보다 더 높다. 남성이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까지 살해한다. 강도나 폭행과 같은 범죄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 피해자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가해자들이 바로 남성이었다. 남성이 남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며 여성을 상대로도 범죄를 저지른다. 여성의 경우 가해자의 수가 피해자보다 항상 훨씬 적다. 과연 범죄에 있어 남성과 여성의 일방적인 관계를 설명하는데 통계로서 부족한가. 바보라서 사람들이 그 통계를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알고 있다. 알면서도 비열하게 인용하는 것이다. 필요한 부분만 따로 떼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써 사실을 왜곡하여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의 성비가 남성이 더 높음에도 단지 피해자인 남성만을 일률적으로 피해자 여성과 수로써 계량한다. 통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 그야마로 남성이 여성보다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르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래도 되는 이유는 아직까지 인터넷문화의 주류는 남성이며 같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최소한 동조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확신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혁명가이거나 바보다.


어째서 살인의 피해자 가운데 남성이 더 많은데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가. 가해자 가운데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다른 모든 강력범죄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이 더 많이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피해자가 되고 있다. 여성피해자가 가해자의 수보다 훨씬 적다. 숫자가 진실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근거는 될 수 있다. 부정하기 위해서는 더 정교한 논리가 필요하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인가. 물론 아니다. 내가 아니니까. 그러나 모든 남성 가운데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 유의미하게 존재하는가. 최소한 통계는 그렇게 가리키고 있다. 그 피해자 가운데 여성이 일방적으로 선택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그것은 이미 사회적 경험으로 획득한 상식이다.


모든 참고자료는 경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했다. 범죄통계를 따로 PDF로 정리한 것이 있으니 다운로드 받아서 찬찬히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차라리 비열하기를 바라야 할까. 멍청하기를 기대해야 할까. 말이 통하지 않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아예 알아듣지 못하거나.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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