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전통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차피 나면서부터 누군가의 딸이고, 아내이고, 어머니여야만 했을 터였다. 그러니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불리면 그만이지 따로 이름따위 가질 필요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영애이고, 영부인이고, 혹은 자당으로 불려야 했다. 그것은 독립적인 인격에 대한 것이 아닌 소유한 남성에 종속된 지칭에 지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리 말하잖는가.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아무거나 담을 수 있기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용도도 가치도 달라진다.


사실 여사(女史)라는 단어를 여성에 대한 존칭의 의미로 쓰기 시작한 것은 역시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원래 여사란 전근대 중국왕조의 궁정에서 일하던 여관을 뜻하던 관직이름이었다. 특히 황제의 후궁을 관리하는 직책이라 그 위세가 상당했었는데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호칭이라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어느 정도 지위가 있거나 한 남성을 두고 아무 상관도 없는데 '선생님'이니 '사장님'이니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비슷하게 쓰이는 '사모님'과의 차이라면 굳이 결혼여부와 상관없이 여성 개인에게 존칭으로써 붙여 쓸 수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굳이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어머니가 아니어도 일정한 나이가 되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를 갖추면 여사라 불릴 수 있었다. 그래서 최근 중국에서는 여사의 사史자를 선비 사士로 바꾸어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최소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여사라는 것은 역사적 맥락도 그렇거니와 누군가에 종속되지 않은 여성을 가리키는 유일한 존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부인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아내인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잘못 번역되고 있는 단어가 그래서 백작부인이니 공작부인이니 하는 말들이다. 정확히 여백작이고 여공작이다. 물론 남편이 백작이고 공작이어서 백작부인이나 공작부인으로 불려야 할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남편 없이 여성이 작위를 계승했을 경우 그들은 분명 여백작이고 여공작이라 불려야 옳을 것이다. 누군가의 아내여서가 아닌 자신이 백작이고 공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각각 자신의 작위를 여성형으로 바꾸어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연 누구의 부인 아무개씨라 하는 것이 과연 독립된 인격에 대한 제대로 된 호칭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 부인쯤 되면 대통령과 독자적으로 공식적인 의전을 받고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그들은 단순히 남성인 대통령에 부속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대통령부인을 과거에도 따로 영부인이라 불렀던 것은 그런 사회적 맥락이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그래서 대통령 부인을 퍼스트레이디라 따로 칭하고 있다. 국가원수이며 행정부의 수반이며 군통수권자이기도 한 대표인물이기에 그 아내 역시 그에 준하는 의전과 더불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정확히 사적인 생활이라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 관저를 나서는 순간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그 사회에서 공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디서 동창들과 모여서 밥을 먹고, 오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동네 사람들과 어딘가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가고, 개인이라면 단순히 자신의 사생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도 그저 대통령의 부인이라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단지 이름 뒤에 '씨'만 붙이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아내는 과연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는 것인가.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한다. 남성의 사회적 성공에는 집안에서 살림만 하는 아내의 내조 또한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 아내가 집안에서 그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키우는 것만으로도 남성이 사회적 성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있는 것이다. 만일 아내가 남편과 다른 판단을 하고 전혀 다른 요구를 하게 된다면 남편들 역시 지금까지와 같은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기가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남편과 아내는 동지적 관계에 있다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누군가에게 임명장을 수여할 때 그 가족을 함께 불러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남편 혹은 아내 혼자서 잘해서 지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자의 동의와 지원이 있었기에 마음껏 자신의 의지와 실력을 발휘해서 지금의 위치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과연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 가운데 아내인 김정숙 여사의 지분이 전혀 없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나 박근혜씨에 대한 지지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의 지분이 상당했던 것을 모두가 인정한다.


아니 그 이전의 것이다. 말 그대로 퍼스트레이디다.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의 아내로서 공적인 의전과 업무를 수행하는 공적인 지위에 있는 인물이다. 그를 보통사람들과 같이 호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부른다고 퍼스트레이디를 그대로 가져다 부를까? 그래서 영부인이라 불렀는데 사실 이 말도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를 때 쓰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군사독재의 권위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무엇보다 여성을 남성에 종속시킨다. 그에 비하면 여사는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그나마 독립적인 인격으로서 여성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적합하지 않은가. 일상에서도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여성들에게 그 남편의 유무나 신분에 상관없이 여사라는 호칭을 붙여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사다. 정히 여사(女史)라는 단어 자체가 불편하다 여겨지면 중국에서처럼 여사(女士)라 바꿔쓰면 되는 것이다. 고대 궁정의 궁인들은 전문직들이었다. 아마 여성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아예 없다시피 하던 시절에 유일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출세할 수 있었던 지위였을 터다. 그렇게 그 호칭이 문제인 것인가.


그러고보니 얼마전 강준만씨가 '싸가지없는 진보'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었다. 어째서 진보의 주장 가운데는 상당히 옳은 것들이 많이 있음에도 정작 그것이 목적하는 기층대중들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가. 내가 자칭진보들과 어울려 본 결과는 자명하다. 정작 자신들의 주장을 들려주어야 할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 그들을 위하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오로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 한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들도 인정하는 것처럼 계급이 다르면 사고도, 언어도, 행동도 모두 달라진다. 각자 자기의 계급에 어울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이 위하고자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과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지식인의 결벽함이다. 선지자인 것이다. 내가 저들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스스로 자신을 따라야 한다. 수많은 선지자 가운데 어째서 예수만이 지금 세계종교의 지도자로서 아직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전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자신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차라리 한겨레일보의 항복선언이 고깝게 들리는 이유인 것이다. 너희가 이겼다. 그러나 너희는 틀렸다. 시사인의 한 기자의 말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우리는 옳았지만 너희들의 부당한 폭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 뿐이다. 그러면 하지 마라. 진정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면 언론인의 양심으로 차라리 끝까지 대중과 맞서 싸우라. 그것이 오히려 대중의 눈높이에도 맞는다. 그래도 지식인인데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는데도 그저 눈앞의 이익 때문에 포기한다면 그것은 지신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옛날 선비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문의 안위마저도 내던지고는 했었다. 그런 것을 곡학아세라 부른다. 진정 신념으로써 대중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자 결심해서가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대중을 조롱하며 자신을 꺾는 것은 기만이며 대중과 자신에 대한 모멸이다.


어째서 그동안 한겨레일보와 경향일보가(의도적인 오칭이므로 지적은 사양한다) 정작 자신들의 주독자층이어야 했을 자유주의적인 시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어려움을 겪어야 했었는가. 대중이 어리석어서? 대중이 잘못된 광기에 사로잡혀서? 그렇다면 끝까지 자신들의 양심과 지조를 지켰어야 했다. 시민들과 타협하는 것도 결국은 영합이다. 아직도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의 언어로 누구의 방식으로 사실을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다. 저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한. 차라리 그동안의 어리석은 고집이 그래도 있어보이기는 했었다. 웃음도 안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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