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첩과 서자? 이성계가 신덕왕후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

가난뱅이 2022. 8. 17. 09:21

간단한 비유다. 그저 평범한 농민이었다. 아니면 비천한 노비였을 수 있다.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었다. 그런데 타고난 능력으로 큰 공을 세우면서 높은 신분을 얻고 신분에 맞는 새로운 아내도 얻었다. 그렇다면 먼저 결혼한 평민, 혹은 노비 출신의 아내와 나중에 결혼한 높은 신분의 아내 가운데 누가 정처가 되고 누가 첩이 되는 것인가?

 

그래서 실제로는 어지간하면 일단 이혼부터 시키고 결혼시켰다. 아니면 아예 당사자를 제거하여 그 원인을 없애거나. 후자의 경우는 드라마나 소설의 소재로 흔히 쓰이고 있기도 하다. 아니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먼저 결혼했으니 정처라면 나중에 결혼했지만 신분이 높은 여성이 신분이 낮은 여성에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렇다고 신분을 따지자니 이미 먼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많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겪어낸 전력이 걸린다. 그래도 역시 신분제 사회였기에 그나마 이 가운데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해법은 타고난 신분을 따르는 것이었다.

 

더구나 신분이 높으면 그냥 신분만 높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분이 높은 친정이 당연히 배후에 있었을 터다. 기껏 신분이 높은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 처지가 열악하다면 여자의 친정과도 불편한 관계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대대로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기 성을 죽을 때까지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저 여성 개인이 아닌 특정한 집안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신분증명이며 그를 통해 여성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문제, 고려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이민족이 들끓는 변방의 토호의 딸과 해동갑족이라 불리우던 개경의 유력호족의 딸 가운데 누가 더 신분이 높았을까?

 

워낙 남성중심주의적인 사고가 강하고, 더구나 승자인 태종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료를 근거로 많은 2차 창작들이 이루어진 터라 많은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부분일 것이다. 과연 조선을 건국하는데 있어 이성계의 주위에서 가장 크게 역할을 한 사람은 누구였었는가? 조선의 모든 초석을 다진 정도전이었을까? 아니면 정몽주를 죽이고 고려왕조의 마지막 저항의지를 꺾어버린 이방원이었을까? 그 전에 지금도 산밖에 볼 것이 없는, 더구나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변경밖에서 야만족들과 어울려 살던 촌뜨기 이성계가 개경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세력까지 갖출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겠는가? 어떤 드라마에서는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나오는 생산으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한다 묘사했는데, 그러나 지금도 함경도는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실어 나르지 않으면 당장 한 해를 넘기기도 어려운 척박한 동네다. 당시는 함경도에서 그나마 재배할 수 있는 감자도 없던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처럼 아는 것과 달리 이성계의 아들 이방우가 일찌감치 후계구도에서 탈락한 것은 이방우가 스스로 물러나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처가가 문제였다. 이인임의 측근이자 그와 함께 고려의 국정을 농단했던 지윤이 바로 이방우의 장인이었다. 이인임이 정권을 잡고 있던 우왕 시절 신돈이 실각하며 역시 함께 권력에서 멀어졌던 이성계가 다시 고려의 주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해 명문호족들과 통혼하는 과정에서 하필 큰아들 이방우가 그래도 당대의 권력자였던 지윤의 딸과 결혼한 것이었다. 아다시피 지윤은 이성계가 최영을 쫓아 이인임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사형당한, 말 그대로 아버지 이성계의 정적이자 국가적으로는 역적이었다. 그런 처가를 두고 있는 이방우에게 이성계의 후계를 맡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 그러면 당시 이성계는 도대체 뭐가 있어서 지윤이나 이제현이나, 민제와 같은 명문들과 자식을 결혼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당연히 이성계는 당시도 별 볼 일 없었다. 별 볼 일 있었던 것은 해동갑족 가운데 하나인 곡산 강씨 문중의 딸인 신덕왕후 강씨였다.

 

그래서 신덕왕후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후계문제에 있어 감히 신덕왕후에게 한 마디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조차 조선 조정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저 이방원마저 신덕왕후가 죽기 전까지는 그저 납죽 엎드린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신덕왕후가 죽자마자 이숙번이 확보한 군사력을 사용해서 물리적으로 신덕왕후를 따르던 핵심세력을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정치적으로 완벽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마저도 이성계의 와병과 정도전의 방심이 아니었다면 어찌되었을지 모르는 상당한 도박과 같은 한 수였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자신의 권력으로 신의왕후를 정처로 만들고 신덕왕후를 계비도 아닌 그저 후궁으로 첩으로 만들었던 것이었다.

 

어째서 이성계는 자신의 정처인 신의왕후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후처인 신덕왕후의 아들 가운데, 그것도 막내를 후계자로 삼았던 것인가?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어째서 이성계는 그런 어리석을 결정을 한 것인가? 하지만 당시 정도전이나 조준 같은 이들조차 그런 이성계의 결정에 딱히 반대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도 후계자 문제가 아닌 왕자로서 자신의 기득권을 박탈하려는 정도전의 조치에 반발하면서부터였고, 그러다가 아주 큰 빈틈을 발견하고 아예 상황을 뒤집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당시 이성계에게 정처는 다름아닌 신분도 고귀하고 더구나 조선건국에 큰 공도 있던 신덕왕후였었고, 막내 이방석은 죽을 때까지 한심했던 그 형 이방번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방원이 모든 정통성을 가지면서 그 사실들이 완전히 비틀리고 말았다.

 

이성계가 처음부터 고려에서 잘나가는 군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작은 그래도 쓸만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변방의 토호 가운데 고려조정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놈이 있어서 공민왕이 받아준 것이었고, 그래서 인질 겸 해서 개경에 와 있을 때 당시 명문 가운데 하나였던 곡산 강씨가 정치적인 이유로 이성계를 선택하여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혼맥을 바탕으로 신돈이 집권할 당시 이성계는 신돈의 신임을 받으며 한때 잘나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신돈이 실각하면서 같이 한미한 처지로 내몰리고, 이인임의 집권기에 곡산 강씨를 배경으로 여러 명문과 혼맥을 맺으면서 그 위치를 공고히한다. 그리고 최영이 요동정벌이라는 결정적인 악수를 두면서 비로소 여전히 주변을 맴돌던 이성계가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여기서 곡산 강씨를 빼면 그때는 이성계를 주인공으로 한 무협활극이 된다. 재미있기는 한데 당시 고려사회를 떠올려보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렇게 이해하면 모든 것이 간명해진다.

 

그러고보니 아주 오래전이다. 역사를 볼 때 남자만 봐서는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유럽 군주들의 생모나, 혹은 계모, 아니면 그들 자신들의 부인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들의 출신과 성향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래야만 했던 동기들과 그런 것들이 어떻게 그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가. 그러니까 결국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두 나라의 왕들이 혹은 사촌이었고, 혹은 종질간이었고, 혹은 동서지간이었다. 삼국지에서도 하후패가 촉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계기 가운데 하나가 장비의 딸인 유선의 비가 하후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조선건국 역시 마찬가지다. 신덕왕후 없이 이해하면 그 치밀함이 많이 떨어진다.

 

우연히 1차 왕자의 난과 관련한 어떤 컨텐츠를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달린 댓글 가운데 첩의 말에 현혹되어 어쩌고 하는 말이 괜히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신덕왕후가 첩이 된 것은 왕이 된 태종에 의해서였다. 그런 조치들이 부당하다고 숙종이 다시 신원하여 계비로 올린 것이었다. 조선사회의 폐해 가운데 하나인 서자에 대한 차별도 거기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면 누가 적자고 서자였는가? 우리 외할머니가 전주 이씨이시다. 그래도 할 말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