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래 좀 무심해서인지는 몰라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절차를 밟아 들어왔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일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지 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이고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특채고 공채고의 여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같이 일하는 인간이 부정한 수단으로 나와는 달리 큰 어려움없이 입사한 것을 알았다면 조금 화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직렬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그래서 얽힐 일도 별로 없는데 과연 그렇게까지 신경쓸 일일까? 그들이 얼마를 받든 어떤 대우를 받든 나와 직접 상관없는 일 아닌가.


어차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업무를 보는데 누구는 정규직이고 누구는 비정규직인 상황 자체가 부당한 것이다. 비정규직이라도 충분히 지금의 일을 감당할 만하니가 채용한 것일 터다. 그럴 능력도 안되는데 인건비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채용했다면 이보다 큰 낭비는 없다. 일을 할 수 있어야 생산성이 오르고 그만큼 전체의 이익도 늘어난다. 일은 못하는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오히려 전체의 비효율만 늘어나고 만다. 하물며 어찌되었거나 몇 년 씩이나 그 일을 문제없이 해내고 있다면 충분히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굳이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며 사람을 가려뽑으려는 것도 일 잘하고 조직과 문제없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을 골라내기 위한 것이고 보면 이미 몇 년 째 같은 일을 문제없이 해내고 있다면 자격은 차고 넘치는 것이다. 원래 경력직도 신입과는 다른 기준으로 선발하도록 되어 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사실상 경력직인 셈이다.


그런데도 정규직이 반대한다. 심지어 자기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청소나 보안 등의 업무에 대해서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 것을 노조가 나서서 적극 반대하고 있다. 논리는 간단하다. 자기들은 힘들게 시험을 보고 면접을 치러 정규직으로 들어왔는데 저들은 그런 과정도 없이 부당하게 정규직으로 전환되려 하고 있다. 불공평하다. 그러니까 본전생각이다. 자기들은 이만큼 힘들었으니까. 자기들은 그만큼 어렵게 정규직이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처럼 힘들고 어렵게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정규직이란 그런 가치여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동안 비정규직을 너무 싸게 써왔다. 비용도 쌌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쌌다. 아무렇게나 부리다 대충 잘라버릴 수 있는 소모품으로 여겨왔다.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들도 그같은 사용자의 인식에 길들여져 왔다. 비정규직은 자신들과 다르다. 비정규직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여야 한다.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정규직 문제 가운데 상당수가 정규직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상 정규직이 비정규직 차별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비정규직을 직렬이나 업무, 혹은 대우와 상관없이 자신들과 같은 정규직으로 만든다 하고 있으니. 조선 초기 조정에서 당시 천민으로 차별받던 화척들을 양인으로 삼고자 백정이라 불렀을 때 기존의 백정들은 차라리 백정이라는 이름을 그들에게 주어 버렸었다. 저놈들과 같은 취급은 받지 못하겠다.


신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기 실력으로 쟁취한 것이기에 도덕적으로도 정당한 자신의 신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그만큼 노력했고 실력도 인정받았으므로 정규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 너는 그렇지 못했으므로 비정규직으로 차별받아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정의다. 도덕이며 윤리다. 공평함이며 공정함이다. 그렇게 정규직으로서 비정규직에 대한 우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비정규직도 정규직과 같아져야 한다고 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라 한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동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사회적 격차가 어떠했는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솔직히 어이가 없다. 그래봐야 정규직인데. 그래봐야 남의 돈 받고 일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채용되는 과정이 달랐을 뿐이다. 채용되기까지의 절차와 이후의 대우가 달라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알량한 우월감을 놓기 싫어 같은 노동자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다. 저들과 같아질 수 없다. 저들과 같아져서는 안된다. 화척이 백정이 되면 자신들은 백정이기 싫다던 조선 전기의 백성들처럼. 그동안 누적된 비정규직 문제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들이 있음으로써 정규직은 자신들의 처지를 만족하며 누릴 수 있다. 다른 무엇도 아니다. 같은 노동자가 노동자의 적이 된다.


조금 더 냉정해지면 된다. 시쳇말로 쿨해지면 된다. 시야를 넓히던가. 아니면 아예 좁히던가. 나와 내 주위만 보면 그것을 벗어난 곳에서 일어난 일은 나와 상관없다. 같은 노동자로서의 연대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라면 같은 구성원으로서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공감할 수도 있다. 딱 그 만큼이다. 자기가 속한 정규직 노조 만큼. 자기가 고용되어 일하는 사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 만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만이 자신을 정의한다. 그렇게 믿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참 어렵다. 인간은 이렇게 저열하고 비겁하다. 우스운 짓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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