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인류역사에서 인간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생산의 증대였다. 당장 생존을 위해 가장 필수적인 식량의 확보를 위해 인간은 지금껏 문명을 발전시켜 온 것이기도 했었다. 생산기술의 혁명적인 발달로 인해 더이상 생산을 걱정하지 않게 된 것은 아주 최근에서야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대에 대부분의 인간은 조금이라도 생산을 늘려보고자 노동을 강요당해야 했었다.

도자기를 빚고 환자를 치료하는 이들이 더이상 생산에 종사하지 않아도 된 것은 나머지 노동력만으로도 충분히 그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 정도의 생산이 가능해진 뒤부터였다. 달리는 굳이 그들까지 나와서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었다. 한정된 토지에서는 정해진 수의 인간만이 생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결국 생산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생산을 나누어받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직업의 분화이고 인류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나타난 배경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그같은 과정의 반복이었다. 생산이 늘어난 만큼 인구는 늘고, 생산기술이 발전한 만큼 필요한 노동력은 줄어들었다. 이들 나머지 노동력들이 모여서 생산 이외의 특별한 노동을 제공하던 곳이 바로 도시였다. 아직 생산의 비중이 높은 작은 촌락에서는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던 수많은 일들을, 심지어 그 가운데는 아직 아무도 그 필요에 대해 생각지 못하고 있던 새로운 일들까지 누군가가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구가 늘고 생산기술이 발전할수록 잉여노동력 역시 비례해서 증가했고 역시 비례해서 직업 역시 분화되어 왔다. 그리고 그런 직업 가운데 대부분은 말한 것처럼 원래는 각자가 알아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던 일들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바로 편리와 만족을 위한 새로운 노동이었다. 행복노동이라 할 수 있을까?

당장 지금 식량생산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을 계산해보라. 바로 그들의 노동력에 기대어 그 몇 배의 인구가 풍족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생산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대신 원래는 각자 알아서 실을 잣고 천을 짜서 지어입던 옷을 생산하는 노동자가 생겼다. 더 따뜻하고 더 튼튼하고 그러면서 더 보기에도 좋은 옷을 생산하는데 때로 그보다 더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기도 한다. 농사에 쓰일 농기구며 일상에 쓰이는 그릇들도 그들이 만든다. 어찌되었거니 모두는 그렇게 생산에 종사하고 있었다. 노동이 미덕이 되던 시대다. 열심히 일해야지만 개인은 물론 공동체 모두가 풍요롭게 잘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산마저 더이상 전만큼의 노동력을 필요치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다. 인류의 역사가 걸어온 그대로 새로운 다른 구성원들의 삶을 더 편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만들어 줄 일을 찾아야 한다. 결국에 1차 2차 3차 산업의 구분도 그렇게 따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생산기술은 이미 더이상 전처럼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고도로 질전되었다. 오히려 너무 넘치는 생산으로 인해 많은 사회가 곤란을 겪을 지경이다. 그러면 필요없는 노동력과 남아도는 생산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러니라 고도로 생산기술이 발달한 지금 생산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해 나머지가 베풀 수 있는 서비스란 무엇이 있겠는가. 어쩌면 이전까지는 그렇게 중요하게 절박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남아도는 여유 만큼 신경쓰게 된 부분일 것이다. 말하자면 복지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낭비며 사치다. 예전에야 엄마들이 일하면서도 아이들을 업고 돌보며 젖까지 먹였지만 엄마와 아이들 모두를 위해 전문적으로 돌보는 사람을 따로 두게 된다.  신업혁명 이후 인류사회가 복지사회를 지향해 온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생산은 충분하다. 오히려 넘쳐난다. 더이강 전만큼 많는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머지 노동력을 구성원의 평균적인 삶의 수준을 높이는데 투입한다. 그를 통해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도 노동을 하며 구성원들은 그로 인해 늘어난 일승의 편리와 만족을 누린다. 그리고 서비스 가운데는 구성원의 평균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강제도 포함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모두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하다. 하긴 원래 정부의 규모와 역할 커지는 것 역시 인류 역사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경향 가운데 하나였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분의 일자리 증가를 통한 실업문제 해결노력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다. 복지는 그냥 지출이 아니다. 과거에는 낭비이고 사치였지만 이제는 충분히 감당할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새롭게 수요를 만들고 가치를 생산해낸다.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전혀 새로운 가치다. 아이만 낳으면 나머지는 정부에서 알아서 다 책임진다. 모든 것이 돈이고 노동이고 사람이다. 새로운 일자리와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전환기인 것이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생산을 위해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 왔다. 하지만 충분한 생산을 할 수 있게 되며 나머지 노동력과 생산이 사회의 문제가 되었다. 전처럼 생산만 늘려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가 그 해답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은 항상 새로운 직업과 그에 따른 필요와 수요를 함깨 발전시켜 왔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낭비가 아니나. 사치가 아니다. 이제는 필요한 당위다. 누구나 누려야 할 일상이다. 이미 벌써 앞서 그 길을 지나간 사회들이 있다. 그래서 선진국이다. 그들이 앞서 지나간 그 길을 우리도 비로소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만 갇힌 사람들에게는 낯설기 그지없겠지만. 이 또한 역사의 진보인 것이다. 벌써 우리도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열심히앞만 보며 달려 온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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