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튼 나라는 인간은 글을 쓸 때만 생각한다. 항상 글을 쓰면서만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 생각하기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생각이 이어진다. 노동과 노동자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파견제라고 하는 현실에 대해서.


노동과 노동자는 하나인가. 아니면 별개로 분리될 수 있는가. 사실 아주 오래전에는 전자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노동을 소유하기 위해 노동자를 소유했다. 노예제다. 인신을 구속함으로써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을 전유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가는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는가와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의문이 생겼다. 내가 필요한 것은 결국 노예가 가진 노동력인데 어째서 노동력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까지 내가 항상 신경쓰고 책임져야만 하는가. 딱 내가 필요한 만큼만 노동력을 가져다 쓰고 나머지는 노동자 개인에게 맡기겠다.


그나마 개인의 경험과 기술에 생산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던 전근대사회에서 기계가 대부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된 근대사회로 넘어오며 그같은 시도는 보다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기계를 돌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과 기술만 갖추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노동자 개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만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노동력만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한다. 아무리 일을 해도 정작 노동의 대가로 지급된 임금은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노동자는 사업장을 나가면 누군가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친구이고, 사회의 구성원이며, 국가의 국민이다. 비스마르크가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것은 그가 노동자의 편에 선 진보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철저히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노동과 노동자는 둘이 아니다. 노동과 노동자는 하나다. 노동의 대가로 노동자는 충분히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용자들이 진심으로 바란 결과가 아니었다. 모든 노동과 관련한 사회적 진보는 사용자의 양보가 아닌 사회와 국가의 강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사회와 국가가 그런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노동과 노동자는 분리된 채로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국가가 보장한 계약직과 파견직과 같은 사용자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제도들이 그런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노동력은 대가를 지불하고 가져다 쓰지만 정작 노동자 개인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인신의 고용과 노동의 사용을 철저히 분리하는 파견제는 그 정수라 할 수 있다. 사용자는 단지 노동자를 고용한 파견업체로부터 노동력만을 대가를 주고 빌려 쓸 뿐이다. 그렇다고 정작 노동력을 사용한 것은 사용자인데 파견업체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없으니 누구도 노동자 자신을 책임지지 않게 된다.


부담은 당연히 사회로 돌아간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미 계약직과 파견직이 존재하는 다른 선진국에서도 사회적으로 모든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그마저도 없다. 자기가 사는 문제는 오로지 자기의 책임인데, 그마저 자신의 중요한 수단인 노동력을 자기로부터 강제로 분리당한다. 말했듯 누군가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친구이며,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다. 무고한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며 때로 무기력증에 빠져드는 사회란 그런 사회적 비용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계약직과 파견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같은 전제에 동의하는 국민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무노동무임금.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자기가 일한 만큼만 대가로 지급받아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하찮고 그 이익이 미미하다면 그만큼 대가도 받아서는 안된다. 공무원의 성과연봉제에 대한 지지여론도 그래서 높다.


그래서 묻게 되는 것인다. 억울한 죽음을 슬퍼한다. 무고하게 죽어간 젊은 영혼을 동정하며 위로한다. 하지만 그 대안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사회가 책임을 지기 싫으면 기업에 책임을 지운다. 기업에 책임을 지울 수 없다면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모두가 돈이다. 내 이익이다. 내 지갑에서 주머니에서 나가게 될 것들이다.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는가.


참고로 노동자의 파업권에 대한 정의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고용된 상태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누구의 소유인가. 기업의 소유라면 노동자는 임의로 자신의 노동을 멈출 수 없다. 노동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고용된 상태에서도 노동이 노동자의 소유라면 노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자신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용자에게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개인의 권리다. 어떤 경우에도 그같은 노동자 개인의 권리는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고용이라는 자체가 조건에 동의하는 것이었으니 충실히 그를 이행해야만 한다. 어떤 부당하고 모순된 현실에도 끝까지 참고 견뎌야만 한다. 일부의 주장이 의미없는 이유다.


노동에 대한 대가만을 지불할 수는 없다. 노동자가 없으면 노동도 없다. 노동이 없어도 노동자는 존재한다. 노동은 전적으로 노동자가 소유한다. 소유자로서 자신의 노동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비용 역시 정당하게 노동자에게 지불되어야 한다.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상식이어야 할 테지만. 그러나 여전히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말이 더 상식처럼 여겨진다. 노동은 노동자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노동만 따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 정작 노동을 소유한 노동자를 노동을 이유로 단정짓고 정의하며 차별한다. 하기는 원래 인간이란 모순된 존재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아니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누구의 책임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어째서 책임을 지지 않는가.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이다. 우울한 것이다. 아무것도 시작되고 있지 않다.

여유가 있다면 그런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여유가 없기에 그런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안철수 대푝가 특별히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트윗을 올린 것은 아닐 것이다. 선의를 인정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문제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한국사람들은 부모로부터 그렇게 듣고 배운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부모말 잘 듣지 않으면 저런 삶을 살게 된다. 어째서 더 노력하지 않았는가. 학교다닐 때 더 성실하지 않았던 것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할 당시 어떤 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못살고 어렵고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당연히 그런 일들을 해야만 한다.

이를테명 징벌이다. 모두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부자가 되어 잘 살려 노력해야지만 한다. 그것만이 삶의 목표고 의미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은 당위로부터 벗어나 있다. 잘살려 노력하지 않았거나 혹은 능력이 부족해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더 힘들고 더 어렵고 더 열악한 직업들은 그에 대한 징벌이다. 그러므로 모두는 더 잘살려 더 힘써 노력해야지만 한다.

무의식이다. 더 가난하고 여유가 없는 조건에서도 별다른 위험없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보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위험도 어려움도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때 유행어처럼 들렸던 말이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그러므로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해준다면 모든 문제는 아무렇지 않게 해결될 수 있다. 너무 당연해서 덧붙일 말이 없다. 만일 희생자가 부자였다면.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안철수와 국민의당이 주장하는 공정성장론이 의도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 모두에게 창업하고 부자가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다. 또한 이 사회에 필요한 정의이기도 하다. 다만 이 사회가 가진 상식에 부합하는 정의다.

굳이 말꼬리를 잡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선의만을 읽는다. 그리고 그 선의에 내포된 비극성을 읽는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다. 여유가 없으므로. 부자가 되지 못했으므로. 많이 배우지도 가지지도 못했기 때문에.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은 그리 말했었다.

"우리가 벌받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각."

정치권이 조용한 이유가 있다. 보다 이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와 닿아 있다. 지엽말단을 건드려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감정을 건드려야 한다. 겉만 건드리거나, 아니면 그 핵심을 건드려 국민과 싸우거나. 동정은 쉽다. 현실이 어렵다. 항상.

어차피 하나의 사회에서 생산할 수 있는 부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다. 부란 물질이다. 교환가능한 재화다. 새로운 물질을 무로부터 창조해내지 않는 한 현실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서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여러해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도 교환가능한 화폐는 넘쳐나는데 정작 교환의 대상이 되는 가치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었었다. 투자할 곳이 필요한데 투자할 곳이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무한한 자본의 증식을 전제한다. 바로 자본주의가 가지는 현실의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무한한 자본의 증식을 추구하는데, 정작 현실은 물리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어 온 이유였다. 무한히 증식된 자본이 정작 교환할 대상을 찾지 못하며 스스로 가치를 잃게 된다. 여전히 10이라는 재화만을 생산하는데 자본만 100으로 늘어나면 자본의 가치는 10분의 1로 줄어든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모순의 파괴력이 사회를 휩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선택한 대안이 스스로 실물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절대가치로서의 화폐였다. 금이 가지는 지위를 대체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미국이라고 하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신용으로 삼아 절대가치로서의 달러를 찍어낸다. 달러는 그 자체로 시장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는다. 달러가 바로 자본의 기준이 된다. 현물가치의 뒷받침없이도 달러의 생산을 통해 전체의 가치는 무한히 증가할 수 있다. 자본 역시 무한히 증가한다. 물론 그렇게 무한히 증가한 자본의 대부분은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일반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을 하락시키지 않으면서도 자본의 이익 또한 증대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여전히 유지됙고 있는 수입을 보면서 노동자 역시 아직은 아무 문제 없다고 스스로 납득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기축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 같은 압도적인 힘과 신용을 가직고 있는 특수한 경우에만 한정된다. 그러면 스스로 기축통화를 발행할 수 없는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 아무리 화폐를 찍어내봐야 시장에서는 달러를 기준으로 그 가치가 평가된다. 지나치게 화폐를 찍어내면 화폐의 가치는 폭락하고 전체의 가치는 비숫한 수준으로 유지된다. 거꾸로 가면 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비용을 줄인다. 실제 필요한 비용의 지출을 줄임으로써 나머지 잉여가치의 절대량을 늘린다. 수입은 줄더라도 지출도 역시 준다면 삶의 수준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나마 비용을 아끼겠다고 중요한 안전관리마저 파견업체에 맡긴다. 2교대로 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인건비 아끼겠다고 훨씬 적은 수의 사람만을 고용해서 그들에게 넓은 범위를 모두 책임지게끔 한다. 비용이 줄어들면 아낀 나머지가 마치 자신의 수입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공공재인 지하철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물며 택배와 같이 직접 와닿는 분야라면. 고작 2500원에 소비자는 택배기사들을 부려 문앞까지 물건을 배송시킬 수 있다. 만일 택배기사들이 받는 수입이 지금보다 두 배 아니 그 이상 현실적인 수준으로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것을 노동자 자신이 반대한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는 것을 노동자 자신이거나 가족이고 지인일 국민들이 먼저 나서서 반대한다. 내 지출이 는다. 내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난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소득이 감소한다. 이미 노동자를 어떻게든 쥐어짜야지만 유지되는 사회인 것이다. 더 큰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노동자는 서로 경쟁하며 비용을, 소비를 줄여야만 한다. 노동자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더 낮은 임금에도 버티며 사회를 지탱하는 도구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이번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가 가지는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규정보다 훨씬 못미치는 인력을 그것도 파견직으로 채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낀 인건비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국민 스스로가 그것을 자신의 이익으로 여긴다. 더 낮은 임금에, 더 열악한 조건에, 그럼으로써 수입의 증가 없이도 자신은 이전과 같은 - 어쩌면 그 이상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어째서 한국사회에서는 어떻게든 경제를 살리자면서 노동자의 임금과 지위, 처우에만 관심을 가지는가. 한국경제가 가지는 근본적 모순이다. 자본의 증식에는 한계가 있다. 전체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결국 비용과 지출을 늘여야 한다. 그렇게 유지되어 왔다. 사람을 싸게 부리면서 아직은 자신은 괜찮다. 문제없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었다. 한 해 재해로 인정된 사망만 무려 995건에 이른다.

부디 명복을. 죽고 나서도 보상조차 거의 없다. 그저 개인적으로 안타까워 할 뿐 부당한 현실을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노력도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결국은 다시 저비용의 구조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현실이 이어질 것이다. 서로의 살을 베어먹고 피를 마시며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틴다. 그래서 도태되면 따라오지 못한 자를 비난한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누구를 위한 명복일지.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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