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화폐의 가치가 항상 일정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몇 십 년 몇 백 년이든 물가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즉 돈을 쓰든 저축하든 더이상 손해보는 것도 이익보는 것도 없다. 


아니 더 쉽게 가정하자면 오히려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는 상황을 가정해보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물가가 떨어지면서 가지고 있는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고 있다. 오늘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보다 내일, 아니 모레, 차라리 견딜 수 있을 만큼 견디다가 마지막 순간에 물건을 사게 되면 더 싸게 더 많은 양을 살 수 있다. 


바로 옆나라 일본이 그렇다. 일본의 높은 저축률을 부러워하던 것이 불과 90년대였는데 이제는 걱정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더구나 버블붕괴로 인해 현물의 가치가 급속히 하락하자 사람들은 더욱 자신이 보유한 현금에 기대게 되었다. 더이상 소비도 않고 투자도 하지 않는다. 미국의 뒤를 잇는 경제대국이면서 소비도 재투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나서서 아무리 돈을 쏟아붓고 이자율을 낮춰봐야 도무지 요지부동이다. 그것이 바로 늪과도 같이 일본을 빨아들이던 잃어버린 10년의 정체였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쓰지 않는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도 그런 경우는 적지 않았었다. 조선의 역사에서도 있었다. 아예 돈을 매점하면 돈의 가치가 올라가므로 소수의 실력자들이 돈을 사들여 창고에 쌓아두고 축재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나름 열심히 돈은 찍어내는데 돈이 소수의 창고에만 쌓여갈 뿐 시장에서는 유통되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전황이라 부른다. 세계적으로도 곧잘 일어난 현상이다. 문제는 그나마 전근대사회에서는 아직 산업이 미비하고 자본의 생산참여 역시 그다지 크지 않아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란 곧 자본이 생산수단이 되는 체제를 의미한다.


소비자가 지갑을 열어야 상품이 팔리고 기업은 이익을 얻는다. 자본가들이 자본을 투자해야만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 돈을 계속 가지고 있게 하기보다 소비든 투자든 가지고 있는 돈을 계속 시장으로 돌려놓도록 유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시장은 경직되고 심지어 공황에 빠지게 된다. 정부의 지불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시장이 더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있는데 손놓고 있다가는 더 큰 위기를 자초할 뿐이다. 그래서 미국도 달러의 태환을 포기하고 있었다.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화폐를 유통시킴으로써 시장이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인 것이다.


물론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뛰어 화폐가치가 현물가치를 쫓아가지 못하는 고인플레이션은 당장 일상적인 생활마저 불가능하게 만들므로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물가가 오르지 않아도 화폐가치가 일정해도 정작 돈이 시장에서 쓰이지 않으면서 경제 전반을 침체하게 만든다. 그래서 지난 정부에서도 가계부채를 적극 권장했던 것 아니던가. 김대중 정부에서 카드대란을 사실상 조장한 것도 그런 식으로 빚을 내서라도 국민들이 돈을 쓰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난 정부에서 부동산경기를 부양하겠다고 대출을 장려하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렇게라도 시장에 돈이 풀려야 경제도 살아난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동산 등에 대출로 묶인 소비자들의 상태가 시장을 더욱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고보니 이야기는 최저임금문제로도 넘어가게 된다. 바로 소득주도성장이다. 국민 개인에게 더 많은 수입을 보장해주어 소비와 자본의 투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 주식등을 통해 실제 경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당장 나만 해도 월급이 오르면 아파트 대출금 갚고도 몇 십만 원 여윳돈이 생긴다.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된다.


가상화폐가 화폐로서 기능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는 또 하나 이유이기도 하다. 하긴 당사자들도 가상화폐를 금에 비유하고 있었다. 이제 누구도 금을 화폐로서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아는 때문일 것이다.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기에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발전과 성장을 꾀할 수 있다. 시장은 지속적으로 번영할 수 있다. 더 많은 화폐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쓰일 수 있어야 한다.


터무니없는 것이다. 어제의 가치와 오늘의 가치가 다르다. 내일의 가치는 또 다르다. 심지어 가격이 오른다. 그렇게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심장떨려서 그걸로 소비따위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 사고 내일 후회한다. 참 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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