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희망이 넘치는 사회라면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얼른 저 사람처럼 잘 살아야겠다."


그러면 거꾸로 희망이란 없는 사회에서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저놈도 나랑 똑같이 못살았으면..."


차라리 부자가 더 인정이 많은 이유다. 원래 대대로 귀하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만큼 말이나 행동 생각에서 여유가 드러난다. 어차피 지금보다 더 귀해지나 부유해지나. 자기보다 더 귀하고 부유한 누군가를 보더라도 그보다 못하지만 자신 역시 제법 괜찮지 않은가. 그러면서 어느 정도 거리가 가늠되면 한 번 욕심도 내본다. 나도 저기까지. 나도 거기까지. 그래도 충분한 기반이 자기에게는 있다.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그나마 하루 일을 공치면 하루를 굶어야 한다. 저축도 없고, 아이들 학교도 제대로 마치기 어렵다. 일이라도 오래 열심히 해서 무언가 희망이 보인다면 그것이라도 기대고 살 텐데 아다시피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자리마저도 귀하다. 그런 동네에서 누가 우연히 좋은 기회를 만나 조금이라도 잘 살게 되었다. 그것을 보는 기분이 어떻겠는가.


온갖 소리들이 떠돌아 다닌다. 자기보다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보다 잘살고 자기보다 귀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라도 끌어내려야 한다. 그렇게라도 자신과 같은 위치로 다시 되돌려야만 한다. 아니라면 너무 비참하니까. 자기만 가난한 것은 너무 서러우니까. 내가 부자가 될 수 없으니 부자가 된 누군가를 끌어내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인정이란 때로 서로를 끌어내리려는 아귀들의 아우성과도 같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부자였던 이들에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기제다. 저들은 나와 다르니까. 저들은 우리와 근본부터 다른 존재니까. 그러므로써 납득하게 된다. 자기가 부자가 아닌 이유를. 그들이 부자가 된 이유를. 자신들이 부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차라리 부자인 이들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발가락 끝이라도 스쳤으면 자랑거리로 삼는다. 내가 이만큼 부자들과 가까이 있었다.


"너만 힘들어?"

"너만 고생했어?"

"나도 힘들어!"

"나도 너만큼 고생했어!"


노인들처럼 희망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이들도 없을 것이다. 남은 시간도 얼마 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기대하기에는 몸도 마음도 정신도 모두 지쳐 있다. 남들을 위해 배려하기보다 당장의 자기만족과 위로를 위해 그들을 끌어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자기만큼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들을 보며 자신의 고단한 현실을 잊으려 한다. 자기의 알량한 위세에도 감히 맞서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섣부른 우월감마저 느낀다. 내가 아직은 그만큼 대단한 존재다. 그것이 전부지만 말 그대로 그것이 그들에게 남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노인들만일까? 타인의 불행을 보며 그들의 불행을 비웃는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그들의 고통을 조롱한다. 타인의 행운을 보면서는 그들의 행운을 질투하고 시기한다.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보상금 많이 받았으니 된 것 아니냐 당당히 꾸짖을 수 있는 자신감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미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그 대가로 얻은 얼마간의 돈이 그리 부럽고 배가 아픈 것이다. 그만큼 이 사회는 아직도 가난하다.


IMF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IMF를 거치며, 그리고 김대중과 노부현 정부 아래 수도 없이 정리해고당하고 계약직으로 전락하여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처지로 몰린 사람들이 그만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까지 잃어버린 탓이다. 그래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복수다. 그냥 다 죽어보자. 희망이 아닌 발버둥을 위한 선택이었다.


사실 내가 다음, 아니 그 다음에라도 이 나라를, 이 사회를 이끌 리더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터다. 희망이다. 기대다. 목표다. 바람이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그래서 무엇을 하면 된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그 무엇이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과연 지금 누가 있을까? 국민들 자신도 이미 희망이라는 단어를 잊고 있지는 않을까.


서로에게 독을 건네고, 서로를 칼로 찌르고,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며, 그러면서 오로지 자기만 살려 발버둥친다. 인세에 지옥이 있다면, 아니 원래 불교의 지옥이란 윤회의 하나였을 터다. 내가 윤회하여 태어난 그곳이 지옥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업이다.


헬조선의 이유다. 희망이 없는 절망의 사회. 희망이란 빛은 어딘가 있기는 한 것인가. 멈출 수 없기에 그저 앞으로 달려가려고만 한다. 슬픔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