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촉한의 인재들을 다 말아먹었다? 글쎄...

가난뱅이 2024. 11. 18. 00:01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촉의 인재를 다 말아먹었다는 주장에 대해 내가 회의를 가지는 이유는 하나다. 그 인재들이 손오군의 방어를 제대로 뚫지 못했었다.

 

이릉에서 유비의 진영이 늘어진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손오군의 성과 진영을 하나씩 들이쳐 공격하는데 정작 대장을 맡은 풍습과 장남이 그것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해 진격로를 따라 진영이 길게 늘어진 것이었다. 물론 방어전을 지휘한 육손 역시 그것을 노린 것이었고. 지키고만 있으면 반드시 유비의 진영에서 허점이 드러나게 된다.

 

당시 유비군은 손오군과 장기전을 치를만한 여력이 사실상 없다시피 했었다. 그것은 이후 제갈량이 북벌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드러난 바 있었다. 대군을 일으키기에는 익주는 너무 작았고, 그런데다 북쪽에는 강대한 조위군과도 대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익주를 완전히 장악했다기에는 불안요인이 아주 없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유비가 가장 신임하는 지휘관들인 위연과 조운을 각각 조위군과의 한중전선과 익주의 후방에 남겨둔 채 군을 진격시켰던 것이었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유비의 나이도 한 몫했다. 차근히 하나씩 적의 진영을 함락시키며 나아가기에는 더구나 유비의 남은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하필 유비는 전쟁 직전 친형제와도 같던 장비까지 잃었던 터였다.

 

그런데 사실 유비군의 약점은 손오군의 약점이기도 했는데, 특히 이 가운데서도 북쪽의 조위군의 위협은 내가 여몽을 전략가로서 절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형주에서 관우의 뒤를 치고 심지어 그를 죽이기까지 하면 유비가 복수에 나설 것은 조위군의 참모들까지 이미 예상하고 있던 사안이었는데 이를 전혀 대비하지 않았었다. 더구나 자칫 유비가 손오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왔을 때 북쪽에셔 조위군까지 움직이면 손오는 양면에서 둘러싸여 그대로 패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이때 조위의 황제가 조비라서 멍청하게 때를 놓치고 뒤늦게 나섰다가 망신만 당하고 끝나고 말았었다. 이릉에서도 육손이 잘 막았으니 망정이지 유비가 조금만 더 느긋하게 군을 움직였으면 또 결과가 달라졌을지 몰랐다. 그런데도 형주 하나 먹겠다고 유비와의 동맹을 박살내 놨었으니. 그리고 결국 유비를 백제성까지 몰아붙인 육손도 조위군의 위협에 군을 돌려 사실상 유비군 자체를 끝장내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이것은 육손이 잘한 것이지 형주에서의 배신이 현명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아무튼 아무리 전투에서 방어가 더 유리하다고 하더라도 당시 유비군의 장수들 가운데 손권군의 방어를 제대로 뚫어낸 이가 사실상 없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패해 쫓기면서 분전한 이들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만 그렇다고 손권군의 방어를 뚫지 못해 전선이 늘어지게 만든 책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당시 이릉에서 유비가 잃은 인재들이라는 것이 손권군이 작심하면 그 방어조차 제대로 뚫지 못할 정도의 인재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정도라면 유비 사후 제갈량과 함께 북벌에 종사했던 인재들만 하더라도 크게 뒤쳐져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진짜 아쉬운 인재가 둘 있으니 바로 백미의 어원이 된 마량과 북쪽에서 조위를 견제하다 고립되어 항복했던 황권이었다. 한중공방전을 처음부터 설계한 두 사람이 법정과 황권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유비로서는 꽤나 뼈아픈 손실일 수밖에 없었다. 마량은 내정에 있어 장완이나 비의 이상을 기대해 볼 수 있었던 인재였다. 하긴 풍습이나 장남 중 하나만 있었어도 최소한 가정에서 마속의 병신짓 정도는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기대해 볼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어차피 전선도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때 잃은 인재들 수준이 그리 대수로웠을까는 회의가 있다.

 

물론 육손이 지휘한 손오군이 잘막은 것도 분명 있다. 그런데 그런 방어를 뚫으라고 일선지휘관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비가 직접 군을 이끌면서도 대장을 따로 두어 군을 지휘케 하는 것은 최전선에서 적의 방어를 뚫고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을 해내면 유능한 것이고 못하면 무능한 것이다. 한중에서는 장비와 황충이 초전에서 그 목표들을 제대로 달성해냄으로써 이후의 대치과정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끝내 승리를 일구어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리이리하면 이길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리이리가 안되었다. 그래서 제갈량도 그리 마음에 안 들어 하면서도 위연을 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게 안되면 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 점들까지 고려해서 전략을 짜는 것이 최고지휘관의 역할이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관우가 죽었을 때 조위측의 반응이 사실 정답이었던 것이다. 유비군에 명장이라고는 관우밖에 없었다. 장비가 여러 방면에서 크게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역시 유비군 안에서 하나의 방면을 맡아 책임질만한 장군은 관우 정도였었다. 그런데 그 장비마저 죽었다. 제갈량이 북벌에 나섰을 때 조진군은 그나마 남은 조운을 가장 경계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별 볼 일 없다. 그러게 평생 쫓겨다니기만 한 유비의 군중에 인재라고 해봐야 얼마나 있었을까? 손오군과 그 기본부터 달랐던 터다. 그래도 이릉의 패전이 뼈아팠던 것은 사실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