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정시와 정규직, 그리고 최저임금 관련 논란의 핵심은 하나로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되도 않는 놈이 나보다 잘나가는 건 못 보겠다."


아마 한국에만 있는 속담이라는 모양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제갈량이 지었다는 '병법24편'에서도 가만 내버려두면 알아서 내분으로 망하는 것이 동이의 속성이라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저런 놈이 나와 같은, 아니면 나보다 더 좋은 조건에 있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이유다. 어째서 고작 그런 일이나 하는데, 그런 일이나 하는 주제들인데 지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곤란케 만들어야 하는가. 최저임금을 받으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루하루가 빠듯한 사람들은 외면한 채 오른 최저임금을 주느라 오히려 수입이 준 자영업자들의 처지만을 동정한다. 그들은 자기사업을 하기까지 그만한 자본을 마련하느라 더 많은 노력을 했을 테니까. 돈이 곧 그 증거일 테니까. 그런데 어찌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은 덜떨어진 인간들이 그런 훌륭한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어야 하는가.


부모가 부자인 것은 어쩔 수 없다. 부모가 전문직이고 고소득자라 강남에 살며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도 자기가 타고난 복인 것이다. 그래서 높은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집이 가난하든, 아니면 너무 구석진 시골이라 학교도 변변치 않아 공부할 환경이 안되든 성적이 미치지 못하는 놈들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문제다. 오죽하면 그런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데 돈을 쓰고 대학만큼은 성적으로 줄세워서 갈 수 있게 하자. 그게 그리 쉬우면 벌써 오래전에 그렇게 했다.


정규직과 관련해서는 이미 쓴 바 있었다. 전체 가운데 일부다. 그러니까 비정규직일 때는 가족을 채용했어도 전혀 아무 문제도 안되었었다는 것이다. 아직 계약직일 때는 알음알음으로 추천이든 특채든 기존 직원들의 가족이나 지인을 데려다 썼어도 전혀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는 일도 같고 급여수준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정규직이 되니 문제가 크게 불거지는 것인가. 정규직은 신분이고 따라서 정규직은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보상같은 것이어야 한다. 자유한국당이 그 부분을 제대로 겨냥했다. 나보다 못한, 나만 못한 자격을 갖춘 자들이 하는 일이나 급여수준이야 어떻든 정규직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것은 용납지 못하겠다.


사실 오래전부터 느껴온 바였다.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이른바 장르소설들을 읽으면서 더욱 많이 느끼고 있었다. 노력이란 다른 사람의 위에 서기 위한 것이다. 인간세계란 수직적인 층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가운데 어떤 층에 속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가치도 결정된다. 더 높은 층에 속하는 것만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보람이며 성취인 것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높은 층위로 올라갔을 때 그보다 못한 이들을 쉽게 멸시하고 차별하며, 그래서 그를 위한 과정들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너무 쉽게 사람을 죽인다. 죽일 뿐만 아니라 모욕하고 조롱한다. 하긴 자라면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배워 온 바가 그랬을 것이다. 대학에만 가면. 더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더 좋은 직장에만 들어갈 수 있으면. 그러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 갑질이 비단 몇몇 재벌가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다.


말 그대로 한국 사회는 아주 긴 하나의 수직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대학의 서열이 인간의 서열이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갖췄는가. 그러므로 그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대학 또한 그 정당한 보상으로 주어져야 한다. 최소한 나만 못한 누군가가 나와 대등한, 혹은 나보다 더 우월한 결과를 누려서는 안된다. 출발이 불공정해도, 그 결과가 불공평해도, 그 정당성만 보장되면 참을 수 있다. 그게 싫은 것이다. 나보다 못한 이가 나보다 나아지는 것. 그런데 세상살이가 그런가. 인간이 그런가.


사실 대학이 학생을 뽑을 때 보는 것은 자기 대학에 필요한 인재인가 하는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자기 기업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구하는 것이지 딱히 다른 사람이 보기에 공정하게 선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기가 보기에 납득이 안가니까. 대학도 내 기준에 따르라. 기업도 내 기준에 따르라. 정부도 내 기준에 따르라. 정확히는 내가 납득 못할 놈들을 받지 마라. 어찌되었든간에 입사과정이야 어떻든 여러 해 동안 해당 업무에 종사하며 숙련도와 경력을 쌓아 온 경우란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결코 그와 같아질 수 없다. 자기보다 그가 더 잘나가는 걸 보아 줄 수 없다.


그래서 수시가 필요한 것이다. 아니 그래서 수시가 불만인 것이다. 수시도 한 줄로 세울 수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수시는 한 줄로 세우기가 곤란하니까. 그래서 정당하게 자기가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부당하다. 그래서 불공정하다. 사소한 몇 가지 문제를 이유로 들먹인다. 사실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손쉬운 기준을 적용해 달라. 나보다 못한 놈들을 어떻게든 확실하게 걸러낼 수 있도록.


그래서 갑질을 하는 것이다. 나보다 못하니까. 나보다 아래 있다 생각하니까. 노력하지 않았으니 배달을 하는 것이다. 실력이 없으니 가게에서 서빙이나 하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갑질에 대해서는 대놓고 비굴해지기도 한다.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까.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최저임금이든, 대학입시든, 정규직전환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저 아래에서 밀어올려 평균을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싫다.


근본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내 위에 있는가. 누가 내 아래 있는가. 그래서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위에 서려 하고, 누군가를 밟고 밑에 두려 한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껏 이 사회를 발전시켜 온 원동력일지 모르지만 이미 한계다. 그래서 이 사회가 나갈 미래란 어떤 모습인가. 그런 고민조차 없다는 것이 지금 더 큰 문제일지 모르겠지만. 현상은 아는데 답이 없다는 것이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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