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민주당의 정당민주주의와 다양성? 불관용과 관용!

가난뱅이 2025. 2. 14. 18:08

파시즘의 대두 이후 민주주의 사회에는 한 가지 대전제가 화두처럼 던져졌었다. 불관용에 관용이 있어서는 안된다. 다양성이란 당연히 관용이다. 대화와 타협, 화합과 공존이란 결국 서로에 대한 관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고 화합하면서 공존을 꾀하려는데 누군가 일방적으로 자기의 입장만을 강요하며 다른 주장들을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행위마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했을 때 과연 그 사회는 다양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것이 나치가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쟁취하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었던 이유다.

 

흑인은 아예 공공장소에 나서서도 공직을 맡아서도 안된다는 인종주의자들마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한다면 자칫 그들이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사회의 다양성 가운데 흑인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을 그대로 현실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공정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을 때 정당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불리한 위치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좋은 대학 나와서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이들만이 모든 권리를 독점하고 행사해야 한다는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 사회의 다양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여성과 유대인, 집시, 성소수자, 빈민, 혹은 제도권 안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현실로 구현하고자 하는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유의지주의자, 종교주의자들도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저놈들은 인정 못하겠으니까 얘는 빼고 얘도 빼고 쟤도 빼놓고 그런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받아들였을 때 과연 그 사회의 다양성은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민주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상대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그래서 민주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독립적인 인격에 대한 절대적인 존엄과 그에 대한 존중인 것이다. 그게 인권이다. 상황에 따라서 주었다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존엄하여 지켜져야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설사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내려진 결론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맞지 않더라도 그 결과에 대해 기꺼이 승복하고 복종할 수 있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나와 다를지라도, 어쩌면 내가 틀리다 생각하는 것일지라도 다수가 그리 판단했다면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따를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하는 제도를 지탱하는 구성요소중 하나인 정치결사로서의 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정당을 구성하는 모든 당원들은 같은 정치적 이해와 지향을 공유하는 동지로써 동등한 자격을 가지며 대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를 존중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 정당으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당원들이 전당대회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그를 통해 결론이 내려졌을 때 그를 복종할 수 있어야 당내 민주주의도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러한 당원들의 주장과 요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 한다면 그 정당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당장 지금 민주당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김대중의 새천년국민회의나, 그 이전에 존재했었던 이승만과 박정희 시절의 민주당 역시 국민 다수의 의사와 상관없이 마치 로마의 원로원이나 초기 영국의 의회처럼 소수 기득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었다. 그래서 바꿔보자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더니 여기서도 정동영이 공천권을 행사해서 지지자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당화하여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었다. 다시 열린우리당을 깨고 민주당으로 합당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표를 주는 지지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혹은 당직을 맡고 있는 소수가 오로지 당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당시의 모습을 보았을 때 과연 그것을 민주주의 정당의 그것이라 말할 수 있었을 것인가. 실제 박근혜가 친박 위주로 보수정당을 재편하고 문재인이 민주당의 대표가 되기 전까지 오히려 정당민주주의가 더 잘 지켜지고 있었던 정당은 다름아닌 보수정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와서 이전의 민주당에 대해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별 것 없었다. 그 소수가 저마다 계파를 만들어서 당원이나 지지자들과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나눠서 해 먹었었다. 그래서 로마 원로원을 이야기한 것이다. 일단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당직을 맡고, 인맥으로 그 안에 포함된 소수가 자기들끼리 편을 나누어 해먹는 것을 다양성이라 민주주의라 말한다.

 

지금 김경수나 김동연, 김부겸, 임종석 등이 말하는 다양성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대통령후보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복하여 선거운동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정당과 내통하면서 지지하기까지 했던 놈들을 다시 받아들이자. 당원이나 지지자와는 상관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당은 운영하면서 오히려 당원과 지지자를 무시하고 모욕하던 놈들을 다시 불러들이자. 그래서 하는 말이 기존의 당원과 지지자들을 극단적인 소수로 몰아붙이는 표현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써왔던 전가의 보도인 외연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당원과 지지자들만으로는 안된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다양성의 대상들은 그동안 당원과 지지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거슬러가면서까지 당 바깥에 존재하는 중도층과 보수층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던 이들이었다. 이 어디에 대등한 동지로써의 당원과 지지자에 대한 존중이 있을 것인가. 동지로써 당원과 지지자를 무시하는 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당의 다양성을 위해, 무엇보다 정당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말하자면 엘리트정치의 복원이다. 이전 원로원 민주당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당원이나 지지자들과 상관없이, 수 백만에 이르는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원래 하던대로 이름있고 세력있는 이들끼리 적당히 주고 받으면서 타협하는 정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신들이 거부하는 이재명이란 존재부터 배제하자. 당장 당원들이 선택한 대표이자 유력한 대선후보인 이재명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폄훼하고 배제를 주장하면서 다양성을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체가 그들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원이 선택한 당대표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은 인정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 스스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표를 부정하는 것이 다양성이다. 그런데 그런 자기기들도 인정하는 것이 다양성이다. 아마 자기들이 지금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 분명 알면서도 다른 이유들로 그런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내가 김경수나 기타 나부랭이들의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이유다. 아마 다른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동안 정작 정당민주주의에서 배제되어 왔던, 정당을 이루는 다양성으로 전혀 그 동등한 주체로써 인정받지 못했었던 오히려 다수를 차지하던 입장에서 어떤 당원도 지지자도 그들의 주장과 요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언론만 난리다. 마치 박근혜 탄핵정국에서 유승민을 보던 민주진영의 입장과 닮았을 것이다. 유승민이면 그나마 보수진영에서 괜찮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괜찮을 뿐 지지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고무되었다. 이만한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준다. 그래서 정작 민주당을 위한다면서 민주당의 당원과 지지자는 외면한 채 그들만 바라본다. 물론 그 이상의 다른 현실적인 이유들도 있을 것이다. 심상정의 정의당이 대선 끝나고 12억을 받았던 사실을 떠올린다. 그들에게 민주당이란 당원과 지지자들의 정당인가, 아니면 자신들만을 위한 정당인가. 링컨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그냥 똥버러지 새끼들이다. 더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