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특정 대상에 대한 편견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이 비판에 대해 반박하며 하는 말이 있다.


"모든 대상에 대해 하는 말이 아니다."

"특정한 조건을 갖춘 이들에 대해서만 그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


어느 대상이든 그 변명이란 단지 어휘만 다를 뿐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이든, 흑인이든, 무슬림이든, 동성애자든, 그러니까 결국


"자기가 알아서 잘하면 그런 식의 편견을 가질 일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일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 너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특정한 기준을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두가 대상이 된다. 한 마디로 착한 누군가다. 착한 여성, 착한 흑인, 착한 무슬림, 착한 동성애자, 혹은 다른 착한 무엇. 그리고 자기가 정한 그 기준을 벗어나면 모두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어떤 비난도 모욕도 비하도 정당한 것이다.


최근 인터넷상에 뜨거운 남녀간의 서로에 대한 비하와 대립은 바로 그런 구조 아래 극단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무 편하다. 메갈이다. 한남이다. 메갈은 나쁘다. 한남도 나쁘다. 그러므로 메갈과 한남에 대한 어떤 비난도 비하도 모욕도 정당하다. 차별이 아니다. 정의이며 응징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메갈을 정의하는가? 무엇으로 한남을 정의하는가?


어느 영화에서 나왔던 대사일 것이다. 총을 쏴서 도망치면 베트콩이다. 도망치지 않으면 더 잘 훈련된 베트콩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붙잡아다 고문한다. 그래서 자백하면 빨갱이고, 그런데도 자백하지 않으면 더 지독한 빨갱이다. 조사해서 증거나 증언이 나오면 당연히 빨갱이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더 악랄한 빨갱이다. 그러니까 아무나 잡아다가 고문해도 빨갱이니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고한 민간인을 총으로 쏴 죽여도 어차피 베트콩일 테니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녀문제에서 메갈과 한남이 그 빨갱이와 베트콩을 대신한다.


뭐만 하면 메갈이다. 뭐만 했다 하면 워마드다. 왜인가는 상관없다. 어떻게든 연관성은 만들 수 있다. 아무렇게든 끼워맞추면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메갈이다. 그러므로 워마드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어떤 모욕도 폭력도 비하도 비난도 정당하다. 마찬가지로 여성들 역시 한남이라는 단어에 남성들을 끼워맞춘다. 여성에게 잘해도 문제고 여성에게 못해도 문제다. 페미니즘에 적대적이면 당연히 문제고, 페미니즘에 우호적이어도 문제다. 그러니까 너희 자체가 문제다. 메갈이고 워마드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 말하면서도 정작 그 대상이 여성 전반에 대한 것인 경우가 많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대부분 여성들의 이런 점이 메갈과 같고 워마드와 비슷하다. 그러니 너희는 빨갱이고 베트콩이다. 마치 메갈과 워마드를 통해 여성들의 극단적인 논리가 남성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구조와 같다 할 수 있다. 더이상 내부에서의 자정이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끝도 없이 부딪히는 것이다. 이번 이수역 폭행사건을 통해 내가 보는 문제의 본질이다. 메갈과 탈코르셋이라는 한 마디로 단순한 술자리 시비를 남녀간의 문제로 바꿔 버렸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만들어 서로 편가르고 싸우게 만들고 있었다. 비단 당사자들의 행동만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 너무 쉽게 부화뇌동하는 여론이 더 큰 문제다. 원래 여성은 그런 것이다. 원래 남성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그럴 것이다. 남성은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왜냐면 메갈이니까. 워마드니까. 한남이니까. 거기에는 다른 어떤 여지도 허락되지 않는다.


대상을 특정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대상을 전제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출발하는 것이다. 규준이 만들어지면 그를 벗어난 일탈도 정의되게 된다. 그런데 그 모든 규준이 자기 안에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편견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에서 드러나면 차별이다. 바로 혐오라는 것이다. 내가 정의한 이상에서 벗어나 있으니 그에 대한 모든 비난도 공격도 정당하다. 그에 대한 어떤 폭력도 모욕도 정당한 응징이 된다. 그런 식으로 과거 수많은 소수자들이 다수의 정의로운 응징에 희생되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착한 여성. 착한 남성. 착한 흑인. 착한 무슬림. 착한 동성애자. 그러니까 내 기준을 충족시키는 이들. 내 마음에 맞는 누군가들. 세계는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 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타인이란 자기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타인이다. 그래서 대상이다.


그냥 원래 인간이란 불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뭣같고 뭣같은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인간이고 내키지 않아도 인간이다. 그런 시시껍절한 것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다양성이라는 것이다. 하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정답과 오답만 있는 객관식의 세계다. 세상에는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만 있다. 인간마저도. 바로 그것이 파시즘의 시작일 테지만. 세상에 정답은 있고 인간에게도 정답은 있다. 정답이 아닌 모든 인간들은 오답이며 오답은 배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대인과 슬라브인, 집시에 대한 학살은 악이 아닌 정의다.


정의가 너무 넘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 정의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정의인지도 문제다. 과연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세계의 정의인가. 아니면 단지 자기가 생각한 정의일 뿐인가. 히틀러도 정의로웠다. 아마 이 말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정의롭다. 악마저도 때로 정의롭다. 새삼 깨닫게 되는 우려다. 너무 과열되어 있다. 아마 인터넷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 모르겠지만.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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