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에서 유비가 패한 이유? 관우와 장비가 없는 전장이란...
스타플레이어가 반드시 명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스타플레이어 가운데 지도자로서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 흔히 이렇게 설명하고는 한다.
"아니 그 쉬운 걸 왜 못 해?"
이를테면 차범근이 감독이던 시절 선보였던 이른바 뻥축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양 사이드에서 치고 달리다 센터링 올리면 쾅! 쉽지? 차범근은 되었다. 그렇게 독일프로축구에서 전설이 되었었다. 하지만 모든 축구선수들이 차범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이클 조던이 아예 구단을 사들여서 NBA 구단주가 되었을 때 그를 전설로 존경하던 선수들이 그를 뒤에서 욕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유명한 일화일 것이다. 마이클 조던 자신도 나중에 이야기하곤 했었다. 자기가 농구 지도자가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자기 성격이 그걸 못 참는다고. 선수 시절에도 자기 눈에 차지 않으면 아예 대놓고 갈궈대던 인사였으니 코치가 되든 감독이 되었든 지도자가 되었으면 진짜 볼 만했을 것이다.
선동열이 정작 은퇴하고 감독이 되어서 투수운용 가지고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보기에 이렇게 하면 되는데. 하지만 선동열만한 재능은 진짜 몇 십 년 만에 하나 나올까 한 것이었다. 물론 명선수가 지도자로서도 명감독이 된 예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꽤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자기를 기준으로 전술을 짜고 전략을 세우니 그에 미치지 못하는 선수들로는 결과를 내기가 힘들다.
이릉대전 전까지 유비군에는 항상 관우와 장비라는 걸출한 장수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유비가 조조에게 져서 지리멸렬 쫓겨다닐 때도 유비의 옆에는 당시 만인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던 관우와 장비, 그리고 조운이 언제나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중에서 조조와 맞붙었을 때도 관우가 양양을 지키느라 자리를 비우고 있었음에도 장비를 필두로 조운과 황충, 마초, 위연 등이 있어서 조조군의 명장들을 상대로도 법정 등의 참모들의 조언을 받아 세운 유비의 전략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거나 휘하 장수들을 믿고서 작전을 세우면 대충 그대로 이루어지는 전장만을 겪어 왔던 것이었다. 결국 세가 부족해서 생각한 만큼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어도 당대에 많은 명사들이 유비를 영걸이라, 관우와 장비를 만인을 상대할 장수라 인정할 정도는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릉에서는 유비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
관우는 형주에서 손권에게 뒤를 맞아 잡혀 죽고, 장비는 유비를 만나러 오던 도중 부하의 배신을 당해 죽었고, 황충과 마초도 이미 병사한 뒤였다. 위연과 조운이 남았는데 위연은 한중에서 조조를 막아야 했으니 후방에서 본진을 지켜야 할 조운까지 빼고 나면 남는 것이 그동안 다른 장수들의 휘하에서 싸우던 풍습과 장남 같은 듣보잡들 뿐이었다. 실제 이릉대전에서 유비의 애초 전략이 틀어지게 된 이유부터가 유비가 대장으로 내세웠던 풍습과 장남 등이 제대로 손권군의 장수들을 공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손권군의 장수들이 버티기도 잘 버텼지만 그보다 오만하고 방만한데다 치밀하지도 강맹하지도 못했던 일선 지휘관들의 무능이 큰 몫을 했었다. 초전에 기세를 받아 일정 이상의 전과를 올리고 점령지를 넓혀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니 전선만 길어지고 진영과의 간격만 넓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틈을 노리고 육손이 화공을 걸어 오면서 유비는 이릉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결국 유비도 이미 나이가 60이 다 된 터라, 더구나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일선에서 직접 군을 지휘해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유비의 명을 받을어서 실제 군을 이끌고 싸워야 할 일선지휘관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맡을 인재가 사실상 없었다. 여기서도 번성공방전에서 관우가 먼저 공격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할 근거가 나오는데, 그런 와중에도 유비는 그나마 신임하는 장수인 조운을 후방에 남겨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손오와의 전쟁에 올인했으면 무장들도 그에 맞춰서 최선의 인선을 해야 했을 텐데, 정작 전공에서도 가장 앞서는 위연과 조운은 후방에 남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고 전선의 지휘관들은 이제껏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인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아니나다를까 손오군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사실상 그 자리에서 돈좌되며 공세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유비군의 진영이 늘어진 것도 수군을 이용해 보급을 하느라 강가는 제법 안정되었는데 정작 공세에 나선 손권의 진영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결과 강을 따라 늘어지는 결과를 낳은 것이었다.
유비로부터 무려 천 수 백 년이나 뒤의 인물인 나폴레옹 역시 워털루 전투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바 있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나폴레옹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지휘하지 못했던 상황도 비슷했고, 러시아에서의 패배 이후 황제의 자리에서 내쫓기면서 그 과정에서 죽거나 배신하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합류하지 않았거나 못한 원수들의 존재를 아쉬워한 부분도 닮아 있었다. 무모할 정도로 저돌적인 돌격으로 나폴레옹의 승리를 앞장서서 일구었던 뮈라의 존재라던가, 나폴레옹의 명령대로 고지식하게 움직이느라 승기를 놓치고 말았던 그루쉬의 예라던가, 그 밖에 여러 전장에서 죽거나 다쳤거나 다른 이유로 등을 돌린 원수들의 빈자리는 몇 번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리고 오히려 승기를 넘기는 결과만 낳고 말았었다. 이릉대전에서 패전 이후 얼마 안 있어 유비가 죽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당시의 패배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겨질 것이다. 그만큼 당시 촉한의 인재풀은 이릉대전에서도 이미 상당히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진짜 하늘이 유비를 망하게 하려 작심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빨리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인재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서촉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방통부터, 한중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법정과 황충, 그리고 아마 이 무렵 마초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관우와 장비야 유비가 손권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 결심한 이유였으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이들을 대신할만한 인물이 있었는가. 그래서 황권이 중요한 조위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이릉에서의 패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항복했던 것이었고, 마량 또한 이민족들을 설득하다가 살해당했던 것이었다. 각자 역할이 있었는데 역시 야전에서 직접 군을 이끌고 싸울 지휘관이 절대 아쉬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수준의 무장들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서 본 적이 없었다. 최소한 조운 정도는 옆에 끼고서 전장에 나서도 나섰었다. 물론 그런 빈 틈을 제대로 노린 것부터가 육손의 대단한 점일 테지만.
유비가 병신은 아닐 텐데 누가 봐도 이상하다 여길만한 진영을 세운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방만하게 진영을 늘리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유비 자신도 화공으로 재미를 본 적이 많았기에 아주 모르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육손이 세운 방어위주의 전술은 매우 견고했고, 더구나 일선의 지휘관들 또한 견실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내고 있었다. 그런 때 막힌 전선을 타개할 인물이 필요한데 유비군에는 당시 그런 인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유비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장을 만들었을 테고. 그냥 추측이다. 과연 어땠을까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언제나 역사는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사실이든 아니면 망상이든. 이 카테고리의 이름처럼.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