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시작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였다. 이때도 일본 관동군은 정작 일본정부의 명령은 커녕 제대로 보고조차 않은 채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장작림을 폭사시킨 것 때문에 아예 텐노가 분노해서 내각을 해산시켰을 정도였고, 류타오후에서도 폭파사건을 조작하여 임의로 군사행동을 시작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심지어 조선주둔군마저 보고없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고서도 일본 정부는 추가예산을 편성하고 전쟁을 일으킨 주모자들을 영전시키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군대가 멋대로해도 정부는 어떤 통제도 할 수 없다. 경험을 얻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과정도 비슷했다. 아니 어찌보면 더 어이없다 할 수 있을 텐데, 그나마 만주사변 당시는 젊은 소장장교들이 상관들을 설득하려는 최소한의 모양새라도 보였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관동군 전체가 함께 움직이면서 조직적으로 조기에 전쟁을 주도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이때 노구교 사건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킨 주역이 다른 사람도 아닌 무다구치 렌야였다는 것이다. 바로 그 독립운동가 무다구치 렌야가 맞다. 인도까지 먹어치운 세계열강들이 어째서 중국만은 군벌들에게 맡긴 채 한 입에 삼키기를 주저하고 있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중국과 전면전쟁이 벌어질 경우 일본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저 전쟁을 일으켜서 공을 세우면 만주사변에서처럼 자기도 출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무다구치 렌야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이 한 정찰병의 실종소식이었다.


사실 실종도 아니었다. 단지 어떤 일로 부대에 복귀가 늦었는데 정작 병사가 사라졌을 때는 제대로 보고했던 지휘관이 병사가 복귀하자 찔리는 것이 있는지 보고하지 않은 것이 실제 전말이었다. 오죽하면 중국에 대한 퍼포먼스로 실종당한 병사를 찾는데 실종되었다는 병사까지 합류해서 자기를 찾는 헤프닝을 벌이고 있었다. 더 어이없는 것은 결국 나중에 실종된 병사가 사실은 복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무다구치 렌야는 병사나 지휘관에게 아무 책임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과정들을 거치면서 독단으로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함으로써 중국과의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때도 자기 명령도 없이 일개 연대장따위가 타국 군대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리 사실에 분노한 사단장이 바로 달려왔다가 구경만 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누구도 보고누락이나 명령위반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후 전개는 모두가 아는 바대로.


심지어 군인들이 나서서 유력정치인을 암살하는 사건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군인들이 텐노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경우마저 있었다. 민간정부를 우습게 여겼다. 아니 군인들끼리도 서로를 우습게 여겼다. 일본군 내부에도 여러 파벌이 있어서 육군과 해군은 사실상 별개의 나라처럼 존재하고 있었고, 각 육군과 해군에서도 파벌에 따른 알력이 상당해서 전쟁수행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과달카날에서도 신중론을 주장하는 사단장을 일개 참모인 츠지 마사노부가 임의로 해임한 경우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그토록 수많은 실패를 겪었음에도 좌천은 커녕 오히려 더 크게 영전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쿠데타 전통이 전혀 낯선 것이 아닌 이유다. 바로 그 뿌리인 구일본제국군부터 무언가 수틀리는 게 있으면 바로 행동으로 민간정부를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명령따위 듣지 않았다. 보고따위 않았다. 군을 사유환 채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초창기 한국군을 이루고 있던 핵심이 바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장교들은 한국말도 할 줄 몰라 통역을 세워야만 했었을 정도였다. 부정과 비리, 그리고 병사들에 대한 학대는 전통도 유구한 그들의 뿌리같은 것이었다. 그냥 생각나는 이유다. 대통령에 보고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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