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일론 머스크의 정부효율화에 대한 근본적인 우려와 경계

가난뱅이 2025. 2. 26. 17:27

1의 힘으로 1의 일을 하는 것을 효율이라 부르지 않는다. 1의 힘으로 최소 1.1, 아니 다들 1.1을 한다면 1.2, 1.3, 나아가 2까지는 할 수 있어야 그를 효율이라 말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써서 평범하게 한 사람 만큼 일하는 것을 그 이상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효율이고 능률인 것이다.

 

사람이 음식물을 섭취해서 그를 에너지로 바꿔 쓰는 비율이 대략 40% 정도라고 한다. 나머지 60%는 소화와 대사과정에서 낭비되는 셈이다. 그게 평균이다. 즉 원래 대부분 사람은 그 정도로 음식물을 에너지로 쓰는데 이를 더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평균을 벗어나도록 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실제 일론 머스크는 제프 베조스와 함께 직원들의 복지나 워라밸과 같은 개념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들로 흔히 알려져 있기도 하다. 남들처럼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일찍 퇴근해서는 주어진 일을 모두 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최소한의 인력만을 고용해서 주어진 일을 해내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 효율일 수 있는 것이다. 뭐냐면 노동자는 단지 기업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끊임없이 논의하고 투쟁하며 도출해 온 결론인 노동자는 기업을 위한 수단인 동시에 노동이라는 수단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또 하나의 주체라는 것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것은 결국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우선이며 그 과정에서 기업도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신의 수단인 노동을 보다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도록 절충점을 찾아 온 것이 지금까지 노동권이 인정받고 보호받아 온 역사인 셈이다. 그런데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부정한다. 사실 이는 어쩌면 그동안 미국의 양대 엘리트주의 정당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해 온 역사의 연장에 있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 쉬운 해고를 통해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져 온 결과 정작 다수 미국 노동자들은 갈수록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중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노동자들이 결국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라고 하는 현실일 것이다.

 

물론 어찌되었거나 법이 그렇고 제도가 그렇다면 사기업은 얼마든지 그래도 될 것이다. 정해진 규범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일 테니. 문제는 그것을 정부로까지 확장하는 경우다.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효율만을 위해 존재할 수 없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기업에서는 당장 필요없으면 해고했다가 필요하면 다시 고용해 쓸 수 있다. 당장 필요없는 인력을 필요한 부서로 이동시켰다가 필요할 때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 놓을 수 있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겨도 해당 인원만 정리하고 얼마간의 손해만 감수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아니다. 국가는 한 순간의 지연과 공백조차 감당할 수 없는 큰 피해가 공동체 전체에게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세월호를 떠올려보면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이태원 참사 역시 국가의 행정력에 잠깐의 공백이 발생했을 때 어떤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아니 기업도 사실 예외가 아니기는 하다. 그런 식으로 효율을 추구하면서 돈만 잡아먹는 자체 공장들과 인건비도 비싸게 드는 장기근속 기술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한 결과가 잇따른 보잉사 항공기들의 사고와 한때 몇 수 아래로 보았던 경쟁자들에게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인텔의 현재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니. 자기가 이해 못하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 연구개발에 소홀한 결과가 그동안 삼성이 추구해왔던 초격차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오히려 다른 경쟁자들에게 기술에서 밀리는 현실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래봐야 결국 사기업의 문제라는 것이다. 경영진과 주주와 노동자만 피해보고 마는 것이다. 당장 대단치 않은 연구들이라고 지원을 중단할 경우 그 연구에 종사하던 학위를 가진 연구원들 다수는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고, 이후 설사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연구가 있어서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려 할 때 그들은 이미 현업에서 이탈한 상태일 수 있는 것이다. 당장 해외의 국가들에 지원하는 재정이 아까울 수 있어도 그렇게 지원하는 재원들은 이후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이익을 정의로 바꾸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 항공안전을 책임지는 인력이 과로로 인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다면 그 피해는 누가 입게 될 것인가. 

 

국가란 그만큼 방대한 구조이기에 수 억에 달하는 인구와 그에 따른 수많은 가능성과 변수들을 모두 통제하려면 그만큼 방대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가운데는 지금 당장은 필요가 없어 방치되고 있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구조와 요소들도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인체의 효율성과도 매우 일맥상통한다. 실제 사람의 근육 가운데 일상에서 주로 쓰이는 것은 대개 일부 뿐이다. 자기 몸의 근육을 모두 다 쓰면서 생활하는 사람은 오히려 거의 드물다. 하지만 어떤 근육도 결국은 언젠가 어떤 상황에서는 쓰일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당장의 필요만으로 판단할 경우 그같은 만일의 상황에 대한 대비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당장 일론 머스크 자신만 하더라도 트위터를 인수하고 바로 해고부터 했다가 정상적으로 기능이 돌아가지 않자 해고한 직원 가운데 일부를 다시 채용한 전력이 있었다. 기업이야 그냥 손해만 보면 그만인데 국가단위에서도 그럴 수 있다고? 그래서 더 고약한 이유가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 공무원들 100명 쓸 것을 더 똑똑하고 능력있는 50명만 쓰면 비용을 아낄 수 있다. 능력있는 50명만 쓸 것도 20명만 쓰고 일하는 시간을 늘려서 더 악착같이 쥐어짜면 더 적은 비용으로 일하게 할 수 있다. 나머지는 도태시킨다. 수 억의 인구를 책임져야 할 공무원들에 대해 평범한 개인이 아닌 특출난 소수를 전제로 조직을 구성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평범함에 대한 혐오다. 특별하지 않은 개인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다. 자기라면 그럴 수 있다. 능력없는 다른 사람이면 못할 일을 자기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평범한 다수의 보편적인 개인이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소수만을 전제로 구상하여 그에 미치지 않는 이들은 도태시킨다. 무엇을 위해서? 그러니까 기업은 돈을 벌려고 그런다 친다면 국가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모든 나라들에 관세를 물린다면 소득세같은 건 내지 않아도 된다는 트럼프의 말에 답이 있을 것이다. 결국은 자기가 내는 세금을 줄이겠다. 국가와 국민조차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면 어째서 젊은 세대들은 이와 같은 일론 머스크의 무도함에 열광하고 있는 것인가. 당장 조류 인플루엔자로 계란값이 폭등하는 상황에 방역을 책임지는 공무원의 수를 늘려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줄이려 하는 그같은 행동들에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내는 것일까? 자기들은 특별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2030 남성들이 주 69시간을 지지한 이유일 것이다. 주 120시간을 주장했음에도 오히려 지지한 이유이기도 하다. 여성들이나 나이 많은 4050이면 주 120시간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지만 자기들은 가능할 것이므로 자기들이 우위에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무능력한 이들을 모두 잘라내야 자기들에게도 기회가 돌아온다. 무능력한 자는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들만의 공정함에 충실한 행동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마 조금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 또한 결국 평범한 보편적인 다수의 노동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생산직은 어쩔 수 없이 반복된 작업으로 인해 신체의 부위에 가해지는 부하가 누적되어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 있을 때가 많다. 더구나 고도로 분업화된 현재의 제조업에서 생산직 노동자 다수는 그로 인한 신체적인 질병을 항상 달고 살거나 불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런 노동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 바로 병가라는 것일 게다. 그러니까 일이 힘든 만큼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자신을 위해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한 상태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바로 병가라는 제도인 것이다. 그런데 병가도 쓰지 말라. 물류노동자들이 일하는데 에어컨도 안 틀어준다는 베조스와 더불어 내가 일론 머스크를 극도로 혐오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병가를 너무 많이 쓴다. 그렇다면 생산현장의 노동강도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것이 원래 정상이지 않겠는가. 결국은 반동이다. 역사를 다시 19세기 이전으로 되돌리려 한다. 소수의 부르주아가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수단으로 삼고 지배하던 시절로.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거기에 열광하는 놈들도 마찬가지.

 

국가단위가 되면 구조는 더욱 방대해지고 비례해서 더욱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는데 그를 사기업 수준으로 단순화시켜 사고하려 한다. 소수의 특출난 이들을 중심으로 사기업이 그런 것처럼 몇 가지 단순한 목적과 동기만을 가지고 국가라고 하는 구조를 움직이려 한다. 하필 그런 일론 머스크가 옆에 있으면서 트럼프의 폭주는 집권 1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동안 굳이 효율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아니 그래서는 안되었던 부분들에 대해서까지 그 복잡성을 무시한 채 효율만을 앞세운 결과 오히려 미국은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잃는 한 편, 정작 미국 국내에서까지 국가의 기능에 결손이 발생할 우려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들을 합리적이라며 찬양하는 자칭 중도들을 보면서 그것이 남의 일만은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벌써 꽤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청년세대들로 갈수록 더 극단화 우경화되는 경향을 확인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참 걱정스러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