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오래전 페미니즘 영화라 하면 남성과 경쟁하기 위해 여성이라는 정체성마저 내던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이란 사회적 억압과 강요의 산물이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조건에서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같은 위치에서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신체적으로 더 불리한 조건에 있음에도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남성과 대등해지고 마침내 남성을 뛰어넘기까지 한다.


물론 오히려 과학의 발달로 인해 그같은 믿음이 단지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 많은 부분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당장 신체적인 조건과 능력부터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너무나 크기만 하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떻게 남성과 대등해질 수 있을 것인가. 바로 다수 남성들과 페미니즘이 부딪히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여성들이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해서 여성성마저 포기해가며 노력하는 모습도 보이고 했었다. 외모도 남성처럼 꾸미고, 옷도 남성처럼 입고, 행동까지 남성처럼 한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경쟁해서 마침내 남성과 대등해지고 남성을 뛰어넘는다. 그런 모습에 감동받고 스스로 반성하게 된 남성들도 그래서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성을 자신과 대등한 경쟁자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다. 대등한 경쟁자. 그런데 여성 스스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흔히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이라는 성 자체가 기득권이 되고 있다 말하지만 그 기득권이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후기 소설인 '양반전'에서 기껏 돈을 모아 양반을 사고서도 양반으로서 갖추고 지켜야 할 조건들에 지레 눌려서 포기하고 만 농민의 경우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혈통만 양반이어서 양반이 아니다. 부모가 귀족이니 당연히 자식도 귀족인 것이 아니다. 차라리 신분제가 크게 흔들리기 전까지는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었다. 끊임없이 긴장하고 노력하면서 다른 기득권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교경전을 아예 달달 외워야 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무장을 갖추고 나가 싸워야 하는데 아무나 그러고 싶다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성 역시 마찬가지다.


어렸을 적 부터 아예 세뇌당하다시피 한다.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세뇌당하듯 남성 역시 남성으로서의 역할을 세뇌당한다.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의 책임은 필연적으로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장래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위한 경쟁으로 내몰고 만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해야만 하기 때문에 공부도 하고 진학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취직을 해서 진급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자기 가족을 지킬 수 있다. 그를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남성들과 스스로 비교해가며 자신을 채찍질한다. 최소한 여성들은 남성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최소한 여성보다는 나아야 하고 내 주위의 다른 남성들보다는 나아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경쟁에서 이기고 비로소 새로운 출발선에 섰는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다른 조건에서 경쟁하려 나서고 있다. 기분이 어떨까?


어쩌면 남성들이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인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서로 타고난 것이 달라서 안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노력조차 않고, 그동안 남성들이 지금의 위치에 서기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해온 만큼 노력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서 그저 남성과 대등해지기만 바란다. 아무런 중간과정 없이 그저 남성과 같은 출발선상에서, 심지어 골인지점까지도 함께 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것이다. 차라리 안되더라도 자신들만큼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좌절하더라도 도전하는 모습에서 자신들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를테면 신고식이라는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들인 노력이나 겪어야 했던 어려움 만큼 나와 같은 위치에 서기 위해 대가를 치르고 자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다만 문제라면 한국사회에서 그것이 꽤나 심각할 정도로 가혹하다는 데에 있다.


사실상 여성이 여성을 유지하며 남성과 동등하게 경쟁하고 성공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시피하다. 너무 일을 많이 시킨다. 너무 노동자를 혹사한다. 최소한 결혼은 몰라도 출산은 감당할 수 없다. 대부분 남성들도 인정하는 바다. 여성이 임신하고 출산하고 아이를 기르는 동안 전처럼 일할 수 없으며 그만큼 다른 사람이 감당해야 하기에 여성의 채용은 몰라도 결혼이나 임신 등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렇더라도 남성과 대등해지고 싶으면 그런 것들까지 기꺼이 감수하라. 출산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아이까지 기르는 건 어림도 없는데 여성이 자신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임신은 거의 절대 안된다. 그러니 여성의 입장에서도 지레 포기하는 경우가 나오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여성이 여성이라는 특수성을 인정받으면서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사회구조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지금처럼 그저 남성이 차지한 기득권만 자기들이 가져가겠다는 태도만으로도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단 남성들이 짊어진 부담을 최소한 여성들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으로 함께 줄여줄 필요가 있다. 남성들이 짊어진 부담 만큼 여성 자신도 짊어질 각오를 다져야 할 필요도 있다. 그만큼 더 노력하고 남성들 만큼 노력하는 자신을 보여준다. 남성이 남성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여성 자신도 남성과 경쟁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베풀어지는 남성의 친절과 배려를 분노하며 거부할 정도의 자존감이 필요하다.


얌체로 여겨진다. 그저 하는 것 없이 공짜로 누릴 것만 누리려는 이기적인 태도로 여겨진다. 남성들이 여성, 그보다는 페미니즘에 가지는 반감의 이유다. 사실상 지금의 높아진 여성의 지위란 인간을 집사로 부리는 고양이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기도 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응석을 부린다. 그런 주제에 남성과 동등해지려 한다. 남성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 반감이 없을 수 없다.


기분나쁠 것이다. 그러라고 쓰는 글이다. 과거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해지기 위해 자원해서 전장에 나가 목숨걸고 싸우기도 했었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여성이라는 성에 의지해, 혹은 정치적인 옳음을 앞세워 권력에 기생해가며 이룬 여성의 지위향상이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당장 남성들이 그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다. 기회만 되면 뒤집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여성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 사회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다. 그런 남성들을 일방적으로 거스르며 윽박질러 이루어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어도 잠시 뿐이다.


구호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현란한 수사로 가득한 주장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실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현실에서 여성이란 남성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는가. 남성에게 여성이란 과연 대등한 경쟁자로서 확실히 인정받고 있는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인간이며 동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을 잊고 있지 않은가.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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