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권력은 권력자 개인의 것이었다. 지배아래 있는 모든 토지와 인민은 지배자 개인의 소유였다. 아무나 잡아다가 고문해서 죽이고 노예로 팔아넘기더라도 그것은 지배자 개인의 권리에 속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는 못살겠다. 피지배자들이 들고 일어나 지배자에게 항의하고 때로 지배자를 죽이거나 내쫓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지배자 개인만이 아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의 영역이 생겨난 것이었다.


세금도 처음에는 지배자가 자기 임의대로 매겼었다. 정확히는 모든 생산을 지배자가 모두 거두고 일정량을 피지배자에게 나누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예 모두 거둬가고 나눠주는 대신 생산자의 소유를 인정하고 그 가운데서 세금을 걷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진보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언제 얼마의 세금을 거두는가는 오로지 지배자의 권리에 속했다. 국왕이든, 아니면 지방영주이든 법이 정한대로 피지배자들은 고분히 세금을 내거나 아니면 반항하다가 죽거나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지고 있었다. 그리 오래지도 않다. 그마저도 못하겠다고 들고 일어난 것이 마그나카르타이고 프랑스의 삼부회였던 것이다. 세금을 거두려면 우리의 동의를 받으라.


군대도 지배자의 사병들이었다. 병사들은 오로지 자신을 고융한 지배자에 대해서만 사적인 충성을 바쳐야 했다. 물론 그에 따른 보상도 충분히 주어졌다. 많은 유럽의 군대들이 그래서 당시까지만 해도 용벙으로 이루어졌고 그 용병을 유지하는 재원이 국왕의 개인금고였다. 병사들로 하여금 국민을 살해하고 약탈토록 하는 것도 그래서 얼마든지 가능했다. 아니 아예 전쟁이 일어나면 고용주의 영토 안에서도 얼마든지 권리로써 마을을 약탈하여 모자른 급여와 보급을 벌충할 수 있었다. 30년 전쟁 당시 독일을 약탈한 것은 스웨덴과 프랑스의 군대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더 많은, 더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군대를 요구하는 지배자들에 의해 국민개병제가 시작되면서 바뀌게 되었다. 국민의 군대는 국민의 소유이기도 하다. 계몽군주란 그같은 군대와 국민을 지배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기도 했던 것이다. 국민의 국왕은 오로지 국민의 편이다.


왜 이런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가. 지금도 사실 마찬가지다. 권력자의 권력은 개인의 사유물인가. 아니면 공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으로서 누리는 권위와 권한은 대통령 개인의 것인가, 아니면 대통령에게 권력을 위임한 국민의 것인가. 여전히 권력의 사유를 인정하면서도 그에 따른 권력자 개인의 공적 책임을 강조했던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일찌감치 그 부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국왕의 사생활조차 국왕 개인의 소유가 아니어야 한다. 아예 국가재정을 국왕 개인의 금고를 특별히 분리해 사고하지 않았던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와 달리 조선왕조 내내 끊임없이 사대부들에 의해 왕실재정인 내탕금의 국고화가 추진되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국왕이 개인이 아닌데 국왕의 재산 또한 원래 나라의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그래서 국왕을 나라의 재산으로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자식들까지 가르치고 출가시키는데 쓰고 있지 않은가. 땅위에서 난 모든 것이 백성들의 것인데 그로써 영화를 누리는 국왕이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국정원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군의 기무사나 사이버사령부에서 그런 것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국가권력을 정권과 정권을 둘러싼 이해집단이 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한 것을 밝히고 처벌하는 것은 정치보복이다. 사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어지간한 정치선진국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권력은 단지 권력자 개인의 사유물인가. 권력자 개인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권력의 사유화를 허용한다. 심지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권력을 가졌으니 자기 마음대로 한다. 그래서 지난 정부 아래에서 정권이 언론을 부정하게 장악하고 사유화한 것에 대해서도 승자이니 당연하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현정부에서 언론을 마찬가지로 사유화하려 해도 절차를 밟으라. 이전에 사유화한 것은 당시 승자들의 권리였으니 이제와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적폐청산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의 실체인 것이고, 어쩌면 바로 이런 것들이 청산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적폐 그 자체인 것이다. 간단한 예다. 청탁을 왜 하겠는가? 국회의원이 굳이 자신이 국회의원임을 내세워서 다른 사람에게 청탁같은 것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기자가 자기가 기자라는 이유로 취재대상으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받는 것은 기자라는 자신의 직업을 사유화하려는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와 역할, 가치 등을 개인의 사적 이익과 교환하려는 것이다. 국가에서 임명한 공무원이니까. 국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지금의 자리에 임명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를 이용해서 기업이나 개인을 협박하고 그로부터 대가를 받아내려 한다. 그러니까 박근혜도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이명박도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원래 권력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적폐청산에 대한 두 가지 첨예한 입장은 이같은 현실을 보는 서로 다른 시각에서 비롯된다. 적폐라는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것들이 적폐라는 인식조차 없다. 오히려 공무원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뇌물을 받지 않으면 분노하는 경우마저 있다. 기자가 자기가 주는 금품과 향응을 거부하고 의도한대로 기사를 써주지 않으면 자격이 없다며 증오를 드러내는 경우마저 적지 않다. 국회의원 쯤 되면 자신의 권력을 얼마쯤은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자신을 위해 나누어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가. 그런 것들을 들추고 문제삼아야 하는가. 심지어 처벌해야만 하는 것인가. 다행이라면 첨예하지만 매우 일방적인 비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일 게다. 그럼에도 국가권력은 개인에게 사유되고 전유되어서는 안된다.


아마 그래서 적폐청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면 개인의 권력에 대한 인식이나 입장도 어느 정도 근사치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권력에 가깝다면 더 그렇다. 정치인으로서 권력자가 권력을 사유하여 문제가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하려 하는가. 처음부터 바른정당을 믿지 않았고 국민의당을 혐오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승민과 안철수가 하는 말들을 가만 들어보라. 사실 지지율이 나오지 않는다고 이념이나 성향의 차이도 아랑곳않고 공학적인 야합부터 고민하는 자체가 정당을 자신들의 사유물이라 여기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선택하면 지지자는 따라온다. 자기들이 결정하면 지지자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목적을 위해 만든 자신들의 정당이다. 그 짧은 시간에도 알량한 지위와 신분, 권력을 이용해서 국민의당 안에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가.


어차피 인간의 역사에 완결이란 없다. 항상 과정이다. 사유화된 권력으로부터 공공의 수단으로서 권력의 개념을 바꾸기까지 수많은 희생과 노력이 있었고 아직까지도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불과 수십년 전이다. 권력이 임의로 여성들을 자신의 욕망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 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적폐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폐단들이다. 아마도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 중대한 고비다. 지워진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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