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문득 암군의 역사, 삼성의 현재를 보면서...

가난뱅이 2024. 11. 26. 04:09

전근대 왕조들을 보면 어쩌다보니 왕이 되었기에 그냥 왕위를 지키고 있었을 뿐인 경우를 아주 넘치도록 찾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삼국지에서 암군으로 이름높은 유선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하필 아버지가 유비였다 보니 철도 들기 전에 태자가 되었다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황제가 되고 보니 아버지의 고명을 받든 제갈량이라는 신하가 아버지의 유명을 받들어야 한다며 북벌까지 추진한다. 그 뒤를 이은 장완도, 동윤이나 비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황제가 되고 한실부흥의 대의를 받들게 된 모든 과정이 유선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의한 것이었는가.

 

유선이 항복하는 장면을 보면서 더욱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진짜 황제노릇 하기 싫었구나.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황제라는 게 보기에는 좋을 지 몰라도 황제로서 지켜야 하는 것이 너무 복잡하고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황제에게는 평범한 개인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친구나 가족과 같은 것들이 없었다. 황제에게 황후는 아내가 아니었고 태자는 아들이 아니었다. 신하는 더욱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 역사상 많은 황제들이 환관에 의지했던 것이었다. 마음붙일 곳이 없는 황궁에서 환관은 황제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시피 했었다. 

 

그러면 과연 유선만 그랬었는가? 중국 명왕조에 이르면 그냥 아예 대부분 황제들이 그 꼬라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수 십 년 동안 아예 조회에 출석조차 하지 않았던 대표적인 암군 만력제서부터, 목공에 심취해서 국정따위 환관에게 맡겨 버렸던 천계제라든가, 코스프레하느라 정치따위 안중에 없었던 정통제, 그리고 그 모든 서막을 열었던 세종 가정제까지.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의 황제 자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느냐면 사실 그보다 좋은 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황제에서 내쫓기면 그 처지가 차라리 평범한 백성들보다도 더 비참해진다. 대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그것만 잘 지킬 수 있으면 조금 외로운 것 빼고는 하고 싶은 건 거의 다 해 볼 수 있다. 딱히 황제의 자리를 자기 손으로 박차고 나올 이유가 없기에 주위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반란군을 토벌하고 역적들을 주살하며 황제의 자리를 지키고는 있는데 그러나 딱히 그것으 무언가를 해 보려는 의지도 동기도 없다. 그래서 암군이다. 무능해서도 암군이지만 뭔가를 해 보려는 의욕 자체가 없어서 암군이다.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럽의 왕들은 그래서 허구헌날 하는 것이 파티고 사냥이고 기사시합이었다. 하긴 유럽의 군주들에게는 딱히 백성들에 대한 책임같은 것이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백성은 단지 군주의 소유물일 뿐이었고, 군주의 통치행위란 자신이 물려받은 군주라는 자리와 그에 딸린 것들을 지키고 늘려가는 일련의 행위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럽의 역사를 보면 그나마 군주들이 의욕을 가지고 하는 일들이라는 게 남의 나라와 전쟁을 해서 영토를 빼앗거나, 혹은 자신의 혈통에서 비롯된 권리들을 쟁취하고 지켜내는 것들 정도였다. 그마저도 자기가 귀찮으면 안하고 놀기만 해도 된다. 매일 궁정에서 파티나 열고, 사냥이나 다니다가, 혹은 직접 기사시합에 참여하기도 하고, 괜히 예쁜 여자 있으면 애첩으로 삼기도 하고. 그를 위해서 필요하면 그때그때 자신의 소유로 있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기 위한 결정들을 내린다. 그래도 되었던 이유는 당시 유럽의 군주들이 거의 그러했으니까. 그래서 세계사시간에 배우는 유럽의 역사에는 군데군데 빈 자리들이 오히려 더 길고 많다. 사실상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왕들의 자리다.

 

정도전이 재상총재제를 주장한 이유였다. 아니 이전부터도 사대부들은 그와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송대와 원대를 거치면서 자신도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한고조 유방과 촉한의 선주 유비가 그저 신하들의 능력에 기댈 뿐인 인물들로 묘사되기 시작한 이유였다. 그러니까 군주는 그저 덕을 가지고 군림하며 모든 정치는 그의 신임을 받는 사대부인 대신들이 전담한다. 황제에게만 모든 국정을 맡기기에는 함량미달인 놈들이 역사에는 오히려 더 많았다는 것이다. 당나라만 해도 그나마 쓸만한 황제는 태종과 고종, 현종 딱 셋이 전부이고, 그나마 고종과 현종은 말년을 그대로 말아먹었었다. 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송나라 휘종이라는 놈은 차라리 예술가로 태어났으면 족했을 놈이었다. 그런데 그런 놈들을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그냥 황제의 자리에 올렸으니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 있나. 그렇다고 능력을 따져 자리를 물려받게 하면 로마 꼴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왕위는 알아서 핏줄을 따라 물려받고 다스리는 건 검증된 사대부가 하겠다.

 

결국 영국이 채택한 입헌군주제도 같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왕이란 놈들이 능력은 둘째치고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의지나 동기조차 가지지 못하는 놈들이 태반이니 그럴 목적과 동기를 가지는 이들이 국정을 책임지고 왕은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으라. 역사를 보더라도 단지 핏줄만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놈들치고 변변한 놈이 없고, 그런 놈들로 인해 왕조가 한 번 휘청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었다. 지금 전세계에서 혈연에 의해 권력을 세습하는 왕조국가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가 그래서다.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핏줄만으로 왕위를 물려받게 하면서 권력까지 쥐어주면 나라 씹창난다. 그러니 왕위는 혈연으로 물려주더라도 다스리는 건 다르게 하자.

 

그냥 삼성 돌아가는 꼬라지 보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사실은 유선에 대해 쓰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이재용은 꼭 유선과 같다. 집안의 가업이니 삼성을 물여받아야겠고, 아버지의 유산이니 회장자리에도 올랐지만, 그러나 과연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총수로써 이재용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진정 무엇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루고 싶은 것인가? 그러면 차라리 물려받은 삼성전자라도 잘 꾸려가야 할 텐데 딱히 거기에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 않다. 그런 때 신임받는 측근들이 날뛰기 딱 좋다. 오너는 자리만 지킬 뿐 관심이 없을 때 바로 그 측근들에서 그 권위를 등에 업고서 마음대로 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건 보잉이나 인텔보다 더 최악인 경우다. 보잉이든 인텔이든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주주들이 경영진을 갈아치울 수 있지만 삼성은 오너가 모든 판단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재용에게는 삼성이라는 대기업을 이끌어갈 능력을 넘어 그러고자 하는 의욕이라도 있기는 한가.

 

혜강 최한기가 미국의 대통령제에 대해 들었을 때 만국의 공법에 맞는다며 극찬한 바 있었다. 천하는 대동으로 모두의 소유인데 단지 핏줄로써 왕위를 물려받는 것보다 백성들이 뜻을 모아 그때그때 걸맞는 대표를 뽑는 것이 유학의 가르침에 비추어도 지극히 옳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망명지에서 출범했던 임시정부의 이름이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이 되었던 것이었다. 어째서 디즈니든 휴렛팩커드든 MS든 창업자나 혹은 그 후손인 대주주가 있음에도 전문경영인에게 모든 판단을 맡기는가. 답답한 것이다. 심지어 이재용이 가지고 있는 삼성의 지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오너의 판단이 한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일하는 직원들 수 십만과 돈을 투자한 주주들의 이익까지도. 무서운 일이다. 당사자에게는 아닐지라도.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