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사회는 인간의 인지와 의식이 성장하며 더불어 진화해 왔다. 처음에는 피로 이어진 혈연이었고, 그 다음에는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관계였으며, 비로소 근대로 넘어오면서 그 이상의 자신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서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피로도 이어져 있지 않고, 기억과 경험도 공유하지 않은, 그러나 같은 인간, 혹은 같은 생명들을 과연 자신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대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 아예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오래도록 함께 있으려면 대부분 무척 어색해하고 불편해 할 것이다.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웃어주어야 할까? 말을 걸어야 할까? 그냥 이대로 모른 척 입다물고 있으면 혹시 실례는 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권에서 온 사람들은 쉽게 웃고 쉽게 말을 걸고 아니면 자연스럽게 침묵을 지키고는 한다. 개인주의란 보편주의다. 즉 보편적인 개인을 전제한 것이다. 나와 어떤 관계를 맺거나 맺지 않았거나 모든 개인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들은 그런 불편한 상황이 되면 서구권과는 다른 우리만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난관을 타개하고는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이다. 나이가 많으니 형이고 아저씨이고 할아버지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말을 놓고 행동까지 함부로 하기도 한다.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으면 형이고 나이가 적으면 동생이다. 전혀 모르는 사이라도 그렇게 깔끔하게 관계가 정리된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은 자신은 어른으로서 상대를 대하면 되는 것이고, 혹은 나이가 어리다면 그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상관없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의식을 보편의 세계로 확장하기보다 상대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관계 안으로 끌어오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형이고, 누나이고, 동생이고, 아저씨고, 아줌마고, 할아버지고, 할머니다. 이제는 심지어 이모니 삼촌이니 하는 호칭마저 이주 일상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이 아니다.


나이만이 아니다. 혹은 계급이 될 수 있고, 혹은 직위가 될 수 있고, 혹은 판매자와 손님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손님이 오가는 매장에서 몇 번이나 물건을 샀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무슨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거나 자신은 손님이니까 매장의 주인이나 종업원은 자신을 그에 맞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자신의 권리이기도 하다. 손님인 자신에 대한 상대의 태도나 예우마저 자신이 일방적으로 정의해서 강요하려 한다. 문제는 원래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위계의 설정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누가 우위에 있는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 그것은 소소한 권력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고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 역시 그에 걸맞는 예우와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상대를 자신과의 관계에 종속시키려는 시도인 것이다.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개인보다 손님과 종업원이라는 관계 아래 종속된 객체로서의 상대만이 존재하게 된다.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느 4성 장군의 부인이 남편의 공관병으로 배치된 병사들을 학대하고 인권유린한 것에 대해 '아들같아서' 그랬다 변명한 것이 마냥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 무심코 믿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첫째 자기 아들뻘로 한참 나이가 어렸다. 계급으로도 장군인 남편에 비해 한참 미미한 사병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가 이렇게 하라 시키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부모들이 자식을 애지중지 아끼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식의 미래가 곧 부모의 미래다. 자식의 성공이 부모인 자신의 성공이다. 그런 인식이 없었을 때는 자식을 그저 부모를 위한 수단으로만 함부로 다루고 있었다. 때리고 욕하고 강제로 돈도 주지 않고 일을 시켰으며 심지어는 돈을 받고 내다 팔기도 했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도 지구위 어디선가는 실제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이기도 하다. 부모로서 자식을 잘대해야 하고 잘되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의식이 없을 때 자식이란 부모에게 어떤 존재가 되는가. 그러니까 그런 야만상태의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대하게 될 것인가.


문득 저 말을 들으며 진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문화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이유였다. 그냥 모르는 남이었다. 한 번 본 적 없는 전혀 상관없는 남일 터였다. 독립된 개인이어야 했다. 분리된 인격이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사람들에게 관계란 직접적인 관계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집안에 숟가락 개수까지 알던 시대의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든 상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내가 형이다. 내가 선배다. 내가 어른이다. 아니면 당신이 어른이니 내가 그에 맞추고 따르겠다. 더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당황할 필요도 불편해질 이유도 없다. 그러니까 어른인 내가 시키는대로 하라.


물론 다른 나라라고 갑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결국 따져보면 원인은 같다. 상대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과 동등한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상대와 자신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찾고 자연스럽게 위계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 그 가시을 상대 역시 인정하고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면 어째서 우리나라에서 더? 어쩌면 그래서가 아닐까?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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