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능력이 떨어졌던 전근대사회에서 한해걷이만으로 한 해를 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은 오히려 좁은데 아직 기술까지 부족해서 단위면적에서 생산되는 양도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에 세금이다 뭐다 다 떼어가고 나면 남은 것만으로 - 더구나 부양가족까지 먹여살리려면 결국 다른 수단을 빌지 않으면 안되었다. 참고로 이것은 한반도만의 사정이 아닌 거의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던 현실이었다.


결국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식량이 떨어질 때 쯤 되면 그래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대신할 수 있는 식량을 찾아 산으로 들로 헤메 돌아다녀야 했었다. 밤과 도토리는 그렇게 일찍부터 한반도인들에게 곡물을 대신할 수 있는 식량자원으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이마저도 없을 때는 산에 올라가 덩어리진 풀뿌리(草根)를 캐어 찌거나 나무의 여린 속껍질(木皮)을 벗겨 죽을 쑤어 먹기도 했었다. 그리고 함께 흔히 자주 먹었던 것이 신선들이 먹었다는 솔잎이었다. 솔잎에 콩가루로 만든 경단을 함께 먹는 것은 원래 부황을 막기 위한 민간요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나무껍질이나 솔잎을 너무 먹으면 섬유질이 뭉쳐 배변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항문에 열상이 생기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었다. 아예 섬유질이 뭉쳐서 항문을 막은 탓에 그것을 긁어내는 일도 흔한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서 상식문제. 여름 내내 솔잎을 먹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소나무껍질에 솔잎으로 연명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쌀을 수확해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수확을 거두었으니 천지신명께 떡을 지어 바쳐 올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연상될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여름내 먹건 솔잎을 얹어 밥을 짓고 떡을 찜으로써 그동안 덕분에 자신이 먹고 산 것에 대한 고마움에 더해 다시는 먹고 싶지 않다는 원망과 작별을 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까지 나를 살린 것은 솔잎이지만 이제부터 내가 먹는 것은 땅이 선물한 쌀이다. 어려서 시골에서 송편을 빚는다고 솔잎을 따는 것을 따라가 보면 솔잎도 아무 솔잎이나 쓰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솔잎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필요없는 잊혀진 지혜였을까?


그러고보면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imf당시 쌀이 없어 며칠동안 굶은 적이 있었다. 생선가게에서 일해주고 꽁치를 몇 마리 얻어왔는데 이것만으로 배를 채우려니 턱이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먹으며 버텼는데 그러다 쌀 한 줌 생겨서 밥을 해먹으니 어찌나 맛있고 좋던지. 그때 아직 남아있던 꽁치를 바라보던 나의 감정과 당시 사람들이 솔잎을 대하던 감정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고맙지만 원망스럽다. 그래서 지금도 꽁치를 잘 먹지 않는다. 한 동안 쌀 없어서 선물받은 장어로 버틴 적도 있던 탓에 장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참 당시는 고마운 먹거리들이었다.


인간이 한해걷이로 한 해를 살 수 있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쌀은 밀에 비해 생산력이 더 높았는데도 그랬다. 조선전기 사대부들이 필사적으로 백성들을 농지에 매어두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농사에 달라붙어 있어야 먹을 식량이 생산된다. 생산능력이 향상되었을 때는 그런 것 없었다. 아예 사노비마저 풀어주던 것이 조선후기였다. 역사의 무심한 흔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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