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들어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고 싶다. 그래서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읽어주려 한다. 최신 이론에 학설이니 아이들은 그만큼 역사에 대해 더 많이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사업을 하는데 아랍쪽 바이어와 계약을 맺을 일이 있다. 그런데 아랍 바이어가 한국말도 영어도 하지 못한다. 그러면 한국말도 영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랍 바이어를 탓해야 할까? 그보다는 바이어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도록 유능한 통역부터 구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언론에도 이념과 같은 자기정체성이 중요하다 말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읽히려는 것일까? 누구더러 보고 듣고 이해하라 기사를 쓰고 내보내는 것일까?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다면 당연히 그 언어는 노동자의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자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들과 같은 입으로 사실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원래 선동이라는 것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모두의 앞에서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어휘를 찾아내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직관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반드시 진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그것을 진실롤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그것을 진실로 믿고 자신이 의도한대로 움직일 것인가?


레닌 사후 후계자로 유력했던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패해 도망치듯 소련을 떠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스탈린은 당시 소련의 지배층과 대중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보다 직접적인 이야기를 쉽게 단순화시켜 들려주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소비에트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면 소련의 인민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만을 간결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트로츠키는 너무 똑똑했다. 지나치게 영리했고 많은 것을 알았다. '개구장이 스머프'에서 똘똘이가 매번 스머프들에게 배척받는 이유도 그가 틀린 말을 해서라기보다 장작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 다른 스머프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언어만을 고집했다.


원래 대중의 속성이란 그렇다는 것이다. 굳이 일부러 연설하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그의 언어까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자기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에 직관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자기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의 말을 이해하려 굳이 애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자신이 대상으로 여기는 대중의 언어에도 역시 능통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의도한대로 설득될 것인가. 그러니까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정신연령이 남들보다 낮아서 초등학교 학생들의 언어를 따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문이란, 언론이란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위해 쓰여지고 만들어지고 보여지는 것인가.


대중의 자신들의 언어를 굳이 이해하려고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다.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자신들의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선택한 언어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나는 옳다 여기는데 대중은 아예 관심도 없다. 나는 중요하다 여기는데 오히려 대중은 내가 틀렸다 말한다. 물론 나는 옳고 내가 판단한대로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대중에 알리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반지성주의라는 말 자체가 언론의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만을 위해 기사를 쓰는가. 고등학교는 그래도 마친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사를 쓰려 하는가. 겨우 한글이나 배우고 학창시절 내내 놀기만 하느라 기초적인 지식도 부족한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 이들이 읽을 것은 고려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부적절하고 잘못된 듯 보여도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어떻게 올바로 설득하고 이끌 것인가. 확실히 자신들이 주장하는 그대로 문빠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어떻게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이 블로그서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썼던 경구일 것이다.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미치지는 말라. 바보가 되어 남들 바보짓을 따르더라도 바보짓을 지적하여 미친놈으로 내몰리지 말라.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가 하는 행동들이 좋아 트럼프가 하자는대로 대북제재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지지가 있고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을 수 있어야 비로소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대북관계를 만들어갈 힘을 가질 수 있다. 대화를 하든 무엇을 하든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갈 빌미를 가질 수 있다. 약해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고 두려워서 눈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더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자세히 이해하고 올바르게 따라줄 것이기에 그렇게 자신을 낮추려는 것이다.


하긴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다. 남들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안다. 그런 자부심이 있다. 한낱 인터넷 논객들마저 자기가 어떤 대학을 나오고 어떤 책들을 읽었는가를 어떻게든 과시하고 싶어 티를 내며 글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을 들으라. 내가 하는 말들을 바로 알아들으라. 아니면 너는 멍청이다. 구제불능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기사를 통해 이루고픈 것이 무엇인가.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껏 이른바 한경오라 일컬어지는 진보언론들이 써온 기사들의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들 언론이 기사를 쓰고 읽히고픈 대상은 문재인 지지자들이 아니다. 설사 문재인 지지자들을 설득해서 잘못된 광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도 그 언어는 문재인 지지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언어여야 했다. 그런데 한경오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고 꾸짖는다. 그렇지 않아도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데 그것도 모른다고 오히려 핀잔주고 모욕까지 준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대로 한경오의 언어까지 억지로 배워가며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면 그들은 독자인가? 아니면 한경오의 하수인들인가?


조선일보가 괜히 신문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의 기사들은 쉽다. 간결하다. 그래서 더 속기도 쉽고 선동당하기도 쉽다. 그럴 주제도 능력도 되지 않는다. 신문이란 단지 자신의 지식자랑이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가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니 내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네가 잘못이다. 더구나 신문이란 자본주의 시장에서 재화이기도 하다. 신문을 사서 읽는 대중은 소비자이기도 하다. 욕쟁이 할머니다. 내 기사를 알아먹지 못할 거면 신문을 보지 말라. 차라리 그런 가오라도 있어야 할 텐데.


언론에 광고해서 얻는 수익보다 손해가 더 크다 여기면 광고도 중단하는 것이다. 어차피 언론이 자신이 알아먹을 수 있게 기사를 쓰지 않으면 굳이 사서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냉정한 자연의 법칙이다. 이익을 쫓고 손실을 피한다. 당연하게 진보언론인 한경오를 일부러 돈까지 지불해가며 봐주어야 할 의무는 대중들에게 없는 것이다. 읽어봐야 내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니 굳이 보지 않으려 한다. 내 돈과 내 시간을 들여 봐야만 하는 신문이고 언론의 기사인 것이다. 마치 광고를 싣지 않고 구독을 끊는 것이 큰 잘못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지금 한경오가 특히 야권유권자들의 외면속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인 것이다. 과거 한경우는 야권 지지자와 같은 것을 보며 그들의 언어로써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한경우는 조중동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조중동이야 말로 이제 JTBC까지 포함한 진보언론의 대안이 되고 있다. 과연 자신들의 기사를 읽는 대중들은 어떤 모습의 어떤 언어를 쓰는 자신들을 바라고 그런 자신들의 기사를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소비할 것인가. 허투루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한국 신문시장의 절대적 지분을 이들 세 언론사가 나눠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한경오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떤 식으로 기사를 쓰고 읽히고 이해시킬 것인가.


한심한 것이다.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사꾼이 오지 않는 손님을 탓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장사꾼도 생산자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언론이니 가능하다. 자부심이 있다. 내가 옳다. 내가 정의다. 그러므로 나의 기사를 모두가 읽어야 한다.


어째서 한때 한경오의 강력한 우군이며 후원자였던 독자들이 이토록 매몰차게 그들을 외면하며 오히려 날선 비판까지 쏟아내는가. 같은 언어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지라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한경오의 언어는 자신들의 언어가 아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들의 언어로 기사를 쓰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들더러 그들의 언어를 배우라 윽박지르고 있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전선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야권지지자 전체인가. 아니면 자신들과 언어를 공유하는 일부인가. 문재인 지지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대상으로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사를 쓸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니 욕을 먹는다. 먼저 저버린 것은 문재인 지지자가 아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한경오였다. 이제와서 그것을 반지성주의네 하며 매도하고 있다. 독자는 소비자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인간세상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이라고 예외는 없다. 어차피 조선일보는 진보적인 성향의 독자들이 잘 찾아읽지 않는다. 아니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 조선일보를 필요로 하는 독자는 조선일보의 논조에 맞고 또 그것을 필요로 하는 보수성향의 독자들이다. 그를 위해서 때로 소수의 편에서 다수와 싸우려는 언론도 있을 수 있다. 다수로부터 욕먹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신념과 정의, 추구, 지향을 위한 것이므로 기꺼이 치를만한 - 혹은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그것까지 회피해서는 안된다.


자신들은 굳이 문재인지지자들을 위해 기사를 쓰려 하지 않는다. 문재인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불쾌할만한 기사를 때로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과장해서, 혹은 조작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인용해서 쓴다. 보수정권의 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리버럴정권의 편도 아니다. 그 지지자들과 명확히 가는 길이 다르다. 그런데도 문재인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그들 언론을 소비해주어야 하는가. 삼성에 적대적인 기사를 쓰는데도 삼성은 그런 언론에 광고를 주어야 하는 것인가. 언론전제주의다. 언론이 정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당연히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다.


발악이다. 자기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다. 자기들은 옳게 비판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너희가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나쁜 놈들에게 신문이든 광고든 굳이 팔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바라보는 곳은 지금 비판하는 독자가 선 그곳이 아니다. 그마저 비판하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스스로 먼저 선택했고 그에 따라 주위에서도 자신을 위해 선택하는 것 뿐이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나를 위한 언론이 아니다. 내가 볼 만한 언론이 아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진짜 성찰은 없다. 남탓이고 괜한 원망과 떼쓰기만 있을 뿐. 우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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