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동안 남성들이 일과 병역을 독점해 온 것은 그것이 명예롭기 때문도 있었다. 남성에게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훈장과도 같았다. 일자리를 잃고 오히려 아내가 일해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 그래서 많은 남성들은 절망과 자괴감을 느껴야 했었다. 괜히 집안에서 술이나 쳐먹고 폭력이나 휘두르는 말종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자신을 포기한 인간이다.


당연하게 그렇게 듣고 배우며 자란다. 남자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남자가 여자를 지키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찍부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가장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된다. 그것이 남자의 보람이고 존재이유라고. 그런데 어느날 그런 것이 아니라며 딴죽을 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단지 너희들은 특권을 누리는 것 뿐이며 그 특권을 자기들이 나누어 갖겠다. 한 마디로 자기들이 명예라 생각했던 것이 명예가 아니었고, 보람으로 여겼던 것들도 보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한 마디 감사조차 없이 그것을 나누겠다 말하고 있다. 어떤 감정이겠는가?


시작은 벌써 20년 가까이 된 군가산점 논란이었을 것이다. 타당한 부분도 있다. 공무원시험에서 군가산점의 비중이 너무 높아 군복무하지 않은 여성이나 장애인들에 일방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니 그 부당함을 시정해달라. 그것으로 그쳤으면 모른다. 아직도 내가 여성주의자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다. 당시 나도 그 논쟁에 참여한 바 있었으니. 군가산점을 없앤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군복무 그 자체를 무시하고 비하했다. 그 개고생하면서 그래도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의무라고 군복무 마치고 돌아왔더니 하등 가치없는 짓거리에 시간낭비나 하고 온 것이 되었다. 화나지 않을 리 없다. 내가 그렇게 당신들에게 무시당할 짓을 하고 온 것인가.


그동안 가장들이 일을 독점해 온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이 가족을 부양해야 했었다. 여성이 가장인 경우는 드물었고 정상으로 여기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살기 위해 남성에 의지해야 했고, 남성은 그들을 책임지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공감대 속에 남성들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합의에는 여성들 역시 동참하고 있었다. 어머니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남자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야 한다. 물론 옳다. 그럼에도 여성들도 똑같이 남성과 같은 기회를 누리며 남성과 같이 가족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그동안 남성들이 사회적인 합의 아래 가족을 위해 일해 온 것까지 부정당해야 하는가.


지금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것 없다. 자기들이 모욕당했다 여기는 것이다. 대부분 아는 것처럼 차라리 맞은 것은 잊어도 모욕당한 것은 잊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란 존재다. 여성주의자들이 그동안 남성들이 누려온 많은 권리들을 여성들도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이야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과정에서 그동안 남성들이 짊어져 온 사회적, 혹은 가정에 대한 책임 역시 나누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한다. 아예 남성들이 그동안 해 온 역할들을 철저히 남성들의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부정하며 전혀 나누려 하지 않는다. 가치없는 일이 된다. 여성들은 필요없다 내버린 찌꺼기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그 책임은 여전히 무겁고 크다. 그러니까 왜 남자만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결국 어머니들의 책임이다. 그동안 남편들이 밖에 나가 일하며, 더구나 세계적으로도 노동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한국의 현실에서 집에 있을 시간이 적은 만큼 어머니들이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자식들에게 잘 가르쳤어야 했다. 아버지가 집에 없다는 사실만 알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어떤 직급에 있었다는 사실만 알지 그를 위해 그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며 짊어져야 하는 책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무지가 남성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진다. 그저 말없고 집안일도 돕지 않는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만 떠올린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없는데 어떻게 남성에 대한 존경이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여성이 남성을 존경하지 않는데 남성이 어찌 여성을 존중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여전히 여성주의에 우호적이기는 하지만 여성주의자들의 말이나 행동에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가 적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기에 더 기분나쁘고 반감마저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들이 놓인 현실을 이해하기에 그들의 편에 서게 된다는 것이 이율배반적일 것이다. 여성주의자와 여성은 전혀 별개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그들의 행동이 남성들을 자극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남성들이 누린 만큼 그들에게 지워졌던 책임에 대해, 그 크기와 무게에 대해 공감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를 나누는 만큼 책임도 의무도 나누겠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존경이고 인정이다. 남성도 역시 여성을 인정하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가치없는 삶을 살아왔는가. 역시 누군가와 같이 사는 건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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