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남북조시대까지 중국의 장강유역은 대부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다. 삼국지에서 장강중류의 형주를 두고 물자와 인구 모두가 풍족한 요충이라 일컫는 것도 사실은 워낙 당시 중국의 중심이던 중원이 오랜 전란으로 초토화된 영향이 컸었다. 황건적부터 동탁, 그리고 동탁이 서쪽 장안으로 물러난 뒤에는 그 공백을 노리고 여러 제후들이 다투기 시작하며 사례, 연, 청, 예, 서의 중원의 고을들은 하나같이 전란에 휩쓸려 많은 인구와 물자를 잃고 있었다. 그렇게 전란을 피해 고향을 등진 백성들이 떠돌다 이르게 된 것도 결국 아직 전란의 피해가 크지 않은 남쪽의 형주와 양주이기 쉬웠다. 바로 이 형주를 다스린 것이 유표이고 양주를 통합한 것이 손책에 이어 동오의 손권이었다.


삼국시대에도 아직 개발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대부분 이들 지역의 행정단위란 지방관이 거주하는 주도와 그를 잇는 몇몇 거점들이 거의 고작이었다. 몇몇 행정력이 미치는 고을을 제외하고는 늪과 밀림, 그리고 산월족들 이민족들이 모여살며 낯선 환경에 던져진 문명화된 한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하물며 그로부터 수백년 전인 전국시대의 초나라라면 말할 것도 없다. 땅은 전국시대 어느나라보다 넓었지만 정작 그 땅의 대부분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다. 땅은 넓은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적었고, 인구 또한 기에 비례해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적은 편이었다. 땅도 크고 물자도 풍부힌데 정작 싸움을 하게 되면 허당인 경우가 많은 것은 바로 그때문이었다. 춘추시대에야 중원의 제후들 또한 아직 처음 주왕실로부터 분봉받은 것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기에 원래 가지고 있넌 넓은 영토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중원에서도 세력의 재편이 모두 끝나 자잘한 군소제후들이 거의 정리되며 그같은 영토의 우위는 더이상 이점이 될 수 없었다. 험난한 시대 초나라가 살아남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 답을 찾고자 초도왕이 불러들인 인재가 마친 위나라에서 왕인 무후와 불편해진 당대의 명장 오기였었다. 바로 출세를 위해 제나라 출신의 아내를 베고, 재상이 되어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의 죽음조차 돌아보지 않았다는 바로 그, '오자병법'의 저자 오기 그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기는 단지 싸움만 잘하는 무장은 아니었다는 듯 초도왕의 기대에 부응하며 초나라의 체질을 크게 일신하기에 이른다. 그렇지 않아도 끝도 없이 넓은 영토에 너무나 적은 백성들이 흩어져 살고 있어 효율이 떨어지는 마당에 그마저도 나라안의 왕족과 귀족들이 죄다 나누어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급해도 그들의 동의가 없으면 필요한 물자도 인력도 제대로 동원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국력에서 한참 미치지 못하는 오나라에 패해서 도성을 점령당하고 왕의 시체가 훼손되는 굴욕도 겪었던 것이었다. 바로 이 부분을 해결해야 한다.


사실 오기가 초나라에서 추진한 변법의 내용은 진나라에서 상앙이 한 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족과 귀족들에 의해 흩어진 권력과 그 권력의 지배 아래 있는 인력과 물자를 보다 효과적으로 강력하게 통제하여 동원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중앙집권이고, 그 중앙집권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가치와 규범의 독점이었다. 오로지 중앙의 국왕만이 법을 정하고 법을 집행할 수 있다. 오로지 중앙에서 국왕과 조정이 정하고 배포한 법률만이 개인을 통제하고 강제할 수 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신분상의 특권을 마음껏 누려온 기득권들은 소외되거나 심지어 그 희생양이 되기 십상이었다. 상앙이 진나라에서 태자시절의 일로 혜문왕의 미움을 받은 끝에 반란을 일으키고 처참히 죽어간 것은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상앙의 변법 과정에서 기득권을 잃고 오히겨 궁지에 몰렸던 지배층이 상앙을 죽여 다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리려 했던 탓이었다. 그럼에도 상앙이 죽은 뒤에도 상앙이 추구한 변법의 상당부분이 남아있었지만 오기의 처지는 달랐다.


원래 진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관중은 낙양으로 천도하기 전 서주의 중심지였고 따라서 주문명의 중심지이기도 했었다. 일찌감치 개간과 관개가 완료된 관중의 풍부한 생산과 인구는 단지 계기만 필요할 뿐 중앙집권을 위한 중요한 전제가 되어주고 있었다.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만 있다면 어지간한 반발이나 도전은 힘으로 눌러 버릴 수 있다. 그에 비해 초나라는 대부분의 미개발지로 도시나 마을마저 한참씩 떨어져 있던 터라 이들을 하나로 묶으려 해도 결국 중간에 반발하거나 이탈하는 이들을 모두 어떻게 하기에는 중앙조정의 힘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왕의 시신을 훼손했다는 이유만으로 70여 가문을 멸족시킨 초숙왕이 정작 왕족과 귀족들이 바란대로 오기의 변법을 철회하고 다시 이전으로 되돌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들을 모두 제압하고 오기의 변법을 일관되게 추진하려면 많은 것을 희생하고 각오해야 하는데 그럴 가치까지는 없어 보인다.


진과 초의 운명을 결정한 사건이었다. 상앙의 변법이 있기 전까지 서쪽의 진나라 역시 땅이 좀 넓고 인구도 좀 많은 정도의 그저그런 강대국 가운데 하나였다. 당장 싸우려면 꺼려지는 점이 없잖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막상 싸우면 또 마냥 지기만 할 것 같지는 않다. 혜문왕 이후 스스로 왕을 칭하며 나머지 6국을 힘으로 짓누르던 시절의 진나라와 위상의 차이가 있다. 결국 상앙의 변법이 진의 체질을 일신하고 진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비효율을 바로잡아 낭비를 없애고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오기도 초나라에서 그런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었는데 정작 오기 자신이 귀족들에 살해당하며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뒤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일방적으로 두들겨맞다가 한, 위, 조의 3진 다음으로 진에 패망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토가 부족한 것도, 인구가 부족한 것도, 물자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싸워 이기겠다는 의지와 그를 위한 수단이 결여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사소하지만 바로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라와 천하의 명운을 건 싸움에서 더 큰 역할을 하기도 하는 법이다.


같은 개혁을 하고서도 한 나라는 그것을 지켰고 한 나라는 그것을 버렸다. 결국 개혁을 추진한 군주가 죽고 하나같이 개혁을 실행한 재상들이 몰락하여 죽음을 맞았지만 한 나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개혁이 이익이 됨을 알았기에 지켜서 유지했고 다른 한 나라는 그에 반발하는 이들에 굴복해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 과연 그 정책이 옳은가. 그 정책이 효율적인가. 그래서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내놓았는가. 하지만 그보다는 상대에 대한 호불호나 원한과 같은 감정들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주저앉아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다.


당시 초나라가 보였던 구조적 문제들은 이후 삼국시대 강동에서 시작된 동오에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었다. 여전히 미개척지가 많았고, 곳곳에 흩어진 백성들에게는 일대를 장악한 호족들이 왕보다 더 가깝고 더 직접적이었다. 그런 동오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툴게 나선 결과가 바로 손권 말년의 흑역사인 이궁의 변이다. 그럼에도 남북조시대 동진을 이은 남조의 여러 왕조에서도 강남지방 특유의 느슨한 연결구조는 계속해서 답습된다. 아마 무엇보다 물리적 한계였을 것이다. 오기가 초숙왕에게 쥐어준 힘이라는 것도 고작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을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은 실패했고 한 사람은 성공했다. 패자는 사라지고 승자만이 남아 전국을 통일했다. 천 년을 기다려야 했다. 강남에서 주원장이 나타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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