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언론이란 계몽을 위한 수단이었었다. 그래서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혁명에서도 훨씬 전부터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대중에 알려진 편집자나 주필들이 중요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 레닌의 후계자이면서 스탈린의 대적자로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는 레온 트로츠키가 그렇게 신문과 잡지에서 논설을 통해 자신을 알린 논객 출신이었다. 이를테면 사회주의의 유시민이랄까? 말은 옳게 하는데 행동이 싸가지 없어서 결국 쫓겨나고 죽임을 당했다.


우리사회에서도 불과 얼마전까지 기자라고 하면 사회의 지성이자 양심으로서 높이 대우해주는 문화가 실제 있어 었었다. 하긴 그만한 학력과 지식이 있어야 기자도 되고 기사도 쓸 수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었다. 아무나 기자가 될 수 없었고, 기자가 되었다고 실력도 의지도 없이 언제까지나 버티고 있을 수도 없었다. 오로지 대중들에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사명감 하나로 고단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회의 각분에야서 서슬퍼렇던 권력과도 맞서야 했던 것이 기자들이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대중들은 기자라면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이라며 그들이 쓴 기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것이 독이었을지 모르겠다. 자칫 한 걸음만 잘못 내딛으면 권위는 곧 권력이 되어 버린다.


모두가 떠받들어주는 시대의 지성이자 양심으로서 기자라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기자로서 자신이 쓴 기사를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기사를 쓰고 내보내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또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취재의 대상이 된 그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기자인 자신을 어려워하는 모습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심지어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언론이 어떻게 하나의 권력을 난도질하여 대중과 유리시키고 끝내 침몰케 할 수 있었는가 학습하게 되었다. 한겨레와 경향 등 이른바 진보언론들이 특히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부쩍 그 논조보다 태도가 달라지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기들이 권력이다. 자기들이 진짜다. 정치권력은 가짜다. 자기들이 마음만 먹으면 권력따위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 그 필두에 언론권력이라 불리우는 거대언론 조선일보가 있었다.


말 그대로다. 바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왜 기자들은 공부를 않는가? 뻔히 아는 사실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는 것인가? 오보까지도 습관처럼 서로 베껴쓰기에 급급하다. 그래도 된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런다고 자기들에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자기들이 뭐라 하면 그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한다. 거슬러올라가면 역시 김대중이 언론개혁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이후부터일 것이다. 언론권력이 정치권력을 이겼다. 언론권력이 정치권력을 눌렀다. 그런데 굳이 그런 자신들이 사람들에 더 잘보이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들이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닌 세상이 자신들에 맞추는 것이다. 그것을 언론의 사명이자 자존이라며 스스로 여기고 있는지 모른다.


그동안 이른바 한경오사태라 불리우는 진보언론과 대중과의 충돌은 그런 사정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대중이라기보다는 한 개인들이다. 각각의 개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문제가 있다 여기는 점들을 신중하게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하면 오히려 비웃으며 화를 낸다. 자기들은 대단한 언론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자기들은 원래 이런 언론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한다. 심지어 독자인 대중을 모욕하고 조롱하기도 한다. 그런다고 대단한 정치권력도 자기들을 어쩌지 못했는데 고작 개인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당장 구독자도 줄어서 경영에 압박이 가해지는 상황에서도 언론이라는 자존심을 지키려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언론인데 대중에 굴복할 수야 있겠는가. 대통령도 여당의 유력정치인도 언론인 자신들 앞에서는 낮은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미국에서 한국언론들이 저지른 추태가 현지언론인들의 SNS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더불어 정상회담 이후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던진 한심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질문들까지 대중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현지의 언론과 전혀 다른 내용의, 오히려 사실과 전혀 동떨어지면서 나라의 이익을 해칠 수 있는 기사들까지 당당하게 대중앞에 내보여지고 있었다. 아, 이런 것이 한국 언론의 수준인가? 하지만 언론인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언론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정치권력만의 경우인가? 언론조차 감시하지 않은 언론권력은 예외인 것인가? 교양도 품격도 예의도 없이 당장 손에 쥐어진 특권에 도취된 천박한 졸부의 알몸이 바로 언론의 자화상인 것이다.


아마 몇 년 되었을지 모르겠다. 어느 아이돌 관련 인터뷰 기사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글의 말미에 그리 썼던 적이 있었다. 기자가 지성이던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은 아니다. 아무나 기자가 될 수 있다. 대학부터 아무나 갈 수 있다. 너무 많은 대학이 있고 그동안의 경제성장은 더 많은 학생들에게 대학에 진학할 기회를 주고 있었다. 언론사도 많아지고, 큰 언론사는 정부의 보조금까지 주어지며 기자로 취직하기도, 취직해서 기자로서 살아가기도 전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월급은 나온다. 월급도 나오고 기자라고 대우도 해준다. 배부른 돼지가 여전히 돼지인 이유는 당장 자기 먹을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도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엄정함으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던 선배기자들을 떠올린다.


기레기라는 말도 사실 아깝다. 많은 쓰레기가 재활용된다. 어쩌면 당장은 악취나는 쓰레기일지라도 먼훗날에 새로운 세대를 위한 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장점은 있다. 일개 블로거라도 저놈들보다는 나을 수 있다. 물론 아직도 진짜 기자들이 쓰는 기사에는 아예 어림도 없다. 기사란 그런 것이다. 포털의 댓글보다도 한없이 가벼운 키보드 위 기자의 손가락을 본다. 똥이 썩으면 그것도 거름이 될 수 있다. 같잖은 것들이다. 한밤중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