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들이 갈수록 환경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들은 이미 그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무역장벽이다. 기술이 없으면 자기들 것을 사서라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자기들에게 물건을 팔지 못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인간들은 오로지 폭력으로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추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지면서 권위라는 것에 기대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이었고 그다음에는 권력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해졌을 때 인간은 정의라는 것을 찾아내게 되었다. 이를테면 조선의 사대부들이 강조하던 삼강오륜같은 것들이다. 송익필에서 시작된 예학 역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고 있었다. 부르주아들이 하층계급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도 상식과 교양, 도덕이었다. 정의는 따라서 전략이다.


어차피 그들은 지킬 수 없을 테지만 그러나 자신은 그것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 그럴 수 있게끔 고도로 교육받고 훈련받으며 그 번거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수단이 자신에게는 있었다. 그러니까 농민이 사대부들처럼 글도 배우고 책도 읽으려 하면 농사짓느라 시간을 뺐기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재산이 필요한 것이다. 고된 노동으로 심신이 지친 노동자에게 부르주아처럼 그림과 음악을 즐기고 독서를 즐긴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는가. 


국가단위에도 그것은 적용된다. 필요할 때는 민주화정부를 뒤엎는 쿠데타를 지원했다가 다시 필요해지면 독재정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압박하기도 한다. 말 잘듣는 독재자는 우방이지만 말 안 듣는 독재자는 단순한 살인자일 뿐이다. 어제까지 서방의 친구였다가 오늘은 갑자기 테러지원국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정의라나 그런 점에서 정당하게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보다 요긴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그 정의를 결정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한 발 앞선 만큼 한 발 앞서서 무엇이 옳은가를 결정할 수 있다.


이미 환경은 화두가 되었다. 화력이나 수력은 환경파괴가 심하고, 원자력은 너무 위험하다. 선진국이 주도하는 앞으로의 세계트렌드는 재생에너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생산비용입이 비싸다고는 하지만 그만한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선진국들에게는 있다. 무엇보다 한 발 앞서 연구를 시작한 만큼 더 값싸게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상당수 확보한 상태다. 재생에너지가 대세가 되면 당장 확보한 기술들을 다른 나라들에 본전에 마진까지 붙여서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다. 이후 세계의 에너지시장을 주도할 수 있게 된다. 중국이 괜히 국책사업으로 재생에너지에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한 발 앞서 나가야 뒤쳐지지 않고 흐름에 동참할 수 있다.


국가적인 의미에서 탈원전은 그저 원자력이 싫다는 일차원적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원자력은 위험하므로 원자력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 그러면 그 다음은? 재생에너지가 당장 비싸다지만 결국 언젠가 대세가 된다면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국제사회에서 경쟁에 동참할 수 있다. 일방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생산자로서 뒤떨어지지 않고 흐름에 편승할 수 있다. 지금도 사실 늦다. 중국마저 우리보다 벌써 한참 앞서가고 있는 중이다. 지난 9년 동안 정부에서 손놓고 있는 사이 중국은 벌써 기술적으로 우리를 저만치 추월한 상태다. 그런데 이대로 손놓고만 있을 것인가.


전기요금이 얼마나 더 비싸지고. 하지만 선진국들이 그렇게 결정한 순간 그것은 이미 당위가 되고 있다. 새로운 정의가 되고 있다. 언제까지 선진국이 지나간 길을 찌꺼기나 주워먹으며 쫓아갈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 사회 보수의 수준이라는 것이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단기간에 결과가 나오는 연구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저 돈만 잡아먹는 연구일 가능성이 높다. 기업이 투자해서 이루기에는 현실적으로 제약이 너무 많다. 국가가 책임지고 이끌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원전이 아닌 우리의 미래다. 미래의 당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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