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유비가 헌제가 살아있는데도 황제에 올랐던 이유? 왕위와 정통성에 대해

가난뱅이 2024. 10. 26. 10:57

조비가 헌제로부터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자 한실의 부흥을 부르짖던 촉에서도 유비가 한의 계승을 천명하며 제위에 올랐다. 아직 헌제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산 사람을 죽었다며 제위에 오른 행위가 과연 명분상 정당한 것인가? 차라리 양위를 받고도 헌제로 하여금 작은 고을 하나 주고 그 안에서 황제노릇 계속하도록 해 준 조비가 차라리 유비보다 낫지 않은가? 그러면 어쩌라고? 역적놈들이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으니 아직도 그냥 옛황제만 모시고 있으라고?

 

명나라 때도 당시 황제인 정통제가 오이라트부를 토벌하겠다고 친정에 나섰다가 포로로 잡히자 병부시랑이던 우겸이 나서서 경태제를 새로 옹립하여 북경에서 에센의 군대를 막아내고 있었다. 황제가 적에게 사로잡혀 인질이 되어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영을 내려야 할 권력의 중심이 부재할 경우 자칫 분열로 자멸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조정의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서라도 황제는 필요했던 것이었고, 에센이 정통제를 인질로 내세울 경우를 대비해서도 인질로서의 가치를 약화시켜야 한다. 더구나 상대가 황제를 칭했는데 내가 아직 왕이라면 의전이나 호칭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를테면 중국의 관제에서 황제가 임명할 수 있는 관직과 왕이 임명할 수 있는 관직의 차이가 크다. 어찌되었거나 자신들이 모시는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를 칭하는데 그에 준하여 의전도 하고 관직도 내리는 상황에 아직 이쪽은 왕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명분상 손해가 상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와 촉이 각각 황제를 칭하자 오에서도 뒤질새라 황제를 자칭한 것도 그래서다. 구한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도 굳이 일본이 나서서 고종을 황제로 만들어 준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일단 조선을 청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려야 정당하게 청으로부터 떼어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아직 조선이 청으로 책봉을 받는 왕의 지위에 남아 있으면 외교적으로 청을 배제하고 조선을 건드리는데 장애가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아직 조위 치하에서 헌제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이미 제위를 잃었는데 그 명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를 다시 되찾는다는 것도 지난한 노릇인 것이고,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기에는 또 명분이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양한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복위를 천명하기에는 이미 조비는 선양받아 황제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일단 헌제를 어떻게든 모셔와서 다시 황제로 받들던가, 아니면 헌제가 이미 황위를 잃은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던가, 그럴 경우 헌제가 살아있으면 곤란한 점이 있으니 아예 죽었다 말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괜찮은 프로파간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설사 헌제가 황위를 잃었어도 어떻게든 다른 황족을 통해서라도 한이라는 왕조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헌제를 무시해서도, 한실부흥이라는 명분이 기만이어서도 아니라는 뜻이다.

 

북송이 멸망했을 때도 황제를 비롯해서 대부분 황족들이 여진에게 끌려가자 겨우 남은 황족 하나가 강남으로 내려가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금의 영토에 황제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강남에서 따로 조정을 차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덕분에 금이 황제들을 다시 돌려보내겠다 했을 때 남송 조정에서 그것을 꽤나 곤란하게 여기고 있기는 했었다. 이전의 황제들이 돌아오면 지금 황제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렇더라도 황제가 없다고 그 자리를 비우면 왕조의 정통성 자체는 끊기고 마는 것이다. 새롭게 금에 맞설 구심점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황제가 사로잡히거나 혹은 강요에 의해 퇴위되었다 하더라도 그를 이유로 황위를 비우는 경우는 오히려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전부터 자신이 한나라 황실의 피를 이었음을 명분으로 삼았던 유비가 선양으로 황위를 내놓은 헌제를 대신해서 한의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헌제로부터 역적 조조를 토벌하라는 밀조도 맏았었기에 더욱 그를 명분삼아 한왕조를 무너뜨린 역적에 맞서 그 정통을 잇는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역적 조조를 토벌하고 한왕실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서. 그러면 만에 하나라도 유비가 조비를 무찌르고 다시 중원천하를 되찾았을 경우 헌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앞서 예시로 들지 않았던가. 북경공략에 실패한 에센이 다시 정통제를 돌려주었을 때도 이미 황제로 즉위한 경태제는 그대로 황제로 남아 있었고 정통제만 상황으로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경태제가 후사도 없이 죽고 나니 정통제가 다시 친위쿠데타로 황위를 되찾아 천순제가 되기도 했었다. 굳이 헌제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해서 비난하는 것은 그냥 사감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튼 요즘 토탈워:삼국을 하면서도 새삼 느끼게 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서양 놈들의 왕위에 대한 이해가 또 동양의 그것과 너무 다르다. 정작 후한말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인데 가만 하고 있으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왕조의 정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벌어지는 결과다. 차라리 코에이 삼국지가 낫더라는 이유이고. 역사에 대한 이해는 확실히 코에이 삼국지 쪽이 훨씬 낫다. 정설이 정설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망상은 그냥 망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