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튼 나라는 인간은 글을 쓸 때만 생각한다. 항상 글을 쓰면서만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 생각하기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생각이 이어진다. 노동과 노동자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파견제라고 하는 현실에 대해서.


노동과 노동자는 하나인가. 아니면 별개로 분리될 수 있는가. 사실 아주 오래전에는 전자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노동을 소유하기 위해 노동자를 소유했다. 노예제다. 인신을 구속함으로써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을 전유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가는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는가와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의문이 생겼다. 내가 필요한 것은 결국 노예가 가진 노동력인데 어째서 노동력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까지 내가 항상 신경쓰고 책임져야만 하는가. 딱 내가 필요한 만큼만 노동력을 가져다 쓰고 나머지는 노동자 개인에게 맡기겠다.


그나마 개인의 경험과 기술에 생산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던 전근대사회에서 기계가 대부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된 근대사회로 넘어오며 그같은 시도는 보다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기계를 돌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과 기술만 갖추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노동자 개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만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노동력만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한다. 아무리 일을 해도 정작 노동의 대가로 지급된 임금은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노동자는 사업장을 나가면 누군가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친구이고, 사회의 구성원이며, 국가의 국민이다. 비스마르크가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것은 그가 노동자의 편에 선 진보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철저히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노동과 노동자는 둘이 아니다. 노동과 노동자는 하나다. 노동의 대가로 노동자는 충분히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용자들이 진심으로 바란 결과가 아니었다. 모든 노동과 관련한 사회적 진보는 사용자의 양보가 아닌 사회와 국가의 강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사회와 국가가 그런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노동과 노동자는 분리된 채로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국가가 보장한 계약직과 파견직과 같은 사용자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제도들이 그런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노동력은 대가를 지불하고 가져다 쓰지만 정작 노동자 개인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인신의 고용과 노동의 사용을 철저히 분리하는 파견제는 그 정수라 할 수 있다. 사용자는 단지 노동자를 고용한 파견업체로부터 노동력만을 대가를 주고 빌려 쓸 뿐이다. 그렇다고 정작 노동력을 사용한 것은 사용자인데 파견업체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없으니 누구도 노동자 자신을 책임지지 않게 된다.


부담은 당연히 사회로 돌아간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미 계약직과 파견직이 존재하는 다른 선진국에서도 사회적으로 모든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그마저도 없다. 자기가 사는 문제는 오로지 자기의 책임인데, 그마저 자신의 중요한 수단인 노동력을 자기로부터 강제로 분리당한다. 말했듯 누군가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친구이며,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다. 무고한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며 때로 무기력증에 빠져드는 사회란 그런 사회적 비용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계약직과 파견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같은 전제에 동의하는 국민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무노동무임금.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자기가 일한 만큼만 대가로 지급받아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하찮고 그 이익이 미미하다면 그만큼 대가도 받아서는 안된다. 공무원의 성과연봉제에 대한 지지여론도 그래서 높다.


그래서 묻게 되는 것인다. 억울한 죽음을 슬퍼한다. 무고하게 죽어간 젊은 영혼을 동정하며 위로한다. 하지만 그 대안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사회가 책임을 지기 싫으면 기업에 책임을 지운다. 기업에 책임을 지울 수 없다면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모두가 돈이다. 내 이익이다. 내 지갑에서 주머니에서 나가게 될 것들이다.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는가.


참고로 노동자의 파업권에 대한 정의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고용된 상태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누구의 소유인가. 기업의 소유라면 노동자는 임의로 자신의 노동을 멈출 수 없다. 노동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고용된 상태에서도 노동이 노동자의 소유라면 노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자신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용자에게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개인의 권리다. 어떤 경우에도 그같은 노동자 개인의 권리는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고용이라는 자체가 조건에 동의하는 것이었으니 충실히 그를 이행해야만 한다. 어떤 부당하고 모순된 현실에도 끝까지 참고 견뎌야만 한다. 일부의 주장이 의미없는 이유다.


노동에 대한 대가만을 지불할 수는 없다. 노동자가 없으면 노동도 없다. 노동이 없어도 노동자는 존재한다. 노동은 전적으로 노동자가 소유한다. 소유자로서 자신의 노동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비용 역시 정당하게 노동자에게 지불되어야 한다.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상식이어야 할 테지만. 그러나 여전히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말이 더 상식처럼 여겨진다. 노동은 노동자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노동만 따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 정작 노동을 소유한 노동자를 노동을 이유로 단정짓고 정의하며 차별한다. 하기는 원래 인간이란 모순된 존재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아니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누구의 책임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어째서 책임을 지지 않는가.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이다. 우울한 것이다. 아무것도 시작되고 있지 않다.

확실히 알겠다. 안철수와 국민의당의 노동관을. 경제문제는 어쩌면 안철수 자신의 말처럼 상당히 진보적인 스탠스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직 구체적으로 무언가 나온 것이 없으니 판단할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다만 한 가지 노동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보수적이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다. 무노동무임금.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당연하다.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돈받을 생각부터 한다면 그것은 도둑놈이다. 아니면 사기꾼이거나. 단, 전제가 붙는다. 이미 고용된 상태에서도 단지 일을 해야지만 돈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은 노동과 고용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노동과 노동자는 별개인가. 노동은 노동자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가. 사용자는 단지 노동자가 소유한 노동력을 필요한 만큼 구매하여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용자는 단지 노동력을 소유한 노동자와 계약을 맺고 필요한 만큼 이용하는 것 뿐이다. 그로므로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것은 단지 자신이 노동자로부터 구매하여 사용한 노동력의 양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사용자로부터 받는 임금은 노동력을 소유한 자신에게 지불해야 하는 대가다. 고용된 상태에서 노동력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노동자의 파업권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여전히 노동력은 노동자에게 배타적으로 소유되어 있다.


일한 만큼만 대가를 지불한다. 일하는 동안만 의미가 있다. 일을 통해 생산한 결과를 통해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이외의 시간들은 부정된다. 그 이외의 가치들은 부정된다. 일하지 않는 동안에도 노동자는 살아있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했어도 필요한 비용들은 발생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사용자와 전혀 상관없는 노동자 자신의 문제다. 사용자는 오로지 자신이 사용한 노동력에 대해서만 대가를 지불한다.


얼핏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당연히 임금이란 자신이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자신이 일한 만큼을 계량하여 비례하여 받는 것이 지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내려진 결론이 자신의 생존마저 위협할 정도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결정된 임금수준이 다음 임금을 받기까지 최소한의 생활조차 영위하기 힘든 수준이다. 당장 내일부터 끼니를 걸러야 한다. 추운 겨울인데 난방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노동자가 소유한 노동력은 이전과 같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처음의 쟁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노동자와 노동력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가. 노동자와 별개로 노동력에 대해서만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원구성이야 어찌되었든 이미 임기가 시작된 순간 그들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하다못해 4년의 임기 동안 아무것도 않고 집안에 누워만 있어도 그마저 국회의원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게 유권자들에게 인식된다. 개인이 아니다. 사인이 아니다. 그래서 공인이다. 숨쉬고 밥먹는 것조차 공적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는, 모든 행동들이 크든 작든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주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에 대한 대가다.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다 여겼기에 국민은 그들을 선택했고 따라서 그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그 대가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원구성을 못했으니까. 국회가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므로 아무일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진정 아무일도 하지 않았는가. 아무일도 않고 있는가. 하다못해 지역구관리라도 하고 있다. 다음 선거를 위해 당내 정치에도 한 발 담그고 있다. 그마저도 국회의원으로서 회의장에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면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다. 그 한 표에 의해 법 하나가 가결되고 부결되기도 한다. 아무리 일 못하는 국회의원이라도 한 표는 한 표다. 자신을 찍어준 지역구 주민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국회의원들은 회기와 회기의 사이 더 열심히 자신의 전문분야와 관심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한다. 최근 국민의당이 공부모임을 갖는다며 호들갑떠는 모습이 때로 우습게 여겨지는 이유다. 굳이 당이 전면에 나서서 행사처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일상을 통해 이루어저야 하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공부들을 안했으면.


공적인 업무만이 업무가 아니다. 여기적기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 사람도 만나야 한다. 비공식적으로라도 필요하면 찾아가야 하고 친분이 없어도 만나야 한다.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친인과 지인 등 인간관계 역시 소홀할 수 없다. 개인의 감정을 공적의 영역으로 끌고 오지만 않으면 된다. 공사의 구분만 확실히 할 수 있으면 상관없다. 그마저도 공인으로서 보다 주어진 책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이나 인간관계가 원망하지 못해서 생기는 손실도 결국 사회가 져야 한다. 무엇보다 건강을 책임져야 한다. 몸의 건강은 물론 마음의 건강까지 철저히 관리해야만 한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잘해도 중간에 쓰러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지자가 바라는 정치가 있을 텐데 중간에 쓰러지면서 결국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 다음 선거에서도 출마해서 당선될 수 있어야 한다. 더이상 국회의원이 아니게 되면 국회의원으로서 해야 할 일도 못하게 된다. 일을 하라고 뽑아준 국회의원이다. 그 모든 것이 비용이다. 세금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허투루 쓰는 것이 아니다.


결국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게 된다. 국회의원 역시 노동자다. 그렇게 간주해야 한다. 국민에 의해 고용된 선출직 노동자다. 국민에 고용되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중요한 일들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국회의원에게 지불되는 세비는 국회의원이 하는 일들에 대한 것인가. 그 일들을 해야 하는  국회의원 자신에 대한 것인가.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은 필요없다 말하기 전에 먼저 국민 자신이 일 잘 할 것 같은 국회의원을 뽑으면 되는 것이다. 만일 잘못뽑았다면 다음에 제대로 잘 뽑아서 시키면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않고 놀며 낭비하는 비용조차 잘못된 선택에 대해 국민이 치러야 할 대가다. 국회의원이라고 국민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국민 역시 유권자로서 엄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국회의원도 공짜는 아니다. 이미 국회의원이 되었고 세비를 지급하기로 한 이상 그것은 약속이며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누구도 포기를 강제해서는 안된다.


열정페이다. 공짜로 일하라. 포기하며 일하라. 하다못해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수습기간에도 임금은 지급한다. 처음 입사해서 오히려 일을 배우는 동안에도 돈을 받으며 일을 배운다. 고용에 대한 당연한 책임이다. 국민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국가라고 예외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물며 정당이다. 고용주가 아니다. 그냥 국회의원으로서 특정한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것 뿐이다. 노동자들도 같은 직종에서 다른 노동자보다 형편없이 적은 임금만을 받으면 비난을 받는다. 남을 생각지 않는다. 쟁점으로 삼는다. 더 큰 것을 노기는 사기이거나, 아니면 자각조차 없는 무지이거나. 어느쪽이든 최악이다.


그러고보면 정치혐오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 자신이 뽑았다. 최소한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뽑히는 것을 보기만 하고 있었다. 유권자의 책임은 없다. 국회의원의 의무만 있다. 객관화한다. 대상화한다. 국회의원 역시 결국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은 시민의 일원임을 잊는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정치다. 그런 특별한 사람들을 기대한다. 항상 반복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다시 반기문이 그 대상이 되려는 모양이다.


아무튼 전혀 상관없는 것 같으면서 전체를 꿰어 보면 구체적인 윤곽이 나온다. 일을 해야만 국회의원인가.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가. 비슷하지만 다르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 하지만 먹지 않으면 죽는다. 일단 고용한 이상 먹이는 것은 사용자의 책임이다.


국회의원이 참 하찮다. 일한 만큼 돈을 받는다. 일을 하지 않았으면 세비도 받아가지 못한다. 국회가 열려야 일을 하는 것이다. 원구성이 끝나야 비로소 일을 하고 세비를 받아갈 수 있다. 하물며 노동자들은. 무노동무임금이 원칙이다. 재미있다.  

여유가 있다면 그런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여유가 없기에 그런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안철수 대푝가 특별히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트윗을 올린 것은 아닐 것이다. 선의를 인정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문제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한국사람들은 부모로부터 그렇게 듣고 배운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부모말 잘 듣지 않으면 저런 삶을 살게 된다. 어째서 더 노력하지 않았는가. 학교다닐 때 더 성실하지 않았던 것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할 당시 어떤 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못살고 어렵고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당연히 그런 일들을 해야만 한다.

이를테명 징벌이다. 모두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부자가 되어 잘 살려 노력해야지만 한다. 그것만이 삶의 목표고 의미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은 당위로부터 벗어나 있다. 잘살려 노력하지 않았거나 혹은 능력이 부족해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더 힘들고 더 어렵고 더 열악한 직업들은 그에 대한 징벌이다. 그러므로 모두는 더 잘살려 더 힘써 노력해야지만 한다.

무의식이다. 더 가난하고 여유가 없는 조건에서도 별다른 위험없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보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위험도 어려움도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때 유행어처럼 들렸던 말이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그러므로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해준다면 모든 문제는 아무렇지 않게 해결될 수 있다. 너무 당연해서 덧붙일 말이 없다. 만일 희생자가 부자였다면.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안철수와 국민의당이 주장하는 공정성장론이 의도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 모두에게 창업하고 부자가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다. 또한 이 사회에 필요한 정의이기도 하다. 다만 이 사회가 가진 상식에 부합하는 정의다.

굳이 말꼬리를 잡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선의만을 읽는다. 그리고 그 선의에 내포된 비극성을 읽는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다. 여유가 없으므로. 부자가 되지 못했으므로. 많이 배우지도 가지지도 못했기 때문에.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은 그리 말했었다.

"우리가 벌받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각."

정치권이 조용한 이유가 있다. 보다 이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와 닿아 있다. 지엽말단을 건드려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감정을 건드려야 한다. 겉만 건드리거나, 아니면 그 핵심을 건드려 국민과 싸우거나. 동정은 쉽다. 현실이 어렵다. 항상.

어차피 하나의 사회에서 생산할 수 있는 부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다. 부란 물질이다. 교환가능한 재화다. 새로운 물질을 무로부터 창조해내지 않는 한 현실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서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여러해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도 교환가능한 화폐는 넘쳐나는데 정작 교환의 대상이 되는 가치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었었다. 투자할 곳이 필요한데 투자할 곳이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무한한 자본의 증식을 전제한다. 바로 자본주의가 가지는 현실의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무한한 자본의 증식을 추구하는데, 정작 현실은 물리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어 온 이유였다. 무한히 증식된 자본이 정작 교환할 대상을 찾지 못하며 스스로 가치를 잃게 된다. 여전히 10이라는 재화만을 생산하는데 자본만 100으로 늘어나면 자본의 가치는 10분의 1로 줄어든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모순의 파괴력이 사회를 휩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선택한 대안이 스스로 실물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절대가치로서의 화폐였다. 금이 가지는 지위를 대체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미국이라고 하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신용으로 삼아 절대가치로서의 달러를 찍어낸다. 달러는 그 자체로 시장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는다. 달러가 바로 자본의 기준이 된다. 현물가치의 뒷받침없이도 달러의 생산을 통해 전체의 가치는 무한히 증가할 수 있다. 자본 역시 무한히 증가한다. 물론 그렇게 무한히 증가한 자본의 대부분은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일반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을 하락시키지 않으면서도 자본의 이익 또한 증대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여전히 유지됙고 있는 수입을 보면서 노동자 역시 아직은 아무 문제 없다고 스스로 납득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기축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 같은 압도적인 힘과 신용을 가직고 있는 특수한 경우에만 한정된다. 그러면 스스로 기축통화를 발행할 수 없는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 아무리 화폐를 찍어내봐야 시장에서는 달러를 기준으로 그 가치가 평가된다. 지나치게 화폐를 찍어내면 화폐의 가치는 폭락하고 전체의 가치는 비숫한 수준으로 유지된다. 거꾸로 가면 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비용을 줄인다. 실제 필요한 비용의 지출을 줄임으로써 나머지 잉여가치의 절대량을 늘린다. 수입은 줄더라도 지출도 역시 준다면 삶의 수준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나마 비용을 아끼겠다고 중요한 안전관리마저 파견업체에 맡긴다. 2교대로 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인건비 아끼겠다고 훨씬 적은 수의 사람만을 고용해서 그들에게 넓은 범위를 모두 책임지게끔 한다. 비용이 줄어들면 아낀 나머지가 마치 자신의 수입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공공재인 지하철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물며 택배와 같이 직접 와닿는 분야라면. 고작 2500원에 소비자는 택배기사들을 부려 문앞까지 물건을 배송시킬 수 있다. 만일 택배기사들이 받는 수입이 지금보다 두 배 아니 그 이상 현실적인 수준으로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것을 노동자 자신이 반대한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는 것을 노동자 자신이거나 가족이고 지인일 국민들이 먼저 나서서 반대한다. 내 지출이 는다. 내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난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소득이 감소한다. 이미 노동자를 어떻게든 쥐어짜야지만 유지되는 사회인 것이다. 더 큰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노동자는 서로 경쟁하며 비용을, 소비를 줄여야만 한다. 노동자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더 낮은 임금에도 버티며 사회를 지탱하는 도구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이번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가 가지는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규정보다 훨씬 못미치는 인력을 그것도 파견직으로 채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낀 인건비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국민 스스로가 그것을 자신의 이익으로 여긴다. 더 낮은 임금에, 더 열악한 조건에, 그럼으로써 수입의 증가 없이도 자신은 이전과 같은 - 어쩌면 그 이상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어째서 한국사회에서는 어떻게든 경제를 살리자면서 노동자의 임금과 지위, 처우에만 관심을 가지는가. 한국경제가 가지는 근본적 모순이다. 자본의 증식에는 한계가 있다. 전체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결국 비용과 지출을 늘여야 한다. 그렇게 유지되어 왔다. 사람을 싸게 부리면서 아직은 자신은 괜찮다. 문제없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었다. 한 해 재해로 인정된 사망만 무려 995건에 이른다.

부디 명복을. 죽고 나서도 보상조차 거의 없다. 그저 개인적으로 안타까워 할 뿐 부당한 현실을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노력도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결국은 다시 저비용의 구조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현실이 이어질 것이다. 서로의 살을 베어먹고 피를 마시며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틴다. 그래서 도태되면 따라오지 못한 자를 비난한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누구를 위한 명복일지.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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