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수준이 일정 이상 보편화되고 평준화되면 더이상 기술력만으로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00년 전통의 A가 생산한 제품이나 어제 창업한 B가 생산한 제품이나 거의 차이가 없어진다. 선진국은 C에서 만들어진 제품과 후진국인 D에서 만들어진 제품과의 사이에도 어느 정도 품질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렇게 가격을 무시할만큼 결정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시장의 원리에 따라서 결국 더 싼 제품이 팔리는데 그렇다고 A와 B와 C와 D가 같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면 설비나 원료에서도 거의 비슷할 테니 투자비용 자체는 크게 차이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기존의 생산비용에서 줄일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아껴야지만 경쟁력도 유지하면서 이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사양산업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환경에서는 더이상 이익을 기대할 수 없는 산업이다.


노동가치설이 경제학에서 비판받는 이유는 그것이 경제학의 이론이 아닌 사회학적인 이해에 근거한다는 점일 것이다. 생산비용에서 산정할 수 있는 노동가치란 무엇인가. 도대체 생산한 가치에서 어디까지를 노동에 의한 가치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노동의 가치를 인간의 가치로 바꾸면 상당히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노동자 자신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비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임금이 필요한가.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어느 정도의 최소임금을 지급해야 하는가. 당연히 사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충분한 수입이지만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너무나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충분히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같은 임금을 받더라도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까 공장들이 과거 인건비가 싼 저개발국가로 이리저리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베트남에서라면 한국보다 더 적은 임금에도 노동자들이 만족하며 자신이 맡은 일에 성의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 사회의 임금수준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노동의 주체로써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노동력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가치를 유지한다. 결적적으로 마르크스가 오류를 범한 부분이라 생각하는 이유다. 충분한 급여가 - 자신의 노동보다 인간인 자신에 대해 주어지는 급여가 만족할만한 수준일 때 결과적으로 노동생산성은 상승하게 된다. 더 우수한 인력이 모여들고 보다 적극적으로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현장에서의 창의성과 효율이 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충분히 휴식하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일상의 안락과 풍요를 누리고, 무엇보다 그런 자신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인정해 주었을 때 노동자 자신도 자신의 일에 대해 더 만족하고 더 충실해질 수 있는 것이다. 포디즘은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윤율하락 이론에 대한 강력한 카운터펀치라 할 수 있었다. 이윤율을 포기하고 더 많은 임금을 지급했더니 오히려 생산성도 늘고 이익도 늘어나더라. 물론 그같은 구성원 개인의 의지만으로 더이상의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어려워진 산업에 대해서는 예외다. 예외라 하기에는 오히려 현실에 더 많다. 너무나 많은 주체들이 차별없이 경쟁할 수 있는 오래된 시장들이다.


더불어 마르크스가 간과한 것 가운데 하나가 어디까지를 노동으로 봐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90년대 이미 대학에서 자본론에 대해 선배들에게 배우며 가졌던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경영은 노동이 아닌가? 디자인은 노동이 아닌가? 지식노동도 노동이다. 오히려 생산에 있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생산하고 어떤 방법으로 팔 것인가를 결정하는 경영상의 판단일 것이다. 경영자의 판단에 의해 같은 노동자가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생산성이 선진국보다 떨어지는 이유인 것이다. 일찍부터 고도로 집약된 기술과 지식으로 보다 높은 부가가치를 갖는 상품을 만들고 팔아온 선진국에 비해 아직 많은 부분에서 뒤쳐져 있기에 더 낮은 이익만을 기대하고 더 싼 값에 상품을 생산해서 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같은 시간을 일해도 전체 생산한 양이나 가치, 이윤율은 비교할 수 없이 낮아지게 된다. 그런데 다시 질문, 그러면 그같은 중요한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영자들은 노동자인가 아닌가. 그들도 일을 하고 있다.


정확히 모든 경제활동은 인간이 하는 노동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을 투자하는 것 역시 그냥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없이 투자를 결정하다가는 처음 몇 번은 운이 좋을 수 있어도 한 번만 그 운이 어긋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자본을 투자하기 위해서도 그를 위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춘 지식노동자들이 적잖이 고용되어 사용자를 위해 일하게 된다. 더 정확하게 투자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만큼 그 자신이 가지는 가치는 높아지게 된다. 한 번의 투자결정으로 수천억 그 이상을 벌었는데 정작 사용자는 보너스로 100만원만 쥐어주고 만다. 얼마나 선명한가. 연구실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결과 수백억 이상의 이익을 얻게 되었는데 그에 대한 대가로 고작 월급을 100만원 올려준 것으로 끝내려 하고 있다. 개인이 사용자를 위해 확보한 이익이 수백, 수천억인데 그 대가가 고작 100만원이라면 과연 정당한 보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다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어쩔 수 없이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설을 주장하며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인간의 가치는 평등하지 않다. 인간의 노동력 역시 평등하지 않다. 따라서 생산에 있어 인간의 노동이 참여하는 비중 역시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힘들다. 당장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노동자 사이에도 같은 인간임에도 기대하고 만족할 수 있는 임금의 수준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겠지만 그 가치를 계량하는 수단으로서의 자본소득은 각 개인이 놓은 환경과 사회적 조건에 따라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애시당초 노동가치를 숫자로써 계량하려 한 것이 문제였다. 사회정치적으로 그렇다면 과연 어느 정도가 사회의 단합과 동질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개인의 기대도 만족할 수 있는 적정한 수준의 수입일 것인가. 그러니까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만족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임금수준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럼에도 그만한 임금에도 불구하고 해당 산업은 충분한 경쟁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선진국경제에서도 그래서 끊임없이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더 높은 수준의 임금 만큼이나 더 높은 부가가치를 기대할 수 있는 산업에 더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오히려 그 정도 수준의 임금으로는 이익은 커녕 손해만 보게 된다면 과감하게 구조조정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아니면 인건비의 비중을 줄이기 위한 설비투자에 나서기도 한다. 한 마디로 사회경제는 발전하고 소득도 높아졌는데 더이상 임금을 올려서는 망할 것 같다 한다면 그 산업은 망해야 하는 산업인 것이다. 당장 망해야 하는 산업을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로 인건비를 비틀어 막아 계속 유지하는 비용이 오히려 더 큰 더 높은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산업에 대한 투자를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 산업을 구조조정해야 하는 순간에 정작 변화를 막기 위해 노동자의 희생만을 강요한다. 그것이 바로 착취다. 노동자는 더이상 일을 하면서도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마르크스가 겪었던 노동자의 현실이라는 것도 19세기 더이상 양보할 수 없을 정도로 막다른 지경에 놓여 있던 당시의 상황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냥 법이 정한 정당한 노동조건을 지키라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만 일을 시키고, 충분한 대가를 지급하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최소한의 규정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허용될 수 있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선이다. 그런데 그것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그러면 망한다고 아우성치며 법마저 우습게 여기고 있다. 당장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일상조차 영위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럴 수 있는 임금조차 지급하지 못하는 산업들이 여전히 그런 노동자를 인질로삼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 노동자의 희생 위에 유지되고 있는 산업이다. 이윤율은 이미 바닥이고 그나마도 견디지 못해 망해나가는 곳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적지 않다. 아무리 한국사회에서 인건비를 아껴도 다른 개발도상국만큼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산업을 여전히 살리고 살리기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강제해야 하는 것인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원망스러운 이유다. 어느때보다 중요한 9년이었다. 중국이 급성장하는 시기 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나서야 했었다. 기업들이 바뀐 환경에서도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새로운 산업과 기술을 찾아나서는데 투자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그동안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눈부시게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고 중국마저 한국을 저만치 기술로 앞서가고 있는 지금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들 자신의 내일을 그리고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전 지구단위에서는 물론이고 단위사회에서도 이윤율의 하락이 법칙이라면 그것을 대비한 대안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것을 게을리했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다른 것이 원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눈가리고 아웅하듯 부동산에 개인의 돈을 빚까지 져가며 쏟아붓게 만들어 숫자만의 성장을 보여주려 했던 나태의 결과인 것이다.


착취란 다른 것이 아니다. 개인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대가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중간에서 착복하거나 갈취하는 것이다. 경영자에게도 착취는 있다. 디자이너나 연구원에게도 착취는 있다. 그리고 대부분 착취는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일본에서 소송이 있었다. 신기술로 막대한 이익을 거둔 회사에 대해 자신이 기여한 만큼을 인정해달라 했을 때 법원은 기업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연구자는 돈을 받고 회사를 떠나 미국에서 자신의 연구를 계속 하고 있다. 대가가 주어지는 곳에서는 최대한 자신의 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그만큼 나태해지고 이탈할 기회만을 노리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기업의 이윤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경제주체들이 더이상 일을 해도 충분한 만족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없고 그같은 기대가 없다면 그래도 개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데 기여할 것인가.


소득주도성장론을 지지하게 되는 이유다.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심지어 아예 대놓고 법을 무시하는 기업들에 대해서 마르크스가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러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산업에서는 마르크스의 예언이 정확히 적중하고 있기도 하다. 더이상 인건비밖에 기댈 곳이 없는 사양산업에서 인건비는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다. 그마저도 더이상 줄일 수 없는 한계에 이르면 그 기업과 산업은 망하게 된다. 한국의 다수 기업들은 그런 상황에 머물러 있다. 더이상 아무런 활력도 없이 그저 고인 채 인건비만 바라보며 썩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고보면 창의적인 기업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언제적 이야기였는지. 그러니까 대한민국 사회와 경제가 이대로도 좋은 것인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벌써 한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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