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막부의 유래와 봉건사회에서의 관제와 군제의 이해

가난뱅이 2024. 11. 11. 22:09

원래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장군이란 상설직이 아닌 필요할 때마다 임명하는 임시직에 더 가까웠다. 당연히 장군이 임시직인 만큼 그를 보좌하는 역할들 또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전한대에 이르러 제도화된 것이 바로 막부라는 것이었다. 전장에서 장군이 자신의 휘하를 막사에 모아놓고 의견을 모으고 지시를 내리던 것을 관청을 뜻하는 부府를 뒤에 붙여 막부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

 

삼국지 정사를 보면 나오는 군사를 물려받아 이끌게 했다느니, 군사들을 누구에게 속하게 했다느니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관련한 내용들이라 볼 수 있다. 어차피 남북조까지도 국가가 직접 세금을 거두어 관리들에게 녹봉으로 지급하기까지 하는 건 언감생심이었고, 따라서 대부분 녹봉은 직접 세금을 거두어 쓸 수 있도록 식읍을 나누어주는 식으로 지급되었다. 역시나 정사에 나오는 몇 백 호의 시급을 내렸다느니 몇 천 호의 식읍을 더했다느니 하는 내용이 이에 대한 것들이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병사들 역시 국가에서 직접 징집해서 무장시키고 녹봉도 지급하기보다 각 군을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지급한 식읍 안에서 해결하도록 할 때가 많았다. 말 그대로 봉건제다. 중세유럽의 봉건제가 여기서 각 장수들이 지급받은 봉지를 작당해서 돌려주지 않고 자손대대로 물려받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상속세도 나온 것이다. 원래 주군의 것이었던 영지를 돌려주지 않고 자식에게 물려주려니 일정한 세금을 댓가로 지불해야 했는데 이게 바로 상속세의 유래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상속세라고 하는 세금 자체가 없었다.

 

다시 말해 후한말에 장군의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지급받은 녹봉만큼 책임져야 할 식구까지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장군의 책임아래 들어온 군식구들 가운데는 그저 시키는대로 나가 싸우는 병사들 말고도 장군을 보좌하여 계책을 세우거나 혹은 장군을 대신하여 일정한 군을 이끄는 이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하게 이들은 대부분 주군으로부터 관직을 받기보다 자신을 모시는 장군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지위와 함께 녹봉을 지급받았다. 그런 이들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장군부라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려말 왜구로 인해 정상적인 세금수취와 운송이 불가능해지자 조정에서 각 지역의 유력자들에게 알아서 군사를 모으고 무장시켜서 싸우도록 특권을 허락했었는데 그때 원수라고 불리던 이들이 이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이지란이나 정도전, 정몽주 같은 이들의 경우 고려조정으로부터 받은 관직과 상관없이 이성계의 군중에서 이성계를 도우며 같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위연이 유비 군중의 병졸출신이라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일반 병졸이었다면 그저 위에서 시키는대로 창 들고 활 들고 나아가 싸우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연은 이미 처음 사서에 등장했을 때부터 직접 군을 지휘하여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릉싸움에서 뜬금없이 유비를 대신해서 군을 지휘했던 풍습이나 장남과 같은 이들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는가도 대충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단지 따로 부여받은 관직이 없었을 뿐이다. 유비 개인을, 혹은 장비나 관우 개인을 따르고 있었으니 다른 관직 없이 한 몸처럼 수족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발탁되어 공식적인 직위에 오르면 그때부터 그는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위연이 병졸출신이라는 것도 아예 그냥 창 들고 활 들고 나가 싸우다가 어느 순간 장군으로 발탁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단계를 거쳤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결국 이릉에서 유비군의 주력을 이룬 것은 장비가 이끌던 군사들이었을 텐데 그들에 대한 지휘를 누구에게 맡겼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풍습과 장남도 결국 범강이나 장달처럼 장비의 군중에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장군의 직위에 올라 자기만의 막부, 혹은 장군부를 거느리게 되면 그 움직임이 상당히 둔해지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보좌하는 이들이 많으니 싸움에서 더 크게 실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대신 책임져야 할 이들이 많다 보니 그런 점들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조 진영에서도 하후돈이며 조인이며 조홍과 같은 일정한 지위에 이른 일족의 장수들의 경우 꽤나 조조와 별개로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조가 어디로 가라 하면 혼자가 아닌 자신을 따르는 이들까지 모두 움직여야 하고, 그런 만큼 대수롭지 않은 일에 그들을 동원하기란 군주로서도 무척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조가 자신을 따라다니며 기병을 맡아 지휘하던 조인에게 한 방명의 군을 맡기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하후연에게 아예 한중전선 자체를 맡긴다는 것은 그 아래 속한 모든 것을 하후연에게 맡긴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유비도 한중태수를 자신의 손발 역할을 해야 할 장비가 아닌 위연에게 맡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장비는 한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유비가 원하는 전장을 준비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자식에게 일가를 이루어 나가 독립케 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혹은 기업에서 특정 부서를 독립시켜 사업부로 만들거나 아예 분사한 뒤 독자적으로 경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촉한이라는 전체 기업 가운데 관우라고 하는 지사가 독립해서 계열사가 되는 것이다. 혹은 촉한이라고 하는 기업 안에 장비라고 하는 사업부가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고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기업 총수의 지근에서 그를 보좌하며 필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경우 특정한 사업을 맡겨 몸을 무겁게 하는 것은 오히려 손해다. 삼성으로 치면 미래전략실 같은 경우일까? 더욱 통신도 교통도 아직 미비하던 시절 한 개인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는 이상 그같은 분업화 분사화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전근대사회를 대표하는 봉건적 양식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사정들을 이해하면 전근대사회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 또한 함께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누가 죄를 지으니 그 군사를 빼앗아 누구에게 속하게 했다더라. 원래 누구를 따랐었는데 나중에 발탁되어 누군가의 아래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더라. 누가 공을 세우니 누군가의 군사들까지 모두 아울러 이끌도록 했다. 삼국시대의 10만대군이란 각각의 군을 이끄는 장수들이 모여 만든 숫자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말까지도 그런 흔적들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단일한 체계를 가지는 관제와 군사란 고도의 행정력이 갖추어지고 난 뒤에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