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한 여성이 성폭행에 저항하다가 살해당한 사건을 기사로 읽은 적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런 의문이 들었었다.


"차라리 죽기보다 그냥 나중에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미국에서 있었던 한 성폭행재판의 판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성폭행 피해여성이 AIDS와 임신을 우려해서 가해자에게 콘돔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었는데 그럼에도 피해자가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자위권 차원으로 인정하여 유죄판결을 내린 경우였다. 굳이 피해여성이 성폭행을 거부하기 위해 자신의 건강과 안전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협박이나 폭행이 없어도 당사자의 동의가 없으면 성폭행이라는 논리의 근거다. 굳이 여성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협박이나 폭행에 노출되지 않더라도 법이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지켜주겠다.


최근 동국대 어느 교수의 미투에 대한 발언이 화제가 되고 있다. 심지어 다수 남성들은 그 교수의 발언에 대해 당연한 상식이라며 동의와 지지를 보내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하긴 교수의 발언은 불과 얼마전까지 심지어 재판정에서 판사에 의해 성범죄를 부정하는 논리로써 일방적으로 쓰이던 그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성이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는데 과연 성폭행이 가능하겠는가. 실제 판사가 했던 발언 가운데 하나다. 바늘이 흔들리는데 실을 꿸 수 있는가. 여성의 동의없이 꽉 끼는 청바지를 벗기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니까 진정 자신의 정조를 지키려 했다면 죽을 힘을 다해서 죽기 바로 직전까지, 그러니까 아예 더이상 반항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끝까지 저항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죽으면 가해자는 성폭행범이 아닌 강간치사의 살인자가 된다. 이 무슨 개구리 똥싸는 소리인가.


굳이 성폭행을 모면하기 위해 피투성이 멍투성이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성폭행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최소 몇 주는 치료해야 할 상처를 굳이 입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칫 그로 인해 다른 피해나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 자체로 또한 억울한 것이다. 그래서 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피해자가 목숨 걸고 저항하지 않더라도 법이 피해자가 겪은 모든 굴욕과 수모와 상처와 분노와 억울함을 대신 해결해 줄 것이다. 대신해서 가해자를 처벌하고 응징해 줄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목숨걸고 저항하지 않는데도 실제 사람을 죽였다면 그 새끼는 정말 나쁜 새끼다.


도대체 피해자들에게 뭘 바라는 것일까. 그 교수라는 인간이나, 그 교수의 발에 동의하는 다수 남성들이 피해자들에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여전히 성에 대해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원래 미투의 취지가 그렇다 하니 거기까지는 그래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이 더 적극적으로, 자신이 입을 불이익과 피해를 감수해가며 어디까지 더 저항해야 성폭행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일까. 다시 말하면 자기가 성폭행하려 했을 때 여성이 거기까지 거부의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으면 자신은 합의에 의해 성관계를 가진 것이라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여성의 'No!'는 사실은 'Yes!'라는 어처구니 없는 믿음처럼.


어째서 해당 교수의 저 발언이 문제가 되는지. 어째서 저런 발언들이 피해자에게 2차가해가 되는 것인지. 그래서 다수 남성들은 아직도 미투에 대해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것은 성폭행도 아니고 성추행도 아니고 성희롱도 당연히 아니다. 피해자가 아닌 자신의 기준에서. 피해자가 아닌 남성인 자신들이 판단한다. 그러므로 피해자들은 억울하게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을 무고하고 있는 것이다. 미투가 사라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그래봐야 떠들기 좋아하는 몇몇 남자들이나 하는 소리에 불과하기는 하다. 제대로 정신이 박혔다면, 그리고 현실을 바로 알고 있다면 할 수 없는 말들이기도 하다. 죽을 필요도 없다. 굳이 다치거나 불이익을 감수할 필요도 없다. 죄는 법이 처벌한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 상식이 상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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