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논쟁과 정의, 비판은 논리가 아니라는 이유

가난뱅이 2025. 2. 9. 03:53

무려 19세기까지, 그것도 유학의 원조인 중국과 바다 건너 일본에서까지 중요하게 받들어졌던 퇴계 이황이지만 그러나 정작 살아있을 당시에는 고봉 기대승에 이어 그 제자인 율곡 이이에게까지 자신의 학문과 관련해서 논쟁만 했다 하면 번번이 깨지기만 하는 불쌍한 처지였었다. 고봉 기대승도 그렇고 율곡 이이도 그렇고 그래서 하다하다 논리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어거지로 밀어붙여 끝내고 말았었으니, 그런데도 조선유학의 큰 스승으로 한참 후대에까지 떠받들려지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물론 그냥 병신이라 이해 못하는 것일 뿐이지만.

 

사실 논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과 그 주장이 옳고 그른 것과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비례성 정도는 있을지 몰라도 직접적인 인과관계까지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아무리 주장하는 바가 옳아도 말 자체를 못하면 논쟁에서 지고 마는 것이고, 주장하는 논리가 아무리 타당해도 미처 생각지 못한 허점을 치고 들어왔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있는 순발력이 없으면 역시 논쟁에서 이기기 힘든 것이다. 서로가 참고자료를 들고서 찾아보며 하는 논쟁이 아닌 이상 기억력의 차이에서도 승부가 갈릴 수 있다. 더구나 마침 이전까지 아무도 하지 않던 주장을 새롭게 펼치는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나의 새로운 주장이나 이론이 정설로써 인정받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들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시작단계에서 논쟁이 벌어지면 말 그대로 대책이 없는 것이다. 당시 퇴계가 그런 입장이었다. 원래 유학에서는 이와 기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었기에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이단에 가까운 것이었고, 따라서 기존의 유학의 논리와 주장들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이황에게 처음부터 불리한 논쟁이었던 것이 그가 논쟁을 벌일 때마다 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진보가 어려운 것이다. 개혁이 그토록 어렵기만 한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그 부정적인 부분만을, 그로 인해 발생할 지 모르는 부정적인 가능성이나 미처 고려하지 못한 현실적인 부분들만을 지적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상대의 주장을 과절시킬 근거를 제시한 것이 되는 것이다. 반면 변화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모든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최대한 치밀하게 구체적으로 완벽한 논리를 펼쳐야지만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시킬 수 있다. 아직은 머릿속으로만, 혹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계획이기에 더욱 그 안에 존재하는 여러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모두 실제로 구현해서 살필 수 없다는 것은 변화를 주장하는 입장에 있어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논쟁에서 저만한 비판들이 이루어졌고 그럼에도 적절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으니 보수가 더 옳은 것이다.

 

자칭 중도들이 자신들을 중도로 포장하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보수라 주장하지 않는 만큼 보수적인 어떠한 주장이나 이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단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제안들에 대해서 그 허점들만을 비판한다. 그 단점과 약점들에 대해서만 오로지 공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는 안되는 것이다. 개혁은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자칫 무척 논리적인 것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논쟁에서 졌으니 비논리적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PC주의에 대한 것이다. 단지 상대의 주장 가운데 존재하는 허점을 찾아서 공격하는 것만으로 PC주의는 잘못된 것이라 단정짓는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위선이고 악이며 그냥 원래 하던대로 사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고 정의로운 것이다. 그동안 수 천 년 넘게 그렇게 살아왔음에도 고작 흑인이나 히스패닉, 아시아인, 성소수자, 장애인들만 조금 고통받았을 뿐 대부분 아무일없이 문제없이 잘 살고 있었다. 오히려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정상적인 백인이나 이성애자, 비장애인들이 그들을 위해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고 있다. 효율로만 보면 옳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양보하는 것은 꽤나 이상한 일일 테니. 그래서 과연 그렇게 비판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PC주의가 진짜 옳다는 것인가.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반PC가 진짜 옳은가 자기 주장을 펼쳐 보라 하면 실제로는 그냥 그동안 그래왔으니 문제없을 것이라는 이상의 대답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진보와 개혁이 문제라 주장하기는 하는데 그래서 정작 그동안 해오던 방식에 문제는 없는가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그냥 진보와 개혁으로 인한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그들은 한 편으로 보수조차 아니기도 하다. 보수란 보수로써 추구하는 가치가 있고 지향이 있고 신념이나 이념이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자신이 보수로써 지키고자 하는 바가 있고 추구하는 바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보수로써 이루고 싶은 이상이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그 말은 곧 주장도 논리도 없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논쟁이 과연 정당하고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이준석을 정치인으로서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2030 남성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아니 2030 남성들 자신들조차 사실은 이준석을 정치인으로서 그다지 크게 지지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지금 이준석의 정당인 개혁신당에 대한 2030 남성들의 지지율이 어떠한가 보면 바로 답은 나오는 것이다. 대선후보로서도 이준석은 최저의 지지율과 함께 최고의 비호감도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뭔 말만 하면 이재명의 비호감도를 떠드는데 그나마 지금 대선후보급들 중에서 비호감도가 가장 낮은 인물이 또 이재명이다. 홍준표와 오세훈과 한동훈과 김문수와 이준석까지 다 포함해도 비호감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재명이 가장 낮고, 반대로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해서도 이준석의 비호감도가 가장 높다. 왜? 자기 주장은 없고 남의 주장을 비판만 하고 있으니까. 안전한 곳에서 이상론을 펼치며 비판만 할 뿐 정작 자기가 그래서 무엇을 하겠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 한 마디로 기생정치인이다. 다른 정치의 헛점과 약점에 기대서 그를 공격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자칭 2030 남성들과 같은 정치인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다. 당연히 논리도 필요하다. 그 이전에 어떤 시각에서 그러한 근거들을 찾았고 논리를 만들었는가 자신의 입장과 전제 또한 밝혀야 한다. 오래전 경제학과 교수 한 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왜 그런 내용들을 글로 쓰지 않느냐 물었더니 비슷한 대답을 들려주었었다. 학자로서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서는 그 전에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사항들이 많다. 나같은 그냥 평범한 개인들이야 그저 내가 생각하고 믿는 바대로 떠들어도 되지만 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쓰는 글은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이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어떤 과정들을 통해 어떻게 지금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명백하게 밝히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된 글이 아니다. 그런 정도의 철저함이나 엄밀함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왜 내가 그 주장들에 반대하고 논리와 근거들을 비판하는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무척 중요한 것이다.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없다.

 

내가 이른바 정치평론가라 부르는 부류들을 아주 극혐하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그래서 유시민이 불필요하게 여기저기서 욕을 먹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 정치평론가들은 자신의 정파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느 진영에 속해 있고, 자신들의 주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정치평론가들은 중도적이다. 자기가 중립이라 주장한다. 그러고서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행동을 비판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도덕적, 지적, 논리적 우위의 근거로 삼는다. 그래서 그런 사변적인 비판들이 얼마나 대한민국 정치에 있어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없이 그저 당장의 현상만을 두고 그 빈틈만을 노려 물어뜯는 그 행위 어디에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가치와 지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런 말들이 현실에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가. 반면 유시민은 처음부터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모든 시발과 과정과 결과를 낱낱이 드러내고 글쓰고 말한다. 그러니 편향적이라 말한다. 그래서 실체있는 편향과 실체없는 중립 가운데 무엇이 이 사회를 위해 공헌하는 것인가.

 

인터넷에서 가장 말많은 놈들이 그런 놈들일 것이다. 주장은 없고 비판만 있다. 논리는 없고 비난만 있다. 실제 인터넷 시대에 가장 잘 팔리는 것들이 그런 부류들일 것이다. 당장 유튜브에서 발에 채이는 국뽕채널들만 해도 뭐가 어째서 우리나라가 좋더라가 아니라 누가 얼마나 병신이라 우리민족이 최고더라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래서 한국인이 왜 좋냐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왜 최고인가? 이놈도 병신이고 저놈도 병신이고 그러니 우리만 낫다. 그런데 그런 게 통한다. 그래서 이준석이 저리 각광받는 것이겠지. 남만 욕하면 그것으로 최고다. 정의당이 괜히 망한 게 아니다. 보수를 욕하기만 하는 게 진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잊고 말았다.

 

비판이 논리가 아니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정의가 아니다. 논쟁은 그냥 말싸움이다. 말을 못하고 더구나 말이 느리기까지 하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건 피지컬이지 논리가 아니다. 정의는 더더욱 아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놈들이 너무 많다. 그 전에 가르치지 않는다. 토론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나도 하이텔시절부터 수 십 년째 키배를 떠 오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키배는 키배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댓글로 논쟁하지 않는 것이다. 다 쓸데없는 짓이다. 병신같다. 하긴 세상에 널리는 게 병신들일 테지만. 나도 병신일 테고.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