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치설을 채용하면서 마르크스가 범한 가장 큰 오류는 노동가치를 노동량과 연동시켰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한 양 만큼을 생산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기가 생산한 만큼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과연 맞을까?


노동자가 노동을 하는 이유는 대개 한 가지다. 바로 돈을 벌기 위해서다. 그리고 돈을 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자원을 확보한다는 목적이 강하다. 한 마디로 먹고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노동자가 아무리 일해도 정작 생산한 것으로 최소한의 생계조차 이어갈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사막에서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자기가 먹을 만큼의 밀도 생산하지 못한다. 오염된 바다에서 하루종일 그물질을 해도 자기 먹을 물고기도 잡지 못한다. 당연히 노동을 포기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정작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임금밖에 받지 못한다면 노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노동자 자신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 자신이 기대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이어야 한다. 1년 365일 3끼를 모두 라면만 먹으며 한강변에 텐트치고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라 여긴다면 그렇게 받으며 일하면 된다. 하지만 그래도 월세방이라도 있어야 하고 맨밥에 김치라도 매끼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면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 어째서 많은 중소기업들이 노동자를 고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왜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다면서 그런 중소기업은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 것일까? 고용도 불안정하고, 임금도 적으면서, 자기 생활이란 아예 없다시피 일까지 많다. 대개는 소집단이라 인간관계까지 무척 피곤한 경우가 많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일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지금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의 질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동자 개인에게 보장되어야 할 삶의 수준이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그것은 곧 인간의 가치이기도 하다. 인간이 산다고 하는 의미다. 단순히 먹고 입고 자는 것만을 삶이라 하는가. 아니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들까지 함께 누릴 수 있는 삶이라야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저 몸만 누이며 인스턴트 식품으로 한 끼 때울 수 있을 만큼만 벌어도 충분히 산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런 정도 수준이면 된다. 하지만 그래도 남들 만큼 먹기도 먹고 입기도 입고 문화생활도 누려야 한다면 그것이 기본이 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란 어느 정도인가.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이다. 선진국들만 보더라도 밤만 되면 거리에 불이 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지간하면 택배는 어림도 없다. 당연하다. 그만큼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이다. 사람을 고용해서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되도 않는 작은 장사를 하면서도 값싸게 아무나 쓰면 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충분한 수익이 보장될 때에만 필요에 따라 사람을 고용해 쓸 수 있다.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만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사람을 불러 부릴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노동자들에게 그만한 돈은 지불하지 못하겠다. 그깟 고용노동자들에게 그만한 많은 돈을 지급하지는 못하겠다. 최저임금에 반대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다. 과연 노동자들에게 그만한 돈을 받을 가치나 자격이 있는 것인가.


사람은 많다. 아무나 데려다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주는 만큼 받으라. 그것이 바로 19세기 초기자본주의사회의 논리였었다. 그래서 일을 해도 생계는 커녕 오히려 일을 하기 위해 생떼같은 자식의 목숨마저 직접 거두어야 했던 부모들이 있었다. 자식을 낳아도 감당할 수 없어서 도시의 강들은 유기된 아이들의 시체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고도 평생을 지독한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인간의 가치란 그 정도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고용해 쓰더라도 그 무거움을 안다. 그 무서움을 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개인은 오로지 한 사람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존엄하다는 것을 안다.


정상이 되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과도기에 많은 부작용이 있기는 할 것이다. 아직 한국사회의 인식이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노동자는 나와 다른 하류의 사람들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그래서 어렵다. 비정규직을 감히 자신과 같은 정규직으로 바꾸는 불공정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임금이 비싸지면 그만큼 사람이 어려워진다. 더 신중하고 더 조심스러워진다. 산업의 구조조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돈이 되는 산업만 남거나 아니면 돈이 될 수 있게끔 산업의 체질개선이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한 유예기간이다. 아무나 쉽게 자영업에 나서는 현실도 바로잡는다. 지금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아무 전문지식도 준비도 없이 쉽게 자영업에 뛰어들고 바로 망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나이 먹고 경비니 자영업이니 일로 자신을 혹사하는 경우도 줄어야 한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이 현실화되면 굳이 나이먹고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사실 나도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 계산해보니 전세집 하나만 있어도 방세 부담만 없으면 연금만으로도 나 혼자 취미생활 즐기며 사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니까 일단 그 부분은 빼고 이야기해야 한다. 환갑 다 넘어서까지 일하는 현실이 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부분만 빠져도 노동시장이든 자영업이든 많은 부분 정상화될 수 있다. 너무 일을 많이 한다. 이제 노인은 시장을 위한 소비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아무튼 최저임금의 인상을 두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입장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쓰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람을 고용해서 부리는데 그 정도면 차고도 넘친다. 그 이상은 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최저임금만으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사회에서의 인간의 가치다. 노동자의 가치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로 바꾸면 안되는 것처럼.


그래서 지켜본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어차피 같은 소시민인 자엉엽자며 구직자들마저 그런 주장들에 동참한다.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을 하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은 먼 이야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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