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삼국지의 유선은 과연 무능했을까?

가난뱅이 2024. 10. 31. 01:46

유선과 같은 시기 황제노릇했던 인사들이 조위의 경우 조예, 조방, 조모, 조환이다. 손오는 손권부터 시작해서 손량, 손휴, 손화, 손호가 이어받는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아예 사마씨에게 실권을 내주고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다가 심지어 그 가신에 의해 살해당하기까지 했던 조씨의 위나라나, 이궁의변 이후 제대로 된 황제 없이 허구헌날 내분에 폭정에 실정에 바람 잘 날 없던 손씨의 오나라에 비해 촉한은 진짜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을 제외하고는 그저 잔잔하기만 했다. 심지어 제갈량이 죽고 장완과 비의까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큰 일 한 번 없이 조용히 지나갔었다.

 

흔히 환관 황호가 후주 유선을 둘러싸고 국정을 농단했다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국정이 혼란스럽던 와중에도 정작 제갈량이 만들어 놓은 촉한의 체제 근간이 흔들리거나 하는 경우는 그다지 없었다. 여전히 강유는 북쪽에서 조위를 상대로 일진일퇴를 하고 있었고, 제갈량의 아들 또한 문제없이 유선의 사위가 되어 조정에서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대단하게 억울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옥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권신들이 서로 권력을 두고 다투느라 정변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대신들이 붕당을 나눠 서로 참소하거나 혹은 실제 무력을 투사하여  죽고 죽이는 일도 없었다. 이민족들의 소소한 반란은 있었어도 대규모 반란 역시 일어난 적 없었다. 그러면 된 거지.

 

그러니까 촉의 후주 유선이 재위한 기간만 40년이란 것이다. 이전이나 이후나 왕이 40년 넘개 재위하면서 크게 사고 한 번 없었던 경우란 청왕조의 강희제 말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니 강희제도 말년에 늙어서 그런가 실수가 좀 많았다. 왕조국가의 한계다. 왕이라고 해봐야 결국 부모 잘 만난 사람 중 하나에 지나지 않기에 같은 자리에서 오래 있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질리기도 하고 긴장감도 풀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조예도 초반에 잘나가다가 말년 되면서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소모하는 궁궐공사만 몇 번을 일으키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등 할아버지가 세운 나라를 말아먹는데 크게 일조를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말년에 긴장이 풀렸다기에는 그 재위기간이 유선의 절반도 안되는 13년에 지나지 않았었다. 뒤를 이은 조방이나 조모, 조환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조조가 아들을 낳으려면 이쯤은 되어야 한다며 칭찬했던 손권은 또 어떠할까? 손권이 형 손책으로부터 강동을 물려받은 것이 서기 200년, 죽은 것이 서기 252년이니 해쳐먹인 긴자 오래 해 쳐먹었다. 그런 만큼 사건사고도 많았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손오의 내정을 한 방에 박살내다시피 한 이궁의 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궁정 내부의 갈등과 다툼을 방치하고 오히려 조장한 결과 육손마저 거기 휘말려 분사하고 말았을 정도였다. 수많은 인재가 죽어나갔고, 그 영향은 이후 손오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몇 번이나 합비를 공격했다가 참패만 당하고 온 것이나, 압도적인 조위를 상대로 유비와 연합하고 있던 상황에서 형주를 탐내서 결국 조위를 공략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던 것은 전적으로 손권 자신의 판단이었으니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형주는 얻지 않았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형주를 차지하느라 유비와 아주 사생결단을 내 버린 결과 손오는 멸망할 때까지 강동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방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관우의 뒤를 쳐서 형주를 차지하자 노숙은 못한 걸 여몽은 해주었다며 좋아하는 꼬라지를 보면 딱 그릇이 그 정도였던 것이었다. 하긴 아버지나 형을 보면 손씨의 근시안은 그냥 내력인 듯하다. 그런데 하물며 손권의 뒤를 이은 황제들이야 뭐 이름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기는 한가.

 

아니 굳이 조위와 손오만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조위를 물려받아 삼국을 통일했던 서진은 어떠할까? 이미 서진을 개창한 황제였던 사마염조차도 말년이 되면 사치와 향락으로 나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염 죽고 나서는 그 유명한 팔왕의 난으로 나라가 절단나기까지 고작 50년 남짓 걸렸을 뿐이었다. 그나마 사마염이 재위한 25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간은 그야말로 온 나라가 작살나는 아싸리 판이었다. 그러면 뒤를 이은 이른바 5호 16국과 남북조시대는 어떠할까? 그 기간 동안 유선의 재위기간 만큼 이어진 왕조가 없었을 정도였다. 그 남북조를 통일한 수도 아들대인 양제에 이르러 그냥 망해버렸고, 수를 이어받은 당도 태종의 치세를 제외하면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고종조차 말년이 좋지 못했다. 오대십국이나 이후 송왕조도 굳이 돌아볼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과연 이들의 치세에 비해 유선의 재위기간에 얼마나 더 사건사고가 많았을 것인가. 

 

유선이 욕먹는 이유는 사실 다른 것보다 등애가 힘들게 산을 넘어왔는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 하나가 다라도 봐도 좋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일으켜세운 왕조를 보급도 제대로 받기 어려운 처지였던 등애에게 제대로 대항조차 못하고 넘겨주고 말았다. 무력하고 무능하다. 그런데 당시 촉한의 주력은 모두 대위전선에 몰려가 있었고 성도에 있던 것은 2선급 부대들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미 조정의 다수를 차지 하고 있는 대신들은 건국초기와 달리 지역의 토호들이거나 그들과 유착한 이들로 중원을 차지해야 한다는 동기 자체가 약했다. 그보다는 위에 항복하더라도 기득권을 이어나가기를 바라는 이들이 더 많았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초창기 천하를 도모하여 한실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던 것은 대부분 외부에서 온 이들로 토착세력들에게는 그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표가 죽고 그래서 유종도 토착집단이던 채씨와 괴씨들에게 굴러싸인 채 조조에게 저항않고 항복했던 것 아니었던가. 그래도 조위와 싸우고자 하는 이들은 최전선에서 버티고 있었을 테니 성도에서 유선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부분은 단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무리들이었을 터였다.

 

괜히 유선이 실전경험도 없는 제갈첨에게 있는 병력 다 긁어모아 딸려보낸 것이 아니었다. 제갈첨 말고 맡길 만한 인사가 당시 성도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황제노릇한 짬밥이 있었는데 유선이 그것을 몰랐을까? 이후 서진으로 끌려간 뒤로도 유선은 황제노릇을 그냥 한 것이 아니라는 양 제대로 된 처세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 망한 나라의 황제가 자기 잘났다고 나서봐야 자기 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까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나라도 망했고 볼모생활까지 하고 있는 상황에 모의를 해봐야 승자에 줄을 대려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상황에 괜한 시도를 하기보다 그저 납죽 엎드려 지내는 것이 자신은 물론 주위를 위해서도 좋은 것이다. 강유가 괜히 유선을 복위시키겠다 나섰다가 성도에서 피바람이 불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더 그렇다. 그때 공신의 일족들이 수도없이 분노한 위군에 의해 죽어나가고 있었다.

 

유선이 즉위하고 제갈량이 옆에서 보좌한 것이 초반의 11년이었다. 그리고 장완과 비의가 다시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좌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이때 장완과 비의가 가지고 있던 실권은 제갈량과 같지 않아서 상당부분 권한을 조금씩 다시 유선이 가져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란 세월 동안 유선은 어찌되었거나 큰 혼란 없이 촉한 정권을 이끌며 북벌을 이어나가려는 강유 또한 후원해주고 있었다. 그동안 강유에 대해 참소가 올라온 것이 몇 건이었는데, 매번 대위전선에서 패배하고 쫓겨오던 강유를 끝까지 신임하면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해 준 이가 다름아닌 유선이었었다. 이전에도 장완과 비의에 대해서도 하고자 하는 일은 거의 뜻대로 할 수 있도록 지켜보기만 했었다. 비의까지 암살로 죽고 나서는 자기가 직접 국정을 맡아 이전만 못해도 조위나 손오, 아니 이후의 다른 왕조들과 비교해서도 큰 혼란 없이 내정을 이끌어오고 있었다. 옥사가 크게 일어난 것도 아니고, 학정으로 반란이 빈발했던 것도 아니고, 조정의 부패나 무능이야 역대 대부분 왕조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였다. 아니 부패하기로 따지면 삼국을 통일한 서진을 넘어설 왕조가 중국 역사상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낮게 평가해도 그냥저냥 나라를 이끌어 왔다 할 정도는 되는데 그래서 마냥 무능하다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에 아버지가 워낙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손권에 대한 평가가 아버지인 유비에 비해 한참 못미친 것이 가장 컸다. 조조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아쉬움을 느낄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조씨의 위나라야 망하든 말든, 아니 차라리 망했으면 좋을 왕조였기에 민중들이 그에 이입하여 안타까움을 느낄 이유따위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해 유비에 이은 촉한 왕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며 보고 있었으니 그 왕조를 2대만에 말아먹은 유선이 무능해 보이는 것이다. 유선이 재위해 있는 동안 조위에서만 조비에서 조예, 조방, 조모, 조환까지 황제가 다섯이 갈렸고, 손오에서도 손권에 의해 손량, 손휴, 손화, 손호까지 다섯 황제가 즉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그나마 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조위는 조비와 조예, 그리고 손오는 그냥 손권 하나다. 조예도 말년이 망조였었고, 손권도 노망이란 게 무언지 제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촉한에서는 유선 혼자서 나라를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주 나라가 들썩들썩했던 이들 왕조들과 다르게 촉한은 조용하기만 했다. 황호가 국정을 농단했다는데 크게 옥사가 일어난 것도 없고, 대단하게 국정이 파탄나는 일도 없었다. 그냥저냥 중국 역사 전체로 보면 평탄한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다. 그 또한 제갈량의 공이라면 공이겠지만, 아니 그래서 유선이 폄하당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능하다 욕할 정도까지 되는가.

 

어째서 등애가 산을 넘어 후방을 치고 왔을 때 유선은 제대로 저항조차 않고 나라를 넘기고 있었는가. 등애를 막겠다고 군사들을 실전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이 이끌고 있었다. 그를 보좌하는 인물마저 아버지가 위에 항복하며 끈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던 황권의 아들이었었다. 마막이 병신이라서 등애만 보고도 바로 항복했던 것일까? 나헌은 어째서 유선이 항복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위에 항복한 촉을 위해 오군과 맞서 싸웠던 것일까. 무엇보다 강유의 북벌은 어째서 내부의 수많은 반발을 불러왔으며, 유선을 복위시키고자 강유가 종회와 난을 일으켰을 때 다수 촉의 유신들은 침묵하고 있었는가? 그 맥락을 이해하면 유선의 항복도 마냥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유씨는 외부인이었고, 토착세력들이야 누가 천하를 차지하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과연 유선이 무능했는가 의문을 가지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유선과 동시대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실제 오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던 서진의 사마염만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사마염이 과연 유선보다 황제로서 국정을 잘 이끌어 나갔었는가. 그 이후의 황제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남북조의 황제들은 더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유선을 무능했다 말할 수 있는 황제는 수문제와 이어서 들어선 당의 태종 정도가 그나마 자격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아버지가 워낙 대단했어서. 따라서 그에 대한 기대가 컸던 때문이다. 아버지가 하필 유비라는 것 말고 엄밀히 따져서 과연 유선이 무능했었는가 돌이켜보면 그렇게 판단할 이유는 그다지 없음을 알게 된다. 삼국지 후반의 내용이 그만큼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까닭이다. 기대치가 높았다.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