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모르겠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물렵 국사교과서에서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이점으로 중국과의 교통을 꼽았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해상으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혹은 한강 하구의 소금생산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이야 말로 전국 최고의 곡창이었다는 사실을.


아닐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이 바로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라는 한반도의 동서를 크게 가로지르는 두 개의 강이 만나 하나가 된 강이었다. 당장 지금도 완만한 산자락 가운데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 일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큰 도시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강남은 아예 산도 거의 없이 허허벌판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겠는가.


호남평야의 개간이 완료된 것이 조선 전기부터다. 조선전기까지도 무성한 숲과 늪지를 개간하고 위협이 되는 맹수를 사냥하는 일에 군사가 동원되고 있었다. 북한에서도 곡창인 황해평야의 개간 역시 조선 중기에 완료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한반도의 곡창은 어디였을까? 괜히 조선에서 경기도를 관료들에게 지급할 과전의 대상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다. 호남평야의 개간이 끝나기 전까지 한강유역이야 말로 가장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도 그래서 한강유역을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었고. 전근대사회에서 인구는 곧 국력이고, 그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것은 풍부한 식량생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 말도 안되는 소리다. 서울에서 농사를? 그런데 그게 불과 몇 십 년 전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한강 근처에 제법 늪지도 있었고 농사짓는 곳도 있었다. 곳곳에 비닐하우스며 논도 제법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도시가 되어 있는 백마, 일산, 광명, 안양 등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은 그 무렵 가보지 못해 모르겠다. 하여튼 부곡역만 해도 흔한 가게 하나 없이 덩그러니 역만 있던 곳이었으니. 


말하자면 지금 한반도의 식량생산은 호남평야에 비견할만한 중요한 곡창지대인 경기도를 싹 갈아엎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거다. 특히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너무 개발이 되어 농경지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생산된 식량을로 북쪽까지 먹여살리고 했었던 것인데. 조선시대에도 황해도 북쪽은 농사가 힘들어 항상 식량난을 겪곤 하던 지역이었다. 그나마 황해도와 평양 주변에서 제법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뿐.


그냥 서울의 옛날 사진을 보다가 떠올라 끄적여 봤다. 백제며 고려며 조선이 괜히 경기도에 도읍을 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고려말 남쪽지방이 온통 왜구의 약탈로 조세조차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도 개경의 조정이 버틸 수 있었던 근거였다. 최소한 바로 가까운 경기도 일대는 그래도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테니. 농사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산업혁명의 못된 유산 가운데 하나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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