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요즘도 이런 말 하는 선생님이 계시는가 모르겠다.


"너희들이 반평균 다 깎아 먹고 있다."


그때도 의문이었다. 그렇게 반평균이 중요하면 뒤쳐진 학생들을 어떻게든 다독이고 이끌어서 반평균이 올라가도록 하는 것이 선생의 역할 아니었는가. 저 말 자체가 더이상 너희들에게 어떤 기대도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선언이었다. 포기했다.


그렇게 앞만 보며 달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로지 앞만 위만 보며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었다. 자연스럽게 뒤나 아래는 보지 않게 되었다.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당연하다는 듯 그리 가르치고 있었다. 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아이들과만 사귀라. 그러면 그 조금이라도 나은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뒤쳐진 자기 자식들과 왜 사귀어 주어야 하는데?


뒤쳐지면 버리고 간다. 조금이라도 느리고 굼뜨면 단호히 버리고 앞선 자기들끼리만 간다. 그래야 더 쉽게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앞으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버려지는 것은 자기 책임이다. 자기가 게으르고 못났기에 뒤쳐지고 남겨지는 것이다. 그런 것들까지 일일이 돌아보고 챙길 여유따위는 없다.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복지가 거지 적선 정도로 여겨지는 이유다. 자기 잘못으로 못사는 것을 어째서 내가 낸 세금으로 보살펴야 하는가.


최저임금과 관련한 논란도 비슷하다. 드러난 말이야 서로 다르지만 속내는 하나다. 고작 그따위 일이나 하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 돈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일이나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만한 임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가. 가난해도, 그래서 생계를 잇기도 곤란한 처지라도, 심지어 부양할 가족이 있는 것마저 능력도 안되면서 가정을 꾸린 자기 잘못이다. 그러니 그들보다는 건실하게 경쟁하고 어찌되었든 낙오하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합리적으로 정책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놈들 대문에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온 이들까지 피해를 본다.


어제 논란이 된 팀추월경기를 보면서 느낀 것도 그것이다. 자세한 내막이 무엇인가는 잘 모른다. 관계자도 아니고 지인도 없다. 그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실들만 가지고 판단한다. 자기들은 빨랐다. 자기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자기들을 따라오지 못하고 뒤쳐진 노선영이었다. 자기들은 14초의 기록을 냈는데 노선영으로 인해 16초로 기록이 뚝 떨어졌다. 그러나 원래 팀추월은 맨 마지막 주자의 기록을 재는 경기다. 말 그대로 마지막 주자가 조금이라도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모두가 협력해야 하는 경기다. 마지막 주자의 기록이 곧 팀을 이룬 자신들의 기록이다. 뒤쳐진 주자를 지키지 못하고 돕지 못한 자신들에게 주어진 점수다. 그것을 잊는다.


웃고 있었다. 어이없어서인지 아니면 비웃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경기가 너무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하지만 그곳에 뒤쳐졌던 마지막 주자는 없었다. 인터뷰도 둘만 했고 행동도 둘만 따로 하고 있었다. 낙오자와는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면 자신들과 어울릴 수 없기에 낙오시키고 도태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부끄럼없는 당연한 행동이다. 전국민이 보는 인터뷰 앞에서도 조금도 감추려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을 정도로. 새삼 그 부모와 학교 선생들, 그리고 코치와 감독들이 궁금해진다. 어떻게 가르치고 길렀기에 이렇게 되었던 것일까.


하긴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상식인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버린다. 평균에 미치지 못하고 다수에 걸림돌이 될 것 같으면 멀찌감치 치워 버린다. 심지어 피를 이은 자식마저 부정하기도 한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살아남는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그래서 승자가 되려 하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 한다. 우병우가 괜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우병우야 말로 어른들이 바라던 가장 이상적인 아이의, 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를 위해서 타인을 버리고 짓밟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참 씁쓸하다. 굳이 어린 선수들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내 기준으로 모두 한참 어린 나이에 불과하다. 때로 인간은 타고 나기도 하지만 주위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기도 한다. 과연 그것은 누구의,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까.


단순히 경기에서 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록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팀경기라면 얼마나 팀원들과 조화를 이루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가. 조금 늦다고 동료를 버리고 자기들끼리 들어와서는 뒤쳐진 동료를 탓하는 인터뷰나 하는 그런 경기를 보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따위 경기를 보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경기장을 찾고 TV앞에 앉는 것이 아니다. 대중이 스포츠경기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현실에서는 사라진 스포츠에서만 볼 수 있는 꿈과 환상 같은 것이다. 스포츠맨십이라 부른다. 단순히 동료 하나 버리고 들어온 것이 아닌 그같은 관중의, 대중의 바람과 기대를 철저히 짓밟고 배신한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노선영 선수가 어째서 그토록 간절하게 팀추월에 출전하고 싶어 했었는가 여러 매체를 통해 보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열정을 국내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후회없이 모두 태워버리고 싶었다. 경기밖의 사정은 경기밖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관중이 보고 있고 시청자들이 TV를 통해 보고 있다.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울한 이유다. 그곳은 현실과 너무 다르지 않다.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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