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술을 만드는 표현들에 대해
흔히 차를 탄다고 한다. 너무 당연하게 쓰이는 말이다 보니 무협소설을 보다가도 차를 탄다는 표현을 흔히 보게 된다. 원두커피를 마시면서도 커피를 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에 원래 차를 탄다는 자체가 인스턴트 커피에서 나온 것이다. 정확히 다방커피 만드는 방법이 뜨거운 물에 인스턴트 커피와 프림, 설탕을 차숟가락으로 떠서 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차보다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되면서 커피가 차를 대신하게 되었고 차까지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원래는 차를 우린다고 썼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것이다. 찻잎을 따뜻한 물에 넣어 자연스럽게 그 성분이 녹아들도록 하는 것이었다. 커피는 내리는 것이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일반화되기 이전까지, 그리고 차가운 물에 우리는 더치커피가 유행하기 이전에는 대개는 드립커피가 원두커피를 마시는 대표적인 방법이었었다. 모카포트는 사실 아주 최근까지도 그런 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긴 원두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자체가 그리 오래지 않다. 박근혜 정권까지 나 역시 커피는 인스턴트만, 그것도 믹스커피만 먹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쓰이는 표현이 '곤다'는 것이다.
한국의 차는 차가 아니다. 오래전 보았던 어느 드라마의 대사다. 중국인이 조선에 와서 차를 마시고는 일갈하는 장면이 있었다. 원래 차라는 것은 차나무 잎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스민차나 말리차 같은 것들은 찻잎이 들어갔으니 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차나 관음차, 홍차 같은 발효차들 또한 찻잎으로 만드는 것이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차문화가 크게 발달하지 못한 조선에서 차를 대신하던 이름만 차인 음료들이었다. 이를테면 생강차, 대추차, 귤차, 꿀차, 오미자차, 유자차, 모과차 같은 것들이다. 분명 이름에는 차가 들어가는데 정작 찻잎은 쓰이지 않았다. 차와 만드는 방법도 다르다. 그래서 여기서도 쓰이는 어휘가 달라진다. 어떤 것들은 그냥 뜨거운 물에 섞기만 하면 되는데, 어떤 것들은 일정 시간 물을 끓이거나 해서 강제로 성분을 추출해야 한다. 전자는 인스턴트 커피와 같이 타는 것일 테고, 후자의 경우는 곤다는 표현을 썼었다. 차를 아주 잘 고았다. 그 장면에 등장한 차가 바로 밤차였다. 조선의 차가 차가 아닌 이유일 터다.
아무튼 비슷하게 술을 만드는 것도 몇 가지 서로 다른 표현이 공존해 왔었다. 이를테면 술을 빚는 것은 누룩을 만드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었다. 전통주를 만들려면 먼저 누룩부터 빚어야 했다. 정확히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어 그 위에 누룩이 내리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면 그 누룩이 생쌀이든 고두밥이든 재료의 탄수화물을 당으로 분해한 뒤 효모로 하여금 알콜발효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이 다음의 과정에서 주로 막걸리나 청주에 쓰이는 술을 거른다는 표현이 나왔다. 곡물을 발효하고 난 뒤 맑은 술만 거른 것이 청주, 그리고 남은 찌꺼기에 아직 다 걸러지지 않은 알콜을 물을 섞어 거칠게 마시는 것이 탁주, 그 탁주마저 거리고 나면 남는 진짜 찌꺼기가 지개미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술을 만든다는 것이 공장에서 생산된 희석된 주정에 재료를 섞어 성분을 추출하는 의미로 바뀌면서 술은 담그는 것이 되었다. 더이상 집에서 술을 빚지 않게 되니 대부분 사람들에게 술이란 그렇게 희석된 주정을 사다가 재료를 넣어 담그는 것이 되었다. 참고로 그래서 소주는 원래 내리는 것이었다. 소줏고리에서 소주를 받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아, 술을 받는다는 표현도 있는데 이건 술을 구매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 한국말이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한국말의 표현들은 적확한 어휘의 의미보다 정황적인 묘사나 연상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냥 make가 아니다. 그냥 造가 아닌 것이다. 집을 지을 때도 어떤 때는 짓는다 하고 어떤 때는 올린다 한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차이를 거의 구분해서 알아듣는다. 어떤 때 짓는다 하고 어떤 때 올린다 하는가. 그리고 연상하기도 한다. 세운다 했으면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 된장찌개를 어디선가는 끓인다 하고 어디선가는 담근다 한다. 아, 그래서 김치는 담근다는 것이다. 김치의 어원 자체가 채소를 소금물에 담그는 침채에서 온 것이다. 글을 쓰기도 하고 끄적이기도 하고 휘갈기기도 하며 두드리기도 한다. 다만 그런 만큼 그런 차이를 무시하면 또 글이 매우 어색해진다.
글을 쓰면 쓸수록 어렵다 여기는 이유다. 단어 하나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비슷하면서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힐 수 있다. 보는가, 살펴보는가, 돌아보는가, 지켜보는가, 바라보는가,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훑어내리고, 쓸어내리고, 헝클이고, 그때그때 어울리는 표현을 찾아 쓰는 것이야 말로 어쩌면 글을 잘 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더욱 글을 쓰면서 사전을 끼고 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과연 지금 상황에 이 표현은 적절한가. 예문을 보면 얼추 이해가 된다. 아직 나는 무척이나 한국말에 서툴다. 지금에 와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듯하다.
노릇노릇과 누리끼리의 차이를 이해한다. 노란과 누런의 차이를 바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 까무잡잡한 것과 거무스름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파란 것과 푸른 것도 전혀 다른 색인 것이다. 빨갛고 붉은 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달콤하고 달큰한 것이 다르고, 산뜻한 것과 선뜻한 것이 다르다. 이런 글 쓰면 또 어떤 인간들은 선비질한다 지랄하겠지만. 내가 어린 놈들을 싫어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뭔 말을 못하게 한다. 무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병신들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